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도시의 하이에나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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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배우님, 어서 오세요.”
“수고 많으십니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들르는 소속사다.
물론 배우란 직업이 일반 직장인처럼 회사에 출퇴근할 이유도 없고, 담당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 말고는 특별히 친해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 모두는, 회사에 소속된 아티스트의 원만한 활동을 돕기 위해 존재함은 물론, 저들의 능력 또는 능력에 따라 소속 아티스트의 활동범위나 이미지가 달라질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가능한 한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함이 현명하다.
나는 진수와 함께 커피숍에서 사가지고 온 커피를 직원들에게 하나씩 돌리고, 홍보팀장님과 마주 앉았다.
“이야기가 잘되셨다면서요. 축하합니다.”
“팀장님 덕분이죠.”
“무슨 그런 말씀을요. 저야 중간에서 전해드린 것밖에 없는 걸요. 그런데 오늘 그 자리에 김화란 대표님도 나오셨다면서요.”
“예. 아시는 분입니까?”
“제가 그런 분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알겠습니까. 이른바 로열패밀리이신 걸요.”
“로열패밀리라고요?”
“모르고 계셨습니까? 김화란 대표님이 화진그룹 김홍수 회장님의 따님이지 않습니까.”
홍보팀장님 말씀을 듣고서야 황우 감독님과 제작팀장이란 양반이, 김화란 대표를 대하던 태도가 이해되었다.
아무리 투자사 대표라고 하더라도 황우 감독님 정도의 급이 되는 감독은, 투자사 대표에게 그렇게 굽실거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흥행이 보장된 감독이야 자기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투자사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하는 법이니까.
제작팀장이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황우 감독님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고 계셨었기에, 나로서는 황우 감독님의 그런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야 ‘도시의 하이에나’에 출연해서 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만으로, 내가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말이다.
“한 배우님.”
“예. 팀장님.”
“혹시 김화란 대표께서 개인적으로 연락하게 되면, 가능한 한 그 자리는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예?”
“제가 더는 드릴 수 있는 말이 없고, 아무튼 개인적으로 연락하셔서 따로 만나자고 하시면,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두 분이서 만나시진 마시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확실한 것이 아니어서, 저로서는 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더니 홍보팀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보팀장님 말에 진수와 나는 방금 홍보팀장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 이야기가 무슨 뜻이야?”
“매니저인 너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어떻게 할 거야. 바로 내려갈 생각이야?”
“오늘은 바로 가야지. 어차피 두 주 후에는 올라와서 지내야 하니까.”
나를 캐스팅한 것이 거의 막차였기에, 영화 크랭크인이 벌써 다음 달로 잡혀 있었다.
그 말은 결국 기말고사 기간에도 촬영해야 한다는 뜻이기에, 우선 부산으로 내려가 교수님의 의견을 구해야 했다.
“됐어. 그냥 여기서 헤어져.”
고속도로 입구까지 따라오겠다는 진수를, 회사 입구에서 떼어냈다.
만약 상호를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나를 태워다주겠다면서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올 인간이 바로 진수다.
“오디션은 잘 봤어?”
“오디션이라기보다는 면접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맞는 말이겠더니만.”
“그게 무슨 말이야?”
양산 집에 도착하니 예나가 면접 결과에 관해서 궁금해 했다.
나는 황우 감독님과 김화란 대표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자, 예나가 조금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김화란 대표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도 있어?”
“화진 그룹 회장 딸인 것 말이야?”
“그건 홍보팀장님에게 들었고, 그런데 홍보팀장님이 조금 이상한 말을 하시던데.”
“뭐라고?”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면,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절대 나가지 말라고.”
솔직히 홍보팀장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예나의 표정을 보니, 예나 또한 내가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괜한 오래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갔다.
“그런 소문이 있긴 해.”
“무슨 소문?”
“김 대표 그 사람이, 자기가 투자하는 주연배우와 잠자리를 가진다는 소문.”
“뭐?”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아직 확인된 것은 없어”
“아무리 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투자사 대표가 주연배우와 그런다는 것은......”
“뭐 특별한 일은 아니잖아. 여자 배우에게 돈 많은 남자가 스폰서 노릇을 해주는 것처럼, 남자 배우에게도 그런 여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잖아.”
“그럼 김화란 대표도, 남자배우하고 잠자리를 가지고 그 대가로 스폰서 노릇을 한다는 뜻이네?”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뿐이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 말조심해야 해.”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이 있다.
그리고 예나나 홍보팀장님이 대충 소문을 들었을 정도면, 그 소문이 아예 근거조차 없는 그런 소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홍보팀장님 이야기대로 만약 김화란 대표가 개인적인 일로 전화를 하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둘이 만나는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말고사 기간에,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고?”
“예. 아직 확실한 일정은 나오지 않았는데, 감독님 말로는 다음 달 중에는 크랭크인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말고사 기간을, 피하긴 힘이 들 것 같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나?”
“방법이 있겠습니까?”
