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이거 내 영화야!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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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내가 시나리오를 보고 푹 빠져서 이 영화가 내 영화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내 기억 저 깊숙한 곳에 저장되었던,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의 봉인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희한하게도 당시의 나는 잘생긴 것으로 유명했던 장건동보다는, 오히려 개성 있게 생겼다는 평을 듣는 유오진이라는 배우에게 푹 빠져서 살았었다.
그런데 내가 받은 이 영화의 배역도 뺀질거리면서 잘생긴 형사가 아니라, 조금은 거친 모습을 보이는 형사였다.
“제법 오래 기다려야겠다.”
“몇 번인데?”
“72번.”
“그럼 웬만하면 오전 중에, 오디션을 받을 수도 있겠다.”
“오전 중에는 가능하겠지.”
오디션을 보기 위해 참가한 사람들 숫자가 제법 되었지만, 오늘 내 대기 순번이 72번이니 어지간하면 오전 중에 오디션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서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 정신 상그럽게 만들지 말고 앉아.”
“연습하지 않아도 돼?”
“대사는 이미 다 외웠고 분위기도 대충 잡았어. 그러니 엉뚱한 걱정하지 말고 그냥 앉아서 쉬어.”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는 눈을 감았고, 진수는 그런 나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약간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았다.
“접수번호 72번 한강수입니다.”
“준비됐어요?”
“예.”
“그럼 지정연기 시작하세요.”
순서가 되어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가니 심사위원 다섯이 앉아 있었고, 오디션 참가자의 연기를 찍기 위해 카메라 두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시파! 나보고 뽕쟁이 새끼들 조직에 들어가서, 따까리 노릇을 하라고?”
“인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일단 그 새끼들을 일망타진하려면, 누군가 안에서 그 새끼들이 어떻게 작업하는지를 알아야 하잖아.”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야?”
“네가 가장 양아치처럼 생겼고, 또 어려 보이잖아.”
“형! 같은 말을 하더라도 좀 좋게 이야기하면 안 돼? 터프하다는 좋은 단어도 있잖아.”
“터프하곤 다르지.”
“시파! 나 안 해!”
의도적인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정말 이 부분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선택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정연기를 요구한 대본은 정말 평이했다.
솔직히 이 부분의 연기를 보고서 배역에 합당한 배우를 선별할 수나 있을 것인가 할 정도로, 이 대본이 지닌 변별력을 의심케 하는 그런 대본이었다.
“한강수 씨. 됐습니다. 거기까지만 하죠.”
나름으로 감정을 잡아 대사를 치고 있는데, 심사위원석에서 중단하라는 말이 들렸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나 하고 심사위원석을 바라보니, 감독으로 보이는 맨 중앙의 남자분이 나를 보고 빙긋이 미소를 지으신다.
“한강수 씨.”
“예.”
“방금 그 대사 부분 느낌이 어떤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정연기 대사로 쓰기엔 밋밋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한강수 씨 특기가 무술이라던데 사실인가요?”
“특기라고 하기보다는, 태권도와 합기도 그리고 유도와 검도 유단자입니다.”
“좋아요. 무술 실력이야 김영웅 감독께서 보증하셨으니....... 그런데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 영화 오디션에 왜 지원했어요? 솔직히 책을 예담기획에 보내긴 했지만, 한강수 배우가 당분간은 쉴 거라고 생각 했었거든요.”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니, 오늘 내가 참가한 오디션은 별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았다.
지금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저 양반은, 이미 김영웅 감독님을 통해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뉘앙스였고, 김영웅 감독님 또한 나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니 말이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이 영화는 내 영화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솔직히 그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단지 추측하건대, 예전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봤던 벗이라는 영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유오진 배우님 흉내를 내며 살았거든요.”
“장건동 배우가 아닌 유오진 배우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하필이면 왜 유오진이었지요? 대부분은 장건동 배우를 선호하잖아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저도 모릅니다. 굳이 이유를 대야 한다면, 제가 장건동 배우님만큼 잘생기진 않았다는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감독님(?) 질문에, 문득 진수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그대로 대답을 했다.
진수와의 대화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감독님의 질문을 받던 순간 2000년대 초반 나를 설레게 하였었던, 벗이란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유오진 선배를 당연히 떠올렸을 것이다.
“그럼 이번 영화도 한강수 배우가 지원한 배역인, 박 형사가 예전 유오진 배우가 연기했던 그 역할의 캐릭터 이미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에, 한강수 배우의 영화라고 생각한 것인가요?”
“확실히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이 제 내면에 깔려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솔직히 내 감정은 그랬다.
비록 배역의 직업이 조직폭력배 두목과 형사로 전혀 상반된 이미지지만, 배역 자체가 가지는 느낌만 볼 때는 영화 벗에서의 유오진 배우가 담당했었던 역할과, 이번 영화의 박 형사 둘의 이미지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오디션에서는 이례적이라고밖에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감독님의 태도를 보니, 굳이 오늘 이 오디션이 필요 했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었던 거야?”
“오디션을 보는데 일은 무슨 일?”
“다른 배우들과 달리 시간을 엄청 잡아먹었으니까.”
“감독님이 궁금하신 게, 제법 많으신 모양이더라고.”
“황우 감독님이?”
