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롤 모델(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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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도대체 누구며, 뭐 하는 사람인가?”
평소 뉴스에서 봤던 김영범 의원은, 진중하면서도 항상 온화한 표정의 정치인이었다.
그렇지만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김영범 의원은, 세상 딸 가진 아버지의 그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고, 김 의원의 말에는 노기까지 어려 있었다.
현서 양은 처음 보는 자기 아버지 모습에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한 표정이었고, 나도 상상을 훨씬 능가하는 현실에 말을 잇지 못했다.
“김영범 의원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는 누구신지?”
“저 사람의 아내인, 배우 서예나라고 합니다.”
“배우 서예나 씨라고요?”
“의원님의 따님인 현서 양하고 너무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시간이 이렇게 늦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이 양반은?”
“제 남편이고, 저하고 같은 배우 직업을 가진 한강수라고 합니다. 올해 현서 양하고 같은 B 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는 신입생입니다.”
내가 어리바리타는 통에 자칫 고성이 터져 나올 수도 있었는데, 예나가 차에서 내리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아무리 정치인이라고 하더라도, 배우 한강수는 모를 수 있지만 서예나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해서는, 김영범 의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지 대한민국 배우 중에서 Top을 달리는 서예나가, 어떻게 해서 자기 딸과 함께 같은 차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에 당황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예나의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김 의원은 고개를 끄덕여가기 시작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로 가득했던 얼굴에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저기 저 아가씨가, 배우 서예나래?”
“정말? 서예나가 우리 아파트에는 웬일이래?”
“김영범 의원님하고,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늦게 귀가하던 주민뿐 아니라 소란스러움에 집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나온 탓에, 몰려든 주민들은 김영범 의원과 우리 쪽을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밤눈이 밝은 몇은, 예나의 얼굴을 알아보기까지 한 것이다.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청담동 같은 곳에서야 예나의 옷차림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겠지만, 부산 그리고 서민 아파트라 할 수 있는 이 아파트에서는, 예나는 옷차림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했다.
“의원님,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밝은 날 찾아뵙고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여기까지 오셨는데,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집에 올라갔다가 가세요. 집사람이 서예나 배우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시간이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폐가 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서 배우님. 올라가세요. 비싼 차는 아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 배우님이 좋아하신다는 국화차를 올려두고 왔어요.”
김 의원의 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돌아서려는데, 김 의원의 부인 되시는 분까지 내려와서, 잠시 집에 올라갈 것을 권했다.
그런 두 분의 청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김 의원님 내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밤늦게 실례가 많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요. 제가 모시고 싶어서인데요. 한강수 배우님 맞으시죠?”
“예. 어머님. 배우 한강수라고 합니다.”
“제가 한 배우님도 참 좋아해요. 아직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우리 서 배우님하고 같이 출연하셨던 ‘마지막 황후’를 보고, 얼마나 마음이 설렜다고요. 덕분에 이 양반에게 눈치도 많이 받았지만요.”
김영범 의원의 집은 뜻밖에 소박했다.
전생에서 정치를 하면서 살아갈 당시, 동료의원 몇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간 적이 있었다.
정치를 하는 동료의원들 집은 하나같이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김 의원의 집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는, 소박하면서 단아한 분위기를 보였다.
“한강수 배우님은 국화차하고 커피 중에서, 어떤 거로 드릴까요?”
“국화차는 저에게 주시고, 커피는 이 친구에게 주시면 됩니다.”
“예? 국화차는 서예나 배우님이, 즐겨 마신다고 알고 있는 데요?”
“예전 결혼 전까지는 그랬었습니다. 아내가 잠을 깊이 들지 못했었거든요. 그런데 결혼 후에 그 증세가 완전히 사라져서, 요즘은 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김영범 의원의 말처럼, 김 의원 부인이 예나의 열혈 팬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예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예나가 국화차를 즐겨 마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현서하고, 어떻게 같이 오시게 되었어요?”
나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김 의원 부부께 자세히 설명했다.
현서 양이 우리 집에서 지금까지 있다가 오는 길이란 말에, 김 의원 부인의 표정이 사뭇 부럽다는 그런 얼굴이었다.
“아빠, 한 배우님의 롤 모델이 아빠래?”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아! 제 남편이 양산으로 이사를 오자고 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가 의원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요? 제가 왜?”
“이 사람도 언젠가 선거에 출마해서, 정치를 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이미 학부를 졸업했으면서도 다시 정외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고요. 그런데 의원님께서 지역에 천착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부산으로 내려오셨다는 기사를 보고, 거기에 꽂혀서 이 사람도 양산으로 내려오게 된 겁니다. 이 사람 부모님 고향이 양산이어서요.”
