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새로운 인연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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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 라면을 끓이는 일은 내 차지였다.
“우린 라면 하나씩이면 충분해.”
“나도 먹을 건데?”
“새벽에 라면 먹으면, 얼굴 붓는다는 거 몰라?”
“치! 아직 크랭크인 들어가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무슨 걱정이야.”
주방에는 이미 라면 세 개가 뜯어져 있었고, 평소 내가 라면을 끓일 때처럼 파가 듬뿍 들어간 물이 팔팔 끓고 있었다.
“역시 라면은 강수 네가 끓여야 해.”
“맞죠. 이제 강수 씨가 끓인 라면이 아니면, 다른 라면은 맛이 없어서 못 먹어요.”
두 사람이서 죽이 척척 맞았다.
하긴 이런 반응 때문에, 나는 내 주변 사람들과 라면을 먹을 일이 생기면, 항상 내가 알아서 라면 담당을 자처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의 그런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뭐라고 하셨어?”
“당분간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잖아.”
“실제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꼭 그렇게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어야 하는 거야?”
“우리가 배우잖아. 연예인이 네티즌하고 싸워서 얻을 것이 뭐가 있어. 그렇게 싸워서 설령 이긴다고 하더라도 기껏 나오는 소리라는 것이, 이리저리 인맥을 동원해서 네티즌을 통제한다는 소리나 듣지.”
연예인이어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이 있는 만큼, 지금 경우처럼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대중들의 뭇매를 맞으면서 억울해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은, 사실이 아닌 것을 부풀리기까지 해서 악의적인 여론왜곡을 주도한 사람들을 강력하게 응징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봐야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차라리 이 일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대중들의 분노가 수그러들고 난 후에, 그때 내 억울함을 넌지시 표명하면서 내게 씌워진 나쁜 이미지를 세탁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
“됐어. 신혼부부 깨 볶는 걸 보면서 속 쓰려 하는 것보다는, 혼자 자는 것이 훨씬 정신건강에 이롭다.”
라면에 밥까지 말아 먹는 것으로, 우리 세 사람의 야참이 끝이 났다.
그렇게 라면과 밥으로 빈속을 채운 후, 후식으로 커피까지 마시자 진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뿐 아니라 예나까지도 집에서 그냥 자고 내일 출발하라고 했지만, 진수는 신혼집에서 자는 것이 부담된다는 핑계로 기어코 집을 나섰고, 나는 진수에게 상호가 지내는 원룸을 알려주면서 그리로 가라고 했다.
“진수 씨는 바로 서울 올라가겠다고 해?”
“아니, 상호 집에 가서 자고 가라고 했어.”
“진수 씨를 보면, 자기가 정말 복 받은 남자란 생각이 들어.”
“당신 때문에도 마찬가지지.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착한 여자가 내 마누라라니.”
“치! 입에 침은 바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이 아닌데 왜 침까지 발라? 내 유일한 사랑인데.”
“암튼 말은 잘해.”
“말만? 밤에는 못한다는 말이네?”
“치! 그런 말 아니잖아. 매일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이따금 혼자 있을 때 자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이상해진단 말이야.”
“그럼 오늘 밤에도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만들어 볼까?”
“싫어!”
“왜?”
“매일 놀리기만 하고. 내가 밝히는 것이 그렇게 싫어?”
“인마, 싫은데 이러겠어? 당신이 그걸 좋아하니까 나도 얼마나 좋은데.”
결국 오늘도 새벽부터 뼈와 살을 태우는, 뜨거운 밤을 만들게 되었다.
남자가 옆에 다가가기만 해도 몸이 굳어버릴 정도의 예나였는데, 요즘 내 눈에 비치는 보이는 예나의 모습은 정말 믿기 힘들 정도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내가 예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이 들 정도로 말이다.
“자기 벌써 일어났어? 일어났거든 날 깨우지.”
“피곤하지 않아?”
“아침엔 괜찮지. 낮이 되면 피곤해지지만. 그런데 자기 어제 만났던 여자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있었어?”
“그건 또 웬 뜬금없는 소리야?”
“자기가 어젯밤에는 훨씬 더 짐승이었거든. 보통 그러잖아.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와이프에게 평소보다 잘한다고.”
“어디서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듣고 와서는....... 누가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해?”
“언니가.”
“김 실장님이?”
“응.”
“자기는 결혼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튼 결혼조차 하지 않은 양반이, 별 희한한 것을 다 가르치는 모양이다.
아무튼 신혼부부가 집에서 할 짓이라고는 뻔했기에, 우리는 어젯밤의 여운을 떨치지 못하고 이야기 도중 다시 침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잘 다녀와. 사랑해~ 쪼~옥!”
예나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는 집을 나섰다.
사실 오늘 학교에 가봐야, 어젯밤의 일 때문에 또 다른 학생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될 것이 뻔했기에 하루라도 쉴까 생각하다가, 오히려 그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등교하기로 한 것이다.
“형,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기사에 나온 그대로야.”
“그냥 맞기만 했는데, 왜 고소를 하지 않아요. 그런 놈은 바로 감옥에 보내야죠.”
“그 남자의 여자 친구가, 내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이야. 그리고 살짝 빚 맞아서 다친 것도 아니고.”
사실 ‘설마?’ 하는 생각에 방심하고 순간적으로 맞긴 했지만, 평소 운동신경이 어디 도망가진 않았다.
