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롤 모델(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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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일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그랬어?”
“몰아붙였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 하지만 평소 말을 하기만 하면 끝은 성적인 농담으로 몰아가니, 그게 불쾌하기도 했고 또 진호 말대로 나중에 내 일을 도우겠다고 나섰을 때도 지금처럼 한다면, 100% 문제가 생길 것이 확실하니까 그걸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이었지.”
“그래서 진호가 삐져서 혼자 수업을 받으러 갔고, 자긴 그게 마음 편하지 않아서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갔는데, 그 여학생이 찾아왔다는 거네?”
“응, 그런데 말하는 것을 보니, 계속 내 주변에서 날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럼 자길 스토킹했다는 말이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또 그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이나, 집안을 보니 그럴 이유도 없고.”
“집안이라니?”
스토킹이라고 한다면 스토킹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사생팬의 행동과는 많이 달랐고, 또 그동안 딱히 내가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 것을 두고, 스토킹이니 뭐니 할 수도 없다.
“응, 김영범 의원님의 딸이라고 하네.”
“정말? 그 아가씨가 자기가 매일 이야기하던 국회의원, 그분 딸이란 거야?”
“응, 나한테 밥을 산다고 까불기에 장난을 좀 치려고, 지난번 그 집으로 데리고 갔었거든.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하면서 밥을 먹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이상해서 물었더니만 결국 그 양반 딸이라고 실토하더라고.”
설명하느라 하는데도, 두서가 없다 싶었다.
하지만 예나는 그 친구가 김영범 의원님 딸이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의구심을 지워버린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호기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럼 자긴 그 아가씨와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그 아가씨가 그분의 딸이란 사실을 몰랐단 말이야?”
“아마 우리 학교에서, 그 친구가 의원님 딸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걸?”
“정말 잘 됐다.”
“뭐가?”
“자기가 걸핏하면 김영범 김영범 노랠 불렀잖아. 자기 덕분에 그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져서 나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뵙고 싶어졌거든. 그런데 그분의 딸을 만나게 되었다니까 잘됐다고 하지.”
오해 대신에 기대하게 만든 결과를 만들었으니, 그걸로 예나에게 하는 설명으로는 충분했다.
“우리 후배님,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등하교해요?”
“버스를 타고 다녀도 딱히 불편할 일도 없으니까요.”
“보통 연예인은 회사에서 밴을 제공하고 그러지 않아요?”
“회사에서 내주긴 하죠. 그런데 밴을 끌고 다닐 만큼 아직 제가 유명하지도 않고, 그런 제가 비싼 기름값을 써가면서 밴으로 왔다가 갔다가 할 이유는 없잖아요.”
“헐! 대박! 여기 또 우리 아빠 같은 분이 한 사람 더 있네.”
“아빠 같다니요?”
“우리 아빠도 혼자 다니면서 기름값 낭비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면서,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든요.”
역시 김영범 의원이 소탈한 양반이기도 한 모양이다.
아무리 돈이 없는 정치인이라고 하더라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이른바 권위가 어쩌고 하면서 폼을 내기에 바쁜 것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다.
그리고 국회의원 대부분은, 당선만 되면 대형차를 구매해서 끌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또 항상 조수석에 수행 비서를 태우고 다니면서, 문을 열어줘야만 차에서 내리는 그것을 즐긴다.
물론 2000년대에 접어들어 국회의원 중 일부가, 권위타파니 국회의원으로서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느니 하는 등으로 쇼를 하기도 했고, 또 그렇게 쇼를 하다가 실제 민낯을 들켜서 망신을 자초하기도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대부분 국회의원은, 권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어서 오세요.”
“배우님, 정말 예쁘세요.”
“고마워요. 어서 들어와서 앉으세요.”
예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첫 인사인 ‘예쁘다’는 말이 예나는 지겹지도 않은 것인지, 상대로부터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 예나의 얼굴은 한껏 밝아진다.
김현서라는 이 친구가 도착하자, 예나는 김현서란 친구의 아버지에 관해 또 김현서라는 친구는 예나에 대해, 궁금해 하던 점을 서로 묻고 답하느라 바빴다.
“정말이요? 정말 그 이유로 양산까지 내려오셨다고요?”
“예. 저이가 양산에 신혼집을 마련하자고 한 이유가, 바로 현서 씨 아버님 때문이었어요. 자기도 현서 씨 아버님처럼, 지역에 천착하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하면서요.”
“와~ 그런 이유뿐인데 배우님께서는 그 말에 동의하시고, 이 시골까지 내려오셨다고요?”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도 있잖아요. 남편이 양산에서 살기를 고집하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바늘이 가면 실이 자연스럽게 따라갈 밖에요.”
“우리 아빠가 이 소리를 들으시면, 정말 부러워하시겠다.”
“왜요?”
“부끄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도 그리고 저하고 동생들도 처음에 엄청 반대했었거든요, 솔직히 서울에서 편하게 잘살고 있는데, 부산에 내려가서 살자는데 그걸 쉽게 그러자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솔직히 지금도 전 아빠를 이해하기 힘든데.”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의 생각은, 지금 현서란 이 친구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새끼를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었기에,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또 지금은 그것이 한 단계 더 진화 한 상태다.