“한 배우, 지금 저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내가 그렇다고 하자, 김영범 의원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하긴 자기를 롤 모델로 삼고 있다고 하는데, 그걸 싫어할 정치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아마 김영범 의원의 가슴 속에는, 벌써부터 다음 총선에 대한 구상이 무럭무럭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Top을 달리고 있는, 서예나라는 배우 부부가 자신의 선거를 돕는다는 전제하에서의 선거구상이 말이다.
“한 배우, 정치를 하려면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전 경험도 중요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졸업 후에는, 국회의원 사무실 인턴모집에 지원해서 경험을 쌓아볼 생각입니다.”
국회의원총선거에 출마해서 배지를 달기 위해서, 굳이 인턴에 지원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리고 인턴이라고 해봐야 배울 것도 없고, 소위 보좌진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영범 의원 앞에서, 그런 내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그런 현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정치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것처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인턴으로 들어가 봐야 딱히 배우는 것은 없어요. 차라리 선거에 참여해서 활동해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죠.”
“그렇습니까?”
“한 배우가 출마할 생각이라면서요?”
“예. 그렇습니다.”
“나중에 가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만, 국회 의원회관에서 하는 것이야 법안을 만든다든지 하는 책상머리에 앉아서 할 일이고, 그건 대부분 보좌관 주도로 일을 처리해요. 그 일은 국회의원이 할 일은 아니고요.”
“예.”
“그러니 차라리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당선될 수 있는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선거가 제격이지요.”
말은 분명히 맞는 말이었다.
단지 우리 부부를 선거에 써먹으려는, 사심이 가득 들어가 있는 말이어서 그렇지 말이다.
그리고 그런 김영범 의원의 생각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자 욕심이다.
김 의원이 공천과 당선이 확실한 자신의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온 데는, 김 의원 나름의 욕심과 승부수가 숨어 있다.
부산이란 지역은, 김영범 의원이 소속된 정당으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김영범 의원의 승부수를 발견한 것이다.
당선 가능성이 충분한 자신의 지역구를 내주고 대신 지역에 천착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명분으로, 당 때문에 김 의원에겐 사지라 할 수 있는 부산으로 내려온 김 의원의 승부수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사지인 적의 텃밭에서 처절한 싸움 끝에 생환한 그림!
그 그림의 주인공이 김영범 본인이길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전은 지금까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분위기다.
부산으로 내려온 첫 선거에서는 장렬히 전사도 해봤고 두 번째 도전에서 당선되어 화려하게 부활했으니, 내년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만 한다면, 차기 대권의 유력주자로 주목받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랬기에 나는 어쩌면 김영범 의원의 딸인 현서가, 아니면 아버지인 김영범 의원이 오늘 일을 주도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내가 예나와 결혼해서 양산에 터를 잡았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연예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대부분 알고 있다.
거기에 약간의 관심을 더 하면, 내가 B 대학교의 정치외교학과에 신입생이란 사실도 충분히 알 것이니 말이다.
더구나 김영범 의원의 딸인 현서가, 바로 내가 소속된 학과의 직속선배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 가정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불쾌해 하거나 싫어할 이유가 없다.
그냥 모른 척하면서 김영범 의원에게 이용당해주고, 김 의원의 당선에 일등공신 노릇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이후에 내가 얻어낼 것 또한, 적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오늘 이 만남의 결론이 어떻게 나든지 간에, 또 어떤 이유로 오늘의 이 만남이 시작되었든지 간에, 결코 무의미하거나 헛된 만남은 아니다.
내가 직접 정치 일선에서 배지를 달고 정치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김영범 의원이라는 국회의원이란 존재가 무의미한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정치를 할 것이란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김영범 의원이란 등을 기댈 수 있는 존재는 분명히 필요했다.
김영범 의원 또한 나란 존재의 이용가치를 알 것이고, 또 김 의원 정도의 정치인이 받은 것만큼 되돌려줘야 그 관계가 잘 유지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사람이니, 굳이 그것을 말로 드러낼 이유조차 없는 것이다.
“내년 선거에 제가 참여해도 되겠습니까?”
이 한 마디로, 모든 게임은 끝이 났다.
내년 총선이 아니라 가능한 빨리 김영범 의원의 지역구 사무실을 찾아가, 지역구 당직자들과 얼굴부터 익힐 생각이다.
미리부터 내가 김영범 의원의 지지자란 사실을 드러내야만, 후일 공직선거법 위반이니 어쩌느니 하는 헛소리가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니까.
선거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다가 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김영범 의원과 나 사이에 확실한 대화의 공감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선거에 관해서는 김 의원의 사적인 욕심이 내포된 그런 내용이었지만, 막상 정치에 관한 이야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정치의 일반론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서로가 가진 생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어느새 밤이 이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