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롤 모델(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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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 의원님을 롤 모델로 삼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1990년 당시 YS의 비서였던 김영범의 행보를 놓고 비판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다.
아니 비난하거나 비판할 가치조차 부여하기 어려운, 정치판에 갓 발을 들이민 알라였다는 것이 정답이다.
모르긴 해도 김영범은 보스인 YS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라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당시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신다면, 굳이 우리 당으로 당적을 옮기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당시 우리 당이 집권당긴 했지만, 그때 상황은 우리가 완패할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배우, 자네는 정당이 그리고 정치인이,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 정치인이 국민에게 가지는 의무는 뭐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갈피를 잡기 어려운 두루뭉술한 질문이었다.
김영범 의원이 재선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가만히 있었으면 당선이 거의 확실했던 당을 탈당한 이유가, 나로서는 솔직히 이해가 되질 않았던 것이다.
정치판에서 철새라고 불리는 자들 대부분은, 소속 정당 간판으로 선거에 이길 자신이 없거나 공천이 여의치 않을 때,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탈당의 변을 만들고 탈당을 결행하는 법이다.
그런데 당시 독수리 오형제란 별칭을 얻었던 김 의원을 비롯한 다섯 명의 보수당 국회의원들은, 그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되는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그들 다섯이 탈당을 결행할 당시만 하더라도 당시 집권당인 우리 당은, 민심을 완전히 잃어 참패가 예정된 상황이었고, 거기에 더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던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또 당시 탈당을 결행했었던 다섯 국회의원 면면을 살펴본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 옆에 있는 김 의원을 비롯한 다섯 중에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 사람은 없었다.
당선이 확실시 되던 상황에서 소속 정당을 박차고 나온, 그들 다섯 명은 철새라 낙인찍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솔직히 의원님께서, 어떤 부분에 관해서 질문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당시 의원님은 굳이 그 당을 탈당하실 이유도 없었고, 당시 정치 상황에서는 탈당이 어리석은 결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배지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어리석었지. 다행히 탄핵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반전 덕분에 당선되긴 했지만 말일세.”
결국 김영범 의원의 지금 저 말은, 최악의 경우 낙선까지 각오한 일이었단 뜻이다.
그랬기에 나는 아까보다도 더, 김영범 의원의 당시 정치 행보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이다.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정치는 그리고 정치인은 우선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리라네. 그리고 정당이라는 곳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이고.”
“저 또한 그 말씀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시 내 판단으로는, 당시 내가 보수당이 그런 원론적인 측면에서 정당으로서 자격을 잃었다고 판단했던 것이었네.”
“어떤 면에서 그랬다는 말입니까?”
우리 말 중에 도긴개긴이란 단어가 있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정당이나 정치인을 이야기할 때, 어느 정당이나 정치인을 막론하고 바로 그 ‘도긴개긴’이라 생각하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수많은 정치지도자 중에서, 진정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또 한 정치인의 퇴장을 안타까워하면서 국민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든,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되었던가?
저 말을 놓고 판단하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집권하는 것을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집권당이나 제1야당이나, 대중정당 대부분은 당의 이익을 쫓는 일에 골몰할 뿐,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정당을 찾기는 힘들다.
그리고 정당에 속한 정치인인 국회의원 역시,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국회의원 배지를 탐낼 뿐 진정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정치하는 국회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로 찾기가 힘들 것이 우리 정치 현실이다.
선거 때만 되면 지역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소외된 이웃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설레발이나 치면서 사진이나 찍고, 길가는 사람이 있으면 허리가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허리를 숙이다가도, 당선이 확정되면 언제 자기가 그랬냐는 듯 모른 체하는 족속들이 바로 정치인이니 말이다.
그것은 진보를 표방한다는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답을 내리자면 진보를 표방한다는 정당의 후보들의 전과전력만으로도, 충분히 차고 넘치는 것이 대한민국 정치 현실이다.
웃기는 일이지만 진보를 추구한다는 정당의 정치인(국민의 선택을 받아 당선되어 배지를 단 사람이 거의 없으니) 중에서, 유별나게도 음주 운전의 전과가 많은 것이 그 단적인 예 중의 하나다.
그러면서 그 사실을 지적하면, 왜 자기들에게만 지나칠 정도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강변한다.
물론 음주 운전 전과 하나만 두고, 내가 그 진보정당이란 곳에 소속된 국회의원 지망생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 진보세력이라 자처하는 자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정치력이 없다는 점이고, 상대적으로 강점으로 치부할 수 있는 부분이 도덕성이다.
