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새로운 인연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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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라~라~라~’
기자회견장으로 마련된 교수식당으로 들어가니, 번쩍거리는 카메라 플래시와 함께 셔터 소리가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한강수 배우의 입장 발표가 있겠습니다.]
예담기획의 홍보팀에서 만들어 보내준 입장 발표문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첨삭해서 다시 홍보팀의 컨펌을 받은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기자 여러분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저를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과 이번 일로 인하여 저에게 인간적으로 실망을 느끼신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는 사과 말씀을 올립니다.”
그렇게 내가 이번 사안에 관련된 소회를 담은 글을 모두 읽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또다시 장내에는 카메라 플래시 불빛과 셔터 소리로 가득했고, 잠시 소란이 진정되자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번 사건에 대하여 궁금하신 점이 있으신 기자님께서는, 손을 들고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Y 뉴스의 김석대 기잡니다. 우선 그동안 오해로 인해 심정적으로 아주 어려우셨을, 한강수 배우님께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한강수 배우님께서는 왜 본인이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동안 침묵을 지키셨는지 그 점이 궁금합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가해자의 여자 친구라고 알려진 오늘 기자회견을 하신 그 선생님은, 제 여동생이 재학하고 있는 학교의 선생님이십니다. 저야 앞으로도 제 행동이나 의지에 무관하게 이런저런 풍문과 풍파에 시달릴 수 있는 연예인이니, 어제 사건은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생각하면서 당분간 자숙하고 지내면 언젠가 오해가 풀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어제 그 일이 공개되면, 그분의 인생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저야 잠시 비난을 받는 것에서 끝이 날 수 있는 사안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생각에 침묵했을 뿐입니다.”
[M 본부의 사공신 기잡니다. 한강수 배우님 말대로 한강수 배우님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단지 가해자인 여자 친구란 분을 위해서 침묵을 지키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직접적인 폭행을 당하셨는데 폭행죄까지 묻지 않았다는 것은,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어서 그러신 것 아닌가요?]
“우선 카메라를, 제 왼쪽 얼굴로 가까이 대 주시겠습니까?”
나는 사공신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말 대신에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그래서 방송용 카메라로 내 왼쪽 얼굴을 클로즈업해주길 부탁했고,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진수에게 물휴지를 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제 빗맞았던 왼쪽 얼굴 턱 쪽의 화장을 물휴지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제가 알기로 어제 폭행 장면이 찍힌 동영상이, 이미 공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해자인 그 사람에게 맞았다는 부분이, 바로 지금 제 손으로 화장을 지운 이 부분이라는 사실은 기자님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
“멀리 계셔서 화장으로 상처 부위를 가린 것인지 아닌지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는 분은, 이 앞으로 나오셔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
“여러분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셨던 것처럼,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것은 제가 이 턱밑 부분을 맞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제가 어릴 때부터 태권도 검도를 비롯한 무술을 배우고 자란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는 운동신경이 조금 좋은 편입니다. 물론 그분의 주먹이 살짝 스치기는 했었지만, 그 당시에도 피부 색깔조차 변하지 않았을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가격을 당하신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예. 그 말씀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긁힌 상처의 수준조차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오해에서 비롯되어 벌어진 사건으로 고소까지 해서, 그 사람의 앞으로 인생에 지장을 주는 것이 과연 옳은 행동일까요? 더구나 그 사람은 저와 비슷한 또래의,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훨씬 많이 남은 청년인데 말입니다.”
어젯밤 경찰서에서 고소하지 않기로 하면서, 이런 의문이 제기될 것이란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한강수 배우님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사회 통념상 폭행을 당한 쪽에서는 감정 때문에라도 일단 고소를 하는 것이 우선 아닙니까? 정말 방금 말씀하신 것 이외에는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인가요?]
“기자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제가 하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숨기거나 더한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제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제가 기자님께 많지는 않지만 제 전 재산을 드리죠. 그리고 연예계에서 완전하게 은퇴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기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까지 나를 물어뜯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M 본부의 사공신 기자뿐 아니라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 기자들 또한, 마음 한구석에는 사공신 기자처럼 자기들이 모르는 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어젯밤 일이 저와는 무관한 사실이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혀주신 그 선생님과는, 어제 오후 제가 여동생을 잠시 만나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게 되면서 알게 된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비롯한 다수의 선생님들이 제가 배우라는 사실을 아시게 되어, 퇴근한 후에 따로 커피 한잔을 대접했던 것이 전부였고요.”
[........]
