〈 97화 〉 롤 모델(6)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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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의원께서 내게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았다.
아무리 딸의 선배라고 하지만 자식뻘인 나에게 부탁하기엔 체면이 없다는 생각이든지 아니면 말을 끄집어냈다가 내가 거절하게 되었을 때,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이란 걱정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결국 나이가 어린 내가, 먼저 물꼬를 트는 것이 옳다 싶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으신데, 그냥 편하게 하시지요.”
김 의원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학교생활과 연기 생활을 병행하겠다고 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정치와 관련하여 딱히 심오한 의견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눈 결과, 나란 인간이 단순한 연기자 또 정치외교학과를 지원한 신입생보다는 정치에 대해 가지는 식견이 제법이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딸과의 인연을 빌미로,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욕심이 났을 것이다.
“혹시 시간 날 때마다 우리 지역구 사무실에 나와 줄 수는 없겠나?”
“예?”
“우리 지역위원회에서, 문화예술 부장을 맡아서 활동해줄 수는 없나 하는 부탁일세.”
“에이~ 제가 아직 정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인데, 무슨 당직을 맡는다는 말입니까?”
저 말에서 김영범 의원이 느끼는 다급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문화예술 부장이라니?
아마 내가 전생에 정치인으로 살았던 기억이 없었더라면, 당직을 주겠다는 제안에 ‘이게 웬 떡인가?’하고 반색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지역위원회의 당직이라는 것이 이른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고, 또 중앙당 조직도 그렇다고 시도당 조직도 아닌 일개 지역위원회의 당직에, 웬 문화예술 부장이란 말인가?
김 의원이 제안한 문화예술 부장이라는 직책은, 그냥 나를 회유하기 위해 김 의원 입에서 급조된 당직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표시를 내봐야 서로 앞으로 얼굴 보기에 어색할 뿐이니, 그냥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이기에 그런 직책을 받아들이기 부족하다는 말로 정중히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의원님.”
“말하시게.”
“정당의 지역위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위기를 살피고 배운다는 차원에서, 이따금 의원님 지역구 사무실에 놀러 갈 수는 있겠습니까?”
“자네가 말인가?”
“예.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저도 언젠가는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양산 쪽에는 딱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없고, 현역 국회의원이 H당 소속이어서요.”
“그렇지만 그렇게 한다면, 양산지역 지역위원회 사람들이 서운해할 텐데?”
“아직 제가 입당조차 하지 않은 걸요.”
김 의원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내가 학업과 연기자 생활을 병행한다고 했을 때는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던 표정이, 내가 자기 지역구 사무실에 놀러 가도 되느냐는 말에, 김 의원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밝아졌다.
“한 배우 자네가 지역구 사무실에 놀러 오겠다는데, 그걸 반대할 사람이 대한민국 사람 중에서 누가 있겠나? 그것도 일반회사도 아닌 정당 사무실로 자네 같은 배우가 찾아오겠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지.”
“그럼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시게. 내가 문수봉 보좌관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둘 테니, 언제든 찾아와서 문 보좌관을 찾게.”
“지역구 사무실에, 비서관이 아닌 보좌관을 배치하셨습니까?”
“물론 보좌관을 배치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 내가 부산으로 지역구를 옮기기로 한 가장 큰 이유가 지역에 천착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니, 아무래도 지역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네.”
국회의원은 4급 보좌관 둘과 5급 비서관 둘, 그리고 6, 7, 9급 비서 각각 1명 이렇게 7명의 보좌진을 둘 수 있다.
그리고 의원에 따라서는, 인턴 한 명을 별도로 고용하기도 한다.
4급 보좌관은 국회에서 입법 활동을 보좌하는 정책보좌관과, 자금과 선거 그리고 지역구를 관리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정무 보좌관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부분 현역의원은, 선거가 임박한 때가 아니면 보좌관 둘을 의원회관에 배치해서, 국회 입법 활동 보좌하게 할 뿐 아니라 언론과 소속 상임위원회의 유관기관에 대한 관리, 그리고 자금 운용 등을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회의원으로서는 아무래도 믿을 수 있으면서 또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지근거리에 두고 있는 것이, 국회의원으로 직무를 수행하는데 훨씬 유리하니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 현역의원은 지역구 관리는 사무국장에게 맡겨두는 것이 보통이고, 지역을 조금 챙긴다 싶은 국회의원 같은 경우는 비서관 또는 비서를 지역구 사무실에 상주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김 의원은 보좌진 중에서도 핵심인 4급 보좌관을 지역구 사무실에 상주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면, 김 의원이 지역구 관리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의원님, 외람되지만 질문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보시게.”
“대권 도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알기로 김 의원 이 양반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현역 국회의원 중에서 대권 도전에 관해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품고 있는 양반이었다.
