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이거 내 영화야!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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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내가 이번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우선 회사의 허락이 필요했다.
선 대표님이야 허락하셨다고 하지만,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고 감독님의 역량이 뛰어나더라도, 회사란 조직은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굴러가는 곳이니, 회사로서는 출연료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예나 정도의 커리어를 지닌 배우라면 출연료가 아닌 다른 것에 중점을 둘 수도 있고, 작품이 좋다는 이유로 노 개런티 출연을 고집한다고 하더라도 막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 위치는 아직 그럴 깜냥이 되지 못한다.
“어딜 가?”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
한창 내 대사를 받아주던 예나가, 휴대전화를 들고 옷 방으로 향했다.
전화가 걸려온 것을 받는 것도 아니고 대사를 치던 도중에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휴대전화를 들고 내가 통화내용을 듣지 못하는 옷 방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예나가 아닌 다른 여자가 나와 결혼해서 저런 행동을 한다면, 설마 내가 모르는 남자와 통화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50% 이상은 의심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다.
그리고 예나의 통화는 제법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예나가 옷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바보처럼 앉아 있다가 다시 시나리오에 눈을 돌렸고, 시나리오에 다시 푹 빠졌을 즈음 예나가 내 옆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나도 이거 하기로 했어.”
“응?”
“나도 자기랑 이 작품을 같이 하겠다고.”
“어떻게?”
“방금 회사하고 통화했거든. 시나리오가 재미있기도 하고 또 자기 코믹스러운 분위기를 살려주려면, 아무래도 내가 옆에서 같이 하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아서.”
“회사야 당신이 하겠다고 하면 푸시해줄 수밖에 없겠지만, 제작사에서는......”
“에혀! 자기야, 내가 누구야? 나 서예나야!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서. 예. 나,”
하긴 예나가 먼저 작품을 하겠다고 나서는데, 그걸 깔 제작사나 감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단독 주연은 아니었지만 내게 들어온 배역의 비중이 조주연급이었고, 다른 배우들 역시 경력은 제법 된 배우들이지만 고만고만하다고 할 정도 수준이었다.
오히려 떠오르는 신성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내가, 이번 영화에서 가장 핫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된 것인지 몰라도,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비해 배우에 대한 섭외는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Top 배우란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오고 있는 예나라면, 제작사나 감독으로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기분일 것이다.
그것도 번쩍거리는 황금과 보석으로, 속이 가득 차 있는 그런 호박 말이다.
예나가 이번 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중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서예나 배우란 이름이 가지는 이름값, 즉 예나가 가진 티켓파워 만으로도 기본은 깔고 가는 영화가 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하면 내가 너무 당신에게 업혀가는 분위기가 되는데?”
“업혀가긴 뭐가 업혀가? 우린 부부니까 서로 의지하고 가는 거지. 그리고 자기나 나나, 우리 둘에 대해서 우리만큼 우리를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니 연기도 훨씬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지.”
특별한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 부부가 한 작품에 출연하게 되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가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부부가 한 영화에 출연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아무튼 예나가 작품을 같이 하겠다는 것을, 나로서는 말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분간 작품 활동을 접고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지내겠다던 예나가 아닌가 말이다.
아무튼 우선은 시나리오를 보고 연습을 해야 한다.
예나야 당연히 오디션을 볼 일이 없겠지만, 일단 내 출연조건은 우선 오디션을 봐야 하고 그 오디션에서 통과해야 출연이 가능하다는 것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다.
그렇게 예나와 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극 중의 배역에 대해 의논도 하고, 서로 대사를 맞춰보면서 영화에 푹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다녀올게.”
“나도 같이 간다니까?”
“회사에 가서 아버님을 만나야 할 일이 있거나, 여기가 답답해서 서울 공기를 쐬고 싶다면 몰라도, 나 때문이라면 그냥 양산에 있어.”
서울까지 따라가겠다는 예나를 떼어 놓고, 오디션을 보기 위해서 상호가 운전하는 밴에 올랐다.
“부산으로 빠져.”
“형, 뭐라고요?”
“부산으로 빠지라고.”
“학교에서 뭐 챙겨 가실 것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구포역에서 KTX 타고 올라갈 거야.”
“예? 왜요?”
“뭐하려고 둘씩이나 고생을 해. 내가 예나처럼 사람들이 얼굴만 보고 알 정도로 유명한 배우도 아니니, 귀찮을 일도 없는데.”
“하지만 서울에 도착해서, 오디션이 열리는 영화사까지 이동하시려면.......”