“그럼에도 제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너무 부풀려서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저야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연예인이니, 아주 사소한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무겁게 물을 수가 있고 저 또한 달게 받아야 하겠지만,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수 있는 오해로 인한 사건을 가지고, 아무 죄 없는 교육자가 스스로 천직인 교직을 내려놓게 되고, 한 젊은 청년이 무슨 살인마나 되는 양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일은, 더는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자들이 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슨 뜻인지 아는 기자도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쓴 기사에 대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누군가 책임질 사람도 없는데 남자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는 이유 하나로, 박 선생님이란 그 여선생님은 스스로 학교에 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주먹을 날렸던 그 친구 또한 박 선생님이라는 그 양반의 기자회견 내용이 기사화된 후, 세상에서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로 매도되고 있기에 그런 사실이 안타까웠다.
물론 그 친구가 전 여자 친구에게 집착해서 스토킹한 행위에 대해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나와 관련해서는 억울한 점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기자가 속한 언론사에서 쏟아낸 기사들에도, 분명 그 두 사람을 지금 상황으로 몰아간 범인이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기자회견을 한 이유 중에서는 내가 받고 있는 오해를 풀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잘못이 전혀 없거나 또 그렇게까지 여론의 뭇매를 맞을 만큼의 잘못도 아닌데도, 대중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는 그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배우 한강수, 어젯밤 폭력사태에 관한 진상은 이랬다.]
[한강수 배우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배우 한강수, 사건과 전혀 무관한 선생님의 교직사퇴에 참담한 심경]
[한강수 배우, 이미 발표한 사안 이외에 숨겨진 사실이 있다면 연예계 은퇴할 것!]
[배우 한강수, 가해자에 대한 마녀사냥 더는 안 돼!]
기자 회견이 끝나자, 기자들은 또다시 기계가 제품을 찍어내는 것처럼 비슷한 내용으로 기사를 찍어내기 시작했고, 덕분에 한강수란 이름이 또다시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쏟아진 기사 중에는, 아직도 이번 사건 배후에 숨겨진 무엇이 있지나 않을까 상상하게 만드는 기사가 있기도 했고, 또 은근히 나를 까는 내용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기사야 어떻게 써 갈겨 놨든지, 네티즌들의 댓글에는 나에 관한 호의를 보이는 댓글이 대부분이었고, 나를 까는 내용은 다른 네티즌들에 의해 집중포화를 받는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예. 감독님.”
“지금 통화가 가능한가?”
“감독님 전화인데 언제든 통화가 가능해야지요.”
“아무튼 기자회견 잘 봤네. 한 배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동안 솔직히 긴가민가하고 있었다네. 미안하네.”
“감독님으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실 만하죠. 크랭크인에 들어가기도 전에 배우가 구설에 올랐는데, 그걸 걱정하지 않을 감독님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게 이해해주니 고맙구먼. 서울엔 언제쯤 올라올 생각인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영화촬영 때문이라면 출석을 리포터로 대체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계절학기로 학점 이수가 가능한 것도 있으니까요.”
“알겠네. 조감독하고 일정을 짜보고 다시 연락함세.”
황우 감독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이번 사건이 발생하고 가장 노심초사하면서 걱정했던 사람 중의 한 분이, 바로 황우 감독님이셨을 것이다.
“황우 감독님이셔?”
“응. 조만간 일정을 조율해서 연락하겠다고 하시네.”
“황 감독님도 이번에 식겁하셨을 거다.”
“아무래도 그러셨겠지.”
“그런데 박미희 선생님 말이야.”
“응, 그 선생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라고 해? 혹시 들은 것이라도 있어?”
“아니, 내가 그런 걸 물어볼 정도는 아니잖아. 그런데 그 선생님이 네 팬 카페를 운영하고 있더라.”
“팬 카페? 내가 팬 카페를 운영할 정도의 배우도 아닌데?”
“이미 회원이 2,000명 가까이 되던데?”
“정말?”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들었다.
정말 민주 말대로, 박 선생님이 내 팬이라는 것은 확실한 모양이다.
그런데 아직 신인 티를 벗지도 못한 나에게, 2,000명 가까운 팬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박 선생님이 기자회견을 하신다고 회사로 연락하셨고, 나는 서울로 올라가다가 그 전화를 받고 내려왔잖아. 그러면서 입을 맞추기 위해서 통화하다가 알게 된 내용이야.”
“그럼 박 선생님 휴대전화 번호를 가지고 있어?”
“당연하지.”
나 때문에 그동안 다니던 학교에 사표까지 써냈다는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다른 직장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학교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쉽게 그만둘 결심을 하기 어려운, 요즘과 같은 불경기에는 더욱더 어려운 아주 괜찮은 직업이다.
그런데 여자의 직업으로서는 손꼽힐 정도로 좋은 직업을 나 때문에 그만뒀다고 하니, 속이 편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