“그 시커멓게 생긴 양반이, 황우 감독님 맞지?”
“지금까지 감독님 얼굴도 몰랐던 거야?”
“감독님 얼굴까지 알아야 해? 그냥 시나리오만 좋고 감독님은 연출만 잘하시면 되지.”
다른 오디션 참가자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나는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연기에 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고 내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질문을 주로하신 것을 보면, 다른 배역은 몰라도 내가 지원한 박 형사 역할만큼은 이미 나로 정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디션은 뒷말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황우 감독님께서 나를 캐스팅하실 생각이 없으셨더라면, 수많은 지원자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면서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잡고 있진 않으셨을 테니 말이다.
“오디션은 잘 봤어?”
“아마도”
“그럼 박 형사로 배역이 확정된 거야?”
“내 느낌상으로는 그래. 90%는 확정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아.”
“한 배우!”
“응?”
“아무리 우리끼리라지만 설레발은 금물이야. 만약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내 대답에 지선이 누나는 기뻐하는 표정이었지만, 친구인 진수란 놈은 확실히 걱정을 사서 하는 놈이다.
진수야 평소에도 잠자는 사이에 지구가 폭발하거나 무너져 내릴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걱정이 많은 놈이니, 그런 진수의 의견은 그냥 듣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다시 동대문 시장으로 이동했다.
“누나, 나도 같이 가.”
“그냥 진수하고 둘이서 어디 커피숍에라도 가 있어. 내가 알아서 찾아올 테니까.”
“그래도 입어보면 잘 어울리는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잖아.”
“우리 진수, 누나에 대한 믿음이 많이 부족해진 것 아냐?”
“이야기가 왜 또 그쪽으로 흘러가?”
“누나 실력을 믿는다면, 그냥 커피숍이라도 가서 시간이나 때우고 있어.”
시장 구경이라도 하려고 했더니, 지민이 누나는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시장바닥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알아보게 된다면, 원래부터 복잡한 시장바닥이 난리가 나는 것도 순간일 테니, 지선이 누나는 그걸 걱정하는 것이다.
“응, 자기야~”
“뭐 하고 있었어?”
“시나리오 읽다가 커피 마시다가, 그러고 있지. 그런데 어떻게 되었어?”
“잘될 것 같아.”
“오디션 잘 봤구나. 그럼 언제 내려와? 자기 엄청 보고 싶은데.”
“지금 동대문 시장인데, 옷 몇 장만 사고 바로 역으로 갈 거야.”
커피숍에 도착해서 예나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결혼하기 전하고 달라진 것은 없고?”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예나 씨 태도 말이야.”
“달라질 것이라고 있기나 해.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선순데.”
“학교생활은?”
“너도 알다시피 애들이 날 잘 따르잖아. 그러니 학교생활도 걱정할 일 없어.”
“아무리 동생들이 널 잘 따른다고 하더라도 항상 조심해. 언제 뒤통수를 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참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애들이, 무슨 남의 뒤통수를 친다는 말인가?
아무튼 진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느새 쇼핑을 마친 지선이 누나로부터 차를 시장 앞으로 가져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옷이 이렇게 많아?”
“옷장에도 걸어둬야 하잖아. 옷장에 입고 다니는 옷만 달랑 걸어둘 생각이야?”
“그거야 제작사에서 알아서 할 문제지.”
“이번 영화 네 영화라면서? 네 영환데 제작사는 왜 믿어.”
지선이 누나는, 아예 혼자서 들기엔 버거울 정도로 큼지막한 비닐봉지에 옷을 가득 채워왔고, 미정이 누나뿐 아니라 미선이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짜 누나도 손 크다.”
“크긴 뭐가 커?”
“도대체 옷이 몇 벌이야?”
“생각해봐라. 1년에 계절이 몇 번 바뀌어?”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네 번이지.”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1년에 네 벌 이상은 있어야 하잖아. 그리고 시나리오대로라면 거의 3년이야. 그 3년 동안 같은 옷을 입고 지낼래?”
지선이 누나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누나는 내가 오디션 차례를 기다리던 그 시간에 시나리오를 엄청 열심히 읽었던 것 같았다.
하긴 갓 경찰에 입문한 어리바리한 신참형사 노릇에다가, 나중에는 닳고 닳은 때까지 진하게 묻은 마약전담 형사 노릇까지 해야 할 정도로, 이번 영화의 배역 스펙트럼은 넓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도, 또 그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종류의 옷이 필요했을 것이다.
배우도 자신이 맡은 역할에 관해서 공부를 해야 하지만, 스타일리스트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스태프 역시 자기가 담당하는 배우의 캐릭터에 관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 분야에서 나름 방귀깨나 뀐다고 큰소리를 칠 수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그 사람들이 먹고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게 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남의 뒤나 쫓아다니며, 남의 수발이나 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고.
“지수 얼굴은 보지도 않고 갈 거야?”
“그냥 학교로 가자. 내일 수업도 있고 하니, 얼굴만 보고 바로 출발해야지.”
독일에 다녀온 것이 엊그제이니, 지수 얼굴을 오래 보지 못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딱히 지수를 기다렸다가 양산으로 내려갈 일까지는 없었기에, 잠시 학교에 들러 학교 앞에서 지수를 불러내서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