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김 선배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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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 참석한 기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남은 강의가 둘이나 더 있으니, 집으로 가는 것도 마땅치 않아 백수처럼 두어 시간 빈둥거릴 곳을 찾아야 했다.
보통 신입생이라면 지금처럼 갑자기 강의가 비게 되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학교 앞 커피숍에서 시간을 때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는 그것도 쉽지 않았다.
배우 한강수는 별 볼일 없지만 국민여배우 서예나의 남편으로 얼굴이 알려졌고, 특히 우리 대학의 학생들 가운데서는 이미 내 얼굴을 모르는 학생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인 곳 어디든, 내가 다른 사람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낼 곳은 없었다.
“혹시 한강수 배우님 아니세요?”
“예. 안녕하세요.”
“왜 이런 곳에 혼자 계세요?”
“수업이 비어서요.”
“그러시구나. 혹시 사진 하나만 같이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사회대에서 좀 많이 떨어진 후문 쪽 도로 가까이에 있는,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곳의 햇볕 잘 드는 벤치에 벌렁 드러누워 있는데, 갑자기 한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아무리 내 휴식을 방해받았다고 하더라도 화를 낼 수도 또 사진을 찍자는 것을 거절할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나는 웃는 얼굴로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다시 벤치에 벌렁 드러누웠다.
“배우님, 이거 드실래요?”
“예?”
다시 목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전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던 그 여학생이었다.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전 정외과 3학년 김현서라고 해요.”
“아! 선배님이셨네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아뇨. 어차피 배우님이 제 얼굴을 처음 보잖아요. 신입생 환영 OT 때밖에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저야 도망을 온 것 비슷하지만요.”
“아까 노천카페에서부터 한 배우님 따라 왔었어요. 어딜 가시나 해서요.”
“예?”
“아! 절대 이상하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배우가 정외과에 입학하셨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또 한 배우님 정도라면 굳이 대학에 입학해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거든요.”
엉뚱하게 호기심이 많은 아가씨였다.
그리고 이런 호기심이야 나를 아는 학생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또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질문을 해올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정치를 공부해서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에서 정외과를 지원했습니다. 제가 전공했던 연극영화는 정치와는 전혀 무관한 과여서요.”
“그럼 대학을 벌써 졸업하시고, 우리학교가 두 번째란 말씀이세요?”
“제가 연기자로 입문이 늦은 이유이기도 하지요. 대학 졸업 후에 본격적으로 연기자 생활을 해보자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많이 늦게 시작했거든요.”
나는 이 친구와 한 이야기가, 최소한 정치외교학과 더 나아가서 사회대학 전체에 퍼지길 기대하면서, 차분히 내 생각을 이야기 했다.
이렇게라도 소문이 퍼지면 나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이라도 빨리 줄어들 것이고, 그렇다면 나를 힐끗거리거나 이렇게 찾아와서 힐끗거리거나 물어보는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테니까.
“그럼 정말 정치를 하려고, 우리 과에 입학한 거예요?”
“예. 배우로 인기를 얻어서 지명도가 좀 생기면, 직접 출마해서 정치할 생각입니다. 정치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정치판에 나서봐야 딴따라 소리나 들을 거여서요.”
“그러셨구나.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요.”
“예?”
“앞으로 1년 이상을 한 학교에서, 또 같은 업계에서 지낼 가능성이 많은 사이잖아요.”
“그럼 선배님도 정치를 하실 생각으로?”
“그 생각이 아니라면 정외과 지원할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차라리 우아하게 선생님 노릇이나 할 수 있는, 국문과나 영문과 같은 곳에 지원했겠죠.”
“이런 경쟁자가 한 분 더 생겼네요.”
“경쟁자는 아니죠. 한 배우님은 배지를 꿈꾸는 사람이고, 난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만드는 역할을 할 스태프를 꿈꾸고 있으니까요.”
“아, 그러셨구나. 벌써 진로를 결정하신 모양이네요.”
“어차피 정치판에서 여자가 배지 달기란 쉽지 않잖아요. 여성배려니 뭐니 하는 곳에 기대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것도 체질에 맞지도 않고.”
생긴 모습과 달리 제법 당찬 구석이 있는 아가씨였다.
생긴 모습은 여리하게 생겨서 그냥 여대생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의 아가씨인데,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미 자기가 갈 길을 확실히 정해놓고, 자신이 갈 길을 준비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던 것이다.
“가요.”
“예?”
“이렇게 멋진 후배님을 만난 기념으로 제가 점심 살게요. 그동안 옆에서 보니 진호 걔 말고는 어울리는 친구도 없던데, 오늘은 진호 걔가 없으니 점심을 혼자 먹을 거잖아요.”
진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이 친구가 그동안 내 주변을 제법 오랫동안 맴돌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아예 뿌리를 뽑을 생각으로 점심을 먹자고 하는 것이다.
이 친구 말처럼 오늘은 혼자 점심을 먹어야 할 처지가 되었기에, 나는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 집은 비싼데......”
“점심 사신다면서요?”
“난 구내식당에서 산다는 얘기였거든요. 여기서 점심 먹으면 내 한 달 용돈이 달랑달랑 하는데.”
“그럼 어쩌죠? 전 여기 아니면 밥을 먹지 않는데요.”