“학과장님하고 학장님께 보고는 해야 하겠지만, 이미 앞에 말씀하신 것도 있으시니, 내가 담당 교수님들하고 의논해서, 자네에게 과제를 내주고 그 과제를 기말고사 전까지 제출하는 것은 할 수 있겠나?”
“그렇게도 가능합니까? 혹시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특혜시비가 일어나진 않겠습니까?”
나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셨다.
물론 지도교수님 말씀으로는 최대 B 학점 정도라고 하셨지만, 아예 시험을 치지 못해서 F를 받는 것도 아니니, 나로서는 만세를 부를 일이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내용은, 학과목 담당 교수님들과 학과장님 그리고 단대 학장님까지 동의하셨기에, 나는 각 학과 담당 교수님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리고 리포터 주제를 받아 왔다.
“갑자기 집에까지 와서, 무슨 공부를 해?”
“공부가 아니라 리포터.”
“대학에서도 숙제를 그렇게 많이 내줘?”
“평소라면 많지 않겠지만, 이번 기말고사를 칠 수 없을 것 같아서 기말고사 대신에 리포터로 대체하는 거야.”
“시험 대신에 숙제를 한다고? 그렇게도 해?”
예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연기자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서 대학 입학을 포기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이렇게, 기말고사를 리포터로 대체한다는 사실이 신기한 모양이다.
“형, 눈이 벌게요. 어젯밤에도 형수님하고?”
“진호야. 까불래?”
“에이~ 유부남이 그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라고요.”
“진호야, 나 오늘 새벽까지 리포터 했었거든.”
“형하고 나하고 같은 과목을 듣는데, 리포터가 어디 있어요?”
새벽까지 과제물을 정리하느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더니, 눈이 발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본 진호가, 또 쓸데없는 소릴 늘어놓으면서 까불기 시작했다.
그런데 밤새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신경이 예민해진 탓도 있겠지만, 오늘따라 진호의 저런 말과 행동이 거슬린다.
그리고 만약 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서 진호를 내 보좌진으로 데리고 있으려면, 진호가 보이는 지금 저런 식의 말과 행동은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시간에 수업 없지?”
“당연하잖아요. 형하고 내가 수강 신청한 것이 똑같잖아요.”
“그럼 우리 커피나 마시러 가자.”
그렇게 진호를 데리고, 구 도서관 옆 자연대 앞에 있는 노천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셔.”
“예. 형. 잘 마실게요.”
“진호 너, XXX 변호사라고 알지? 예전에 CCC당 국회의원 했던 사람.”
“그 사람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있기나 해요. 완전 관종 저리가라인데.”
“그 사람이 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고 생각해?”
내가 입당해서 정치를 하려고 한 정당은 아니지만, 진호에게 지금 내가 충고하고자 하는 말을 가장 쉽게 인식시킬 수 있는 건수를 찾다가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사건이 바로 XXX 변호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 사람이 낙선한 이유는 결국 지역구 주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결과고, 그만큼 지역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야?”
“‘너 고소!’ 그거잖아요. 그걸로 광고도 만들었다고 하던데.”
진호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상상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사건이 기억에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진호의 기억에 없다는 뜻은, 그만큼 진호가 그런 문제에 관해 무덤덤해 할 정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여자가 아나운서를 하려면, 다 줘야 한다는 말 알아?”
“당연히 알죠. 그 아저씨가 한 말이잖아요.”
“그 말에 대한, 네 생각은 어때?”
“제 생각이 맞고 틀리고 할 것도 없잖아요.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소문도 많다고 하던 데요.”
“물론 그런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난 그 소문에 대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변호사란 그 양반이 그런 말을 한 것에 대한, 네 생각을 묻는 거야.”
“그 일에 제 생각이 뭐가 중요해요. 그냥 그 아저씨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고, 그걸 가지고 난리를 치는 여자들이 문제죠. 지네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산다면, 괜히 입에 게거품 물고 난리 칠 일도 없잖아요.”
정말 머리 아프게 만드는 생각이었다.
만약 진호가 지금 가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절대 진호는 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괜히 옆에 데리고 있다가, 내가 똥물을 뒤집어쓸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과연 지금 내가, 진호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 해줘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다.
진호 개인을 위해서는 분명 해줘야 할 말이지만, 만약 내가 하는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오해를 하게 되면, 그로 인해서 진호와 나 사이 관계가 서먹해질 것은 불문가지니 말이다.
그리고 과연 내가 진호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그것 또한 의심스러웠고.......
“진호야. 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
“예. 무슨 말을 하시려고, 갑자기 무게를 잡고 그러세요. 사람 겁나게.”
“나도 정치를 직접 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호 너도 정치에 꿈이 있다고 하니까,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결국 나는 진호에게, 내 속에 들어 있는 말을 해주기로 했다.
설령 진호와 나 사이의 관계가 틀어져서, 앞으로 학교에서 지내는 내내 서로 소 닭 보듯 할 수도 있겠지만, 진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야기 해주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