그러니 유권자인 국민으로서는, 진보정치인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엄격할 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대중정당, 그러니까 원내 제1당과 제2당 소속의 정치인들은, 아무리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 진보라고 떠들어봐야, 그들을 진보라고 생각해줄 국민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 정당 역시 진보가 아닌 보수일 뿐이고, 조금 진보 쪽에 점수를 과하게 준다고 해봐야 진보와 보수의 중간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튼 김영범 의원이 내게 질문했던 그것은,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배우 자네, 금도란 단어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잖습니까? 그래서 정치판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이 ‘선을 넘었다.’라든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일세.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고.”
“그럼 당시 보수당이, 그 선을 넘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맞는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국회의원뿐 아니라 대통령도, 국민의 직접적인 선택으로 결정되는 자리일세. 그렇다면 일반 서민이 뭐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이 나라의 정치인이라면 여야를 막론하고 그 대통령에 대해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대통령의 권위 또한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일세.”
“그거야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이제야 김영범 의원이 내게 하고 싶어 했던 말이, 무엇인지 짐작되었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양반이 처했던 상황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시 나는, 정치권에 영입되기 전으로 한창 국민배우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였기에, 딱히 정치에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매일 텔레비전을 켜기만 하면 여야를 막론하고 대통령을 까대는 뉴스가 나오던 탓에, 씁쓸한 기분을 금치 못했었다.
“혹시 의원님께서, 당시 그 대통령님의 지지자이셨습니까?”
“그럴 수야 있겠나? 그래도 명색이 내가 보수당의 국회의원이었는데. 단지 보수당의 국회의원뿐 아니라 자기네들이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당선시켰던 정당의 국회의원들까지, 대통령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그건 아니다 싶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그 양반이 참 불쌍하단 생각도 가졌었지.”
대한민국에는, 두 분의 고졸 출신 대통령이 있다.
고졸 출신 대통령 두 분 중에서 한 분은 확실한 지지 세력이 있었기에, 재임 중 IMF라는 국가부도위기 사태를 겪었음에도 국민의 굳건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다른 한 분은 아니었었다.
당의 중진들에 비해 정치경력이 일천했다는 점도 그 양반의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벌을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 대학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 고졸 출신이란 학력이, 집권당 내에서도 그가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비록 차기 총선에서 참패가 예상되긴 했었지만, 당시 집권당이자 제1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직 대통령의 탄핵소추라는, 전대미문의 사건 주인공이 되기도 했었다.
지금도 현역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선거 때만 되면 마치 자기가 그 양반의 호위무사이기도 했던 것처럼 설레발치는, 우리 당의 국회의원 대부분이 당시 그에게 등을 돌렸던 결과이다.
“그럼 의원님께서 당시 보수당을 탈당해서 우리 당에 입당하신 이유가, 당시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까?”
“내가 대통령을 지켜야 할 의무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지키겠다고 나선다고 지킬 수 있는 일도 아니잖나.”
“그럼요?”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지. 당시 정국처럼 여야가 정치적 타협은 아예 고려하지 않고 대립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의 몫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네.”
물론 내가 김영범 의원의 당시 생각을 100% 이해하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양반이 당시 어떤 생각으로, 탈당을 결행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정치판에서 살아왔던 사람치고는 정신이 아주 순수한, 좀 나쁘게 표현하자면 참으로 순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인은 자신이 속한 정당에도 충성해야 함이 맞지만, 그렇다고 국민에 우선해서는 안 되는 존재일세. 정치인이 가장 충성해야 할 대상은, 국민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고.”
“의원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단지 지금으로써는 당시 의원님께서 그런 이유만으로, 꽃길을 벗어나 비포장도로로 내려서신 그 이유는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굳이 이해하려고 할 이유가 없는 일일세. 내게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처럼, 한 배우 자네에겐 자네가 가야만 할 길이 있는 법이니까.”
정치에 관한 이념이나 생각이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진 생각이 김영범 의원과 전혀 다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전생의 삶에서 이 김영범 의원을 만날 수 있었고, 지금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내 전생의 삶이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김영범 의원과의 이야기는 한참 계속되었다.
처음 김영범 의원의 말투는, 선배 정치인이 아직 정치 문외한인 후배를 가르친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서 질문과 답이 계속되자, 어느 순간부터는 이야기 상대 정도는 가능한 친구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기 시작했다.
“한 배우”
“예. 의원님.”
“한 배우 자네가 정치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뭔가?”
내가 이미 한 번 죽었다가 다시 회귀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내가 전생에 의도치 않게 정치판에 발을 디뎠었고, 내 정치적 야망과 포부를 펼쳐보기도 전에 견제를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그 이야기 또한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