한때는 서울 중에서도 사대문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이젠 강북보다는 강남 그것도 대치동이 대한민국과 서울시민들이 마지막까지 돌진해서 탈환해야 할, 마지막 성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
그랬기에 돈 없는 사람들은, 지방과 비교해서 물가도 배 가까이 비싼 서울에서, 햇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반지하 셋방에 살면서도,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란 꿈을 꾸면서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반지하 셋방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가고, 또 지상에 올라가서는 또 몇 평짜리 집이지만 번듯한 내 집을 가지겠다는 꿈을 꾸고, 그러고는 언젠가 나도 강남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란 꿈속에서 산다.
물론 그렇게 꿈꾸는 사람들 90% 이상은, 그 꿈이 절대 이를 수 없는 헛된 꿈이라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면서 말이다.
아무튼 서울로 몰리는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당장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교육체계를 바꾸고, 강제력을 동원해서 기업의 본사를 지방으로 흩어 놓는 것인데, 우리 대한민국이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이니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냥 국민 스스로 지쳐서 나가떨어지길 기다릴 수밖에........
“배우님은 여기 시골에서 살면서 불편하지 않으세요?”
“불편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그런데 다른 분들보다는 덜 해요. 어차피 서울에서 살아도, 다른 사람들 눈 때문에 편하게 돌아다닐 처지는 아니잖아요.”
예나의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서울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예나가 바깥출입을 자유롭게 할 처지가 되지 못하니,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곳이 자유로운 것이다.
아파트 내에서는 마스크나 선글라스를 쓰지 않고 민얼굴로 돌아다닌다고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사생팬이라는 존재가 없기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만 꼬박꼬박 하면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이따금 마트에 나가 장을 볼 때도, 사람들은 ‘설마’하는 생각에 눈길을 줄지언정 예나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어서, 서울에서 살 때보다는 대중들 시선에서 한결 자유롭다.
“그런데 앞으론 말씀 편하게 하세요. 배우님께서 자꾸 현서 씨, 현서 씨 이러시니까 불편해서요.”
“알았어. 그럼 현서도, 앞으로는 언니라고 불러.”
“정말 제가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 뭐라고 부르려고? 내가 ‘현서야’ 이러는데, 네가 ‘배우님’ 이러면 그걸 듣는 사람들이 나를 엄청 나쁘게 볼 거잖아. 내 스태프도 아닌데.”
“그럼 한 배우님은 어떻게 해요?”
“그거야 현서 네가 알아서 해야지. 후배이니까 빡세게 굴리든지 말든지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아무튼 둘은 죽이 맞아서 킥킥거리기도 했고, 또 서로 손뼉을 마주치면서 즐거워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10시가 넘었는데 집으로 돌려보내야지?”
“벌써?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되었어?”
“둘이 신선놀음을 하고 있으니 도끼 썩는 줄도 모르지. 상호 오라고 했으니 현서 씨는 가방 챙겨요.”
“자기야, 상호 쉬라고 하고 우리 둘이 같이 다녀오자.”
“왜?”
“나도 오랜만에 바깥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그럼 난 아파트 입구에 차 세우고 기다릴 테니까, 당신도 간단하게 챙기고 같이 내려와.”
아직 끝나지 않은 수다가 아쉬워서인지 예나가 같이 나가자고 했고, 나는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를 빼서 아파트 정문으로 향했다.
“집이 어디쯤이에요?”
“초읍동이요.”
“그렇구나. 난 의원님이 어릴 때 살았다던, 전포동인 줄 알았더니만.”
“어차피 그쪽에 사시는 분들은, 아빠를 찍어주실 거잖아요.”
하긴 그것도 나름 현명한 전략일 수 있겠다 싶었다.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이야 표를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만큼 출신지역이나 출신학교 등의 연고를 따지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김 의원이 태어나고 자란 전포동 주민들이야, 김영범 의원이 자기 동네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찍어줄 것이니,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서는 삶의 근거지를 지역구 내의 다른 동네로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 동네에서는 또 그곳에 김영범 의원이 살고 있으니, 김영범 의원을 자기네 동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김 의원에게 표를 찍어줄 것이니 말이다.
예나가 외출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던 덕분에, 우리가 현서 양이 사는 초읍동에 도착한 것은 거의 11시 반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늦은 것 아니에요?”
“괜찮아요. 들어가서 아빠에게 잘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현서 양이 산다는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우고 내리게 한 후 문을 닫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빠!”
현서 양의 목소리에 놀, 나는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 다가온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김현서 양의 아버지이자 정치인으로의 내 롤 모델이신 김영범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자넨 누구기에 이 밤중에 얘를 태우고 다니나?”
“아빠, 그게 아니고.......”
“현서가 넌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아빠! 그게 아니라니까!”
뭔가 단단히 오해하신 모양이다.
하긴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과년한 딸이 제법 비싸 보이는 외제 차에서 내렸고, 딸을 태워준 그 놈이 또래가 아닌 늙다리였으니,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