덕분에 주먹이 날아오는 그 순간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렸고, 그 때문에 옆얼굴을 살짝 스쳤기에 상처가 나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우 얼굴에 주먹질하는 놈이 어디 있어요.”
“내가 배우인 줄도 몰랐을걸. 커피숍에서 선생님들하고 여럿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다짜고짜 그 방으로 쳐들어와서 주먹을 날렸었으니까.”
“그럼 두 분이 따로 만나셨던 것이 아니네요?”
“그 밤중에, 와이프도 아닌 다른 여자를 왜 단둘이 만나?”
아까 내가 언급한 기사는, 정말 아무 편견 없이 있었던 그대로 사실을 기술해둔 기사였다.
그런데 대부분 네티즌이 기사를 읽을 때, 지금 내게 말을 거는 진호처럼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서 기자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그 기사 중에서 아주 많은 언론사 기사들은 아예 사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을 그려내고 있었다.
덕분에 회사에 소속된 변호사님들이 많이 바빠지실 것 같은 느낌이다.
“오빠.”
“응. 웬일이야?”
“우리 동아리방에 놀러 오시면 안 되나요?”
“왜, 갑자기?”
“밖에서 오빨 만나면 사람들이 쳐다보기도 하고, 맘 편하게 이야기도 못 하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신입생들 모집이 끝이 나서요.”
“나 오늘은 강의가 많아서 다섯 시나 되어야 끝나는데.”
“괜찮아요. 오빠가 동아리방에 오실 수만 있다면 다섯 시도 완전 괜찮거든요.”
갑자기 동아리방에 놀러 와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충 짐작되었다.
신입 회원 모집이 끝나고, 오늘 첫 대면식이 아닐까 싶었다.
비록 내가 동아리 ‘장산곶매’에 회원으로 등록하진 않았지만, 은교를 비롯한 동아리 회원들은 나를 심정적으로 동아리 회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새로 가입한 신입생들 또한, 내가 당연히 ‘장산곶매’ 회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니 말이다.
생각했던 대로, 온종일 어제 일을 묻는 사람들도 내 주변이 붐볐다.
그리고 학생 중에서도 멀리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수군거리는 사람도 몇 있었고, 결국 이런 분위기는 쉬이 사그라지기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떳떳했기에, 그렇게 나를 보고 손가락질 하면서 수군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을 끊기로 했다.
회사에서 보도 자료를 뿌리고 홈페이지에 그 사실을 설명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정적인 기사는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었고, 그 기사들에 달린 댓글에서는 아예 나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오빠, 정말 괜찮으세요?”
“뭐가?”
“오늘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실 것 같아서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기분 나빠할 이유가 어디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난리잖아요.”
“어차피 시간 지나면 조용해질 거고, 또 사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어 있어. 그럼 지금까지 나를 욕했던 사람들이, 스스로한테 미안해지겠지.”
“알았어요. 힘내세요.”
오늘 들어야 할 강의를 모두 듣고 동아리방이 있는 학생회관으로 가니, 학생회관 입구에 동아리 회장인 은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굴 기다리고 있었어?”
“아뇨. 오빠가 오실 시간이 된 것 같아서 내려와 있었어요.”
“내가 동아리방도 찾아가지 못할까 봐?”
“그게 아니라 오늘 그 기사 때문에요. 만약 오빠한테 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뭐? 예나가 없었다면 그 말이지?”
“오늘같이 오빠가 힘들어하는 날에, 오빠가 결혼하지 않으셨더라면 제가 대신 위로해드리려고요.”
“인마, 위로받고 말고 할 것도 없다니까. 그리고 방금 그 말은, 엄청 위험한 발언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남자들은 오해할 수도 있어.”
“치! 오해하면 어때요? 어차피 아무 남자에게 그러는 것도 아닌데.”
아무튼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이래서 별로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여자들이 어느 정도 편해지면,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그냥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덕분에 내 이전의 생에서도 손조차 잡아보지 못했던 여자와, 관계를 했느니 어쨌느니 소문이 나서 제법 곤혹스러운 처지가 된 적도 있지 않았었던가 말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동생 같은 아이에게까지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니, 조금은 더 행동에 조심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치외교학과 1학년이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한강수입니다.”
조금은 서로 머쓱한 분위기에서 나는 동아리 회장인 은교 뒤를 따라 동아리방으로 향했고, 은교의 소개로 새로 가입한 동아리 신입 회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내 인사가 끝이 나자 신입 회원들은 박수와 함께 벽이 터질 것 같은 환호성을 질렀고, 여자 신입생들은 아련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신입 회원 여러분들은 정말 선배님들을 잘 만나셨어요.”
“왜요? 배우님이 동아리 회원이어서요?”
“아뇨. 전 ‘장산곶매’ 정회원이 아닙니다. 신입 회원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현역으로 활동하는 중이잖아요. 그래서 학교생활과 배우생활을 겸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운데, 그런 제가 동아리 회원이랍시고 적을 두게 되면 민폐죠.”
“그럼 왜요?”
“회장님과 다른 선배님들의 능력 때문입니다. 사실 회장님 권유로 단편영화를 찍으면서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함께 작업하면서 느낀 점이, 동아리 회장님이나 다른 선배님들이 아주 능력 있는 감독님이고 스태프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깐만요.”
신입 회원들의 질문을 받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고, 액정에는 진수 이름이 떠 있다.
나는 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휴대전화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