“치! 진호랑은 구내식당에서 잘만 먹더니만.”
“오늘은 선배님이 사신다고 하셨으니까, 제대로 먹어야죠. 이왕 얻어먹을 거라면 분위기도 괜찮고 맛도 있는 곳에서 얻어먹어야지, 겨우 4,000원짜리 학식으로 배 채울까요?”
“치! 알았어요.”
뾰로통한 입모습이 귀여웠다.
사실 지금 내가 들어가려는 레스토랑은, 대학 앞에 있기는 하지만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것이 아닌, 분위기를 찾는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이다.
덕분에 이 음식점의 가장 싼 메뉴라고 할지라도, 용돈을 받아 생활하는 대학생이 감당하기엔 벅찬 금액인 것 또한 사실이다.
“배우님,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딱히 자주 올 이유는 없잖아요. 어차피 저도 이 동네선 학생일 뿐인 걸요.”
“그래도 이따금은 오세요. 서비스 잘 해드릴 테니까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니저가 다가와 반겼다.
이 레스토랑의 매니저뿐 아니라 사장님은, 내가 와서 가게의 매출을 올려주는 것보다는 배우 한강수가 이따금 찾는 곳이라는 그것 때문에 나를 반기는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따금은 와인을 서비스로 내놓곤 했다.
“여기 자주 오시나 보네요?”
“손님들이 찾아오면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요. 그렇다고 집으로 초대할 수도 없고요.”
서울에서 나나 예나의 손님이 이따금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이라면 아예 집으로 오라고 하면 간단한 일인데, 그 정도까지는 안 되는 손님이 양산까지 내려오려고 하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가까운 이 집에서 만나곤 했던 것이다.
“하~아~”
“왜 갑자기 한숨을 쉬세요?”
“설마 스테이크를 드실 건 아니죠?”
“이집 스테이크가 맛있습니다. 거기에다 와인을 추가하면 끝내주거든요.”
“와인까지요?”
놀리는 것이 제법 재미가 있는 아가씨였다.
내가 와인까지 마실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현서란 선배 아가씨의 얼굴이 누렇게 뜬 것 같은 느낌이다.
“어차피 카드 가지고 계시잖아요? 우리 속담에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했는데, 시원하게 긁고 나중일은 나중에 생각하시면 되잖아요.”
“하~아. 우리 한 배우님, 알바생의 고충을 너무 모르신다. 여기 밥값이면 알바를 몇 시간이나 해야 하는지 모르죠?”
아르바이트생의 시급을 생각하면서 밥을 먹으려면, 내가 그 입장이라도 여기서 먹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주인을 잘 만나면 덜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온종일 일하는 것 말고도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일해야 하고, 험한 소리도 듣기도 하는 것은 물로, 심지어 별 희한한 핑계로 임금까지 떼이기도 하는 것이 알바생의 애환이니까.
물론 내 앞에 앉아 있는 현서 이 친구는, 워낙 당찬 면이 있으니 임금을 떼이는 일이야 없겠지만.......
“걱정 말고 드세요. 설마 용돈 타서 쓰는 선배님에게, 밥값을 뒤집어씌울까 봐요.”
“예? 점심은 내가 산다고 했잖아요.”
“그 점심은 나중에 학식으로 대신하고요.”
“정말? 그럼 나중에 구내식당에서 내가 사주면 되죠? 오늘 여기서 먹는 것은 우리 후배님께서 계산하고?”
“예.”
“아~싸! 그럼 후배님 덕분에 우아하게 칼질을 해볼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밥값 걱정에 잔뜩 고민스러워하던 표정은 어딜 간 것인지, 내 한 마디에 풋풋한 20대 초반의 아가씨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와~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네요. 한 배우님도 빨리 드셔보세요.”
밥값 걱정이 사라지자, 이 아가씨의 텐션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정말 자신의 말처럼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자르고, 또 와인을 한 모금씩 머금어가면서 귀엽다고 할 정도로 오물거리면서 스테이크를 씹어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이런 분위기에서의 식사가 절대 처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런데 한 배우님은 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양산까지 내려와 우리 학교에 온 거예요?”
“제 부모님 고향이 양산이셨거든요. 그리고 제가 출마를 하려면 지역 연고가 있어야 하니까, 미리부터 제가 양산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야지요. 그러니 양산에 살면서 학교를 다녀야하니, 우리 학교에 입학 할 수밖에요.”
“사모님은 반대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서예나 배우가 양산 시골에서 살려면 많이 답답하실 텐데요.”
“제가 선생님도 아닌데 웬 사모님? 그리고 집사람은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화려하거나, 사람들 틈에서 부대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양산에서 사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거든요.”
사람을 만나면서 항상 느끼고 경험하는 일이지만, 사람들은 나나 우리 부부에 대한 호기심은 많이 가지지만 내가 호기심을 채울 기회를 별로 주지 않는다.
그런데 김현서란 이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이성으로서가 아닌 또 다른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친구의 억양이 경상도 특유의 억양이 아닌, 수도권에서 사는 사람의 억양이 배어 있는 것이 내 호기심을 더하게 만들고 있었다.
김현서란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이 친구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내가 배우라는 신분이 아닌 그냥 보통의 대학 신입생이었더라면, 내가 결혼한 아저씨가 아닌 김현서라는 이 친구와 또래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