하지만 아직 당내에 자기 세력이라고 할 만한 의원이 없고, 워낙 유순한 이미지로 인해 대중의 이목을 끌지 못한 탓에, 딱히 별도의 지지 세력이 없다는 점이 약점이다.
그런 이유로 속에 품은 그것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고 있을 뿐, 그렇다고 대권 도전에 관한 욕심이 없어지거나 포기한 것은 아니다.
“대권이라........ 한 배우 자네는, 내가 대권에 도전할 역량을 지닌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전 정치는 전문정치인이 해야지,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쪽입니다. 물론 정치판에 국민들이 관심을 기울이게 하려면 저 같은 딴따라들을 동원해 쇼라도 해야 하겠지만, 그런 쇼에 의해 얻어지는 인기는 어차피 거품일 뿐이지 않습니까?”
정치판에서 대중적인 인기라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인기라는 것은, 한 정치인이 선거에서 국민 다수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랬기에 정치인 대부분은, 굳이 대통령선거뿐 아니라 지역 국회의원선거 심지어 지방의회선거에서조차 유권자인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 후보 스스로 쇼를 벌이거나 아니면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배우나 가수 등의 연예인을 동원해, 줄 세우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영범 의원이, 나란 존재를 필요로 하는 이유 또한 바로 그것이었다.
만약 내가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김 의원 옆에 붙어 다니거나, 아니면 몇 번만 김 의원 선거사무실에 얼굴을 비추면, 그것만으로도 선거 판세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은 분명하니 말이다.
선거에서 후보 자신이 직접 쇼를 하거나, 아니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연예인을 동원해서 인기몰이를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거가 끝이 난 후 당선의 영예를 얻은 후에까지, 그런 쇼를 통해서 인기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결국 그것은 그 정치인뿐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사태를 초래할 수가 있다.
그랬기에 나는 이전의 생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이후에는, 가능한 내게서 배우 한강수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오롯이 국회의원 한강수로 서기 위해서 노력했었다.
“한 배우.”
“예. 의원님.”
“자네가 보기에, 내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정치인이라고 생각 하나?”
“솔직히 의원님께서는 너무 원칙주의자십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은 원칙주의자에 대해 호의는 가지지만, 그 사람을 광적으로 좋아해 주진 않지요. 심지어 원칙이 가장 강조되는 군대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원칙대로 하는 상관을 존경하긴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장군은 물론 하다못해 소대장조차도 병사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 정치인 김영범 의원이 지닌, 유일한 약점이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무릇 정치인이라면 어느 정도 쇼맨십도 있어야 하는데, 김 의원의 경우 오로지 진정성만 내보이면 국민들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란 생각으로 살아온 양반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당 최고위원 중 한 사람에 불과한 이 양반이,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차기 총선에서의 불출마선언을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 결과 4년이란 시간 동안의 정치활동 공백을 스스로 자처했었고, 덕분에 정치인으로서 한창 정점을 향해 달려가야 했을 시기를 허비한 탓에,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동료의원에 비해 4년을 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김영범 의원의 어리석음은, 지역에 천착한 정치를 하겠다는 명분으로 한 번 더 반복되었다.
지역에 천착하겠다는 명분 하나로 자기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왔지만, 지역 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한 부산에서의 첫 선거를 거하게 말아먹고, 또다시 4년이란 시간을 정치 낭인으로 지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내가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비록 성급하다는 질타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자칫 내가 던진 패가 오히려 결론을 악화시키게 될 수도 있지만, 오늘 밤 바로 내가 가진 패를 던지기로 했다.
“의원님.”
“말씀하시게.”
“대권 도전은 하셔야 하겠는데, 길이 보이지 않으시지요?”
“......”
“저는 아직 정치도 잘 모르고 선거에 대해도 제대로 모릅니다. 그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의원님께서 노여워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냥 대한민국 국민이자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보시게.”
“만약 지금 의원님께서 대권 도전을 선언하신다면, 대중의 비웃음을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아예 대중의 관심조차 얻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이제 나로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지나칠 정도의 솔직하면서도 잔인한 내 말에도 김 의원은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은 채, 그냥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내가 김 의원에게 한 말은, 김 의원이 아닌 대한민국 정치인 누구라도 자존심이 상할 표현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뺨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시건방진 소리가 될 것이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대권에 도전할 기회가 찾아올 것이고, 그 기회가 온다면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기어이 이 대한민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 면전에서, ‘당신은 대통령이 될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대놓고 선언한 격이니 말이다.
그것도 그 말을 한 대상이, 자신이 어느 정도 그 정치적 판단과 역량을 인정해줄 수준의 사람이 아닌 아직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새파랗게 어린놈이 그런 이야기를 내뱉었으니, 그런 소리를 듣고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가 부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