“서울역 도착하면 진수가 나와 있을 거야. 그러니 걱정할 일 없어.”
상호는 내 결정이 내심 불편한 모양이었다.
예나가 알게 되면 잔소리는, 상호 몫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승용차도 아닌 연비도 좋지 않은 밴을 혼자 타고 서울까지 가는 것도 비경제적인 일이고, 또 나 하나 때문에 왕복 8시간 정도를 운전할 상호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자만 쓰고 다녀도, 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에서 내가 배우 한강수란 사실을 눈치를 챌 사람도 없다.
그러니 내가 혼자 기차를 타고 간다고 하더라도, 귀찮아질 문제가 발생할 일도 없는 것이다.
“어이~ 새신랑. 얼굴이 홀쭉해졌구먼.”
“알라가 어른보고 까불면 혼난다.”
“신혼 재미는 어때?”
“깨가 쏟아진다. 됐냐?”
“지랄! 그런데 왜 제수씨는 같이 오지 않고 혼자 왔어?”
“오디션만 보고 바로 내려가야 하는데, 뭐 한다고 둘이 같이 고생해.”
서울역에 도착해 개찰구를 나서니, 진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답잖은 농을 하면서 나는 진수와 함께 주차장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스타일리스트인 지민이 누나랑 메이크업 담당인 미정이 누나를 만났다.
“누나들은 뭐하려고 나왔어? 오디션인데.”
“너 예나하고 같이 출연할 거라면서? 그럼 오디션에서 확실히 붙어야지.”
“그거 결정된 거야?”
“서 팀장님 이야기로는 네가 오디션에 통과하면, 제수씨 계약서도 같이 쓰기로 했다던데.”
이른바 조건부 계약이었다.
결국 그 말은 내가 예나의 인기에 업혀간다는 뜻이기도 했고, 또 내가 오디션에서 완전히 죽을 쑤지만 않으면 캐스팅이 거의 확정적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솔직히 조금 쪽팔리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내가 평생 배우생활을 계속할 것도 아니고, 또 대중들에게 괜찮은 이미지를 지닌 배우로 자리매김할 정도가 되면 정치로 전업할 생각이니, 이 정도 쪽팔림은 감수할 생각이다.
예나의 등에 업혀간다는 비아냥거림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예나의 참가로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된 영화에서 주요배역을 별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는 일이 될 것이다.
만약 이번 영화에서 기대이상의 연기력으로 감독님께 눈도장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면, 조만간 원톱 주연을 맡을 기회도 생기게 될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숍에는 왜?”
“밴에서 옷 갈아입을 생각이야?”
“숍에 들어가면 괜히 돈 들잖아.”
“이미 계약했어. 어차피 촬영이 시작되면, 나 혼자서 둘을 감당하긴 힘이 들어서.”
“이러다가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어쩌려고?”
“대표님은 전혀 떨어질 거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시지 않고 계시던데?”
엉뚱한 곳에서 부담을 주고 있었다.
솔직히 대본을 보면서, 나 역시도 이번 오디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기보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이번 영화가 딱 내 영화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전의 삶에서 내가 이 영화에 출연했던 것도 아니고, 또 내 전생의 기억에서는 이번 영화를 알지도 못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내 전생의 기억에서 이번 영화가 없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그다지 흥행했던 영화가 아니었다는 것이란 의미이기도 했다.
하긴 나도 이른바 듣보잡이긴 하지만, 영화판에서 밥을 먹고 있는 나조차도 누군지 모르는 배우가 주연배우 중의 하나였을 정도이니, 이런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말이다.
“누나, 이 옷은 아니다.”
“왜?”
“내가 할 배역의 형사는, 이렇게 추레한 모습의 형사가 아니라 좀 날라리거든.”
“날라리? 형사가 날라리라니 그게 말이 돼?”
“말이 돼. 시나리오가 그렇거든.”
회사에서 시나리오 검토를 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시나리오 검토 결과를 스태프들에게 전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게 스태프인 누나들과 배우인 내가 떨어져서 지내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내가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했다.
앞으론 오디션을 보기 전에, 최소한 스태프 누나들에게는 내가 맡은 배역의 캐릭터를 미리 알려줘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계약한 숍으로 가는 도중에 스태프 누나에게 내가 맡은 배역의 캐릭터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숍 예약시간을 1시간 미루고 스타일리스트인 지민이 누나의 말대로, 동대문 시장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일단은 급한 대로 오늘은 이 옷을 입자.”
“콜!”
지민이 누나가 골라온 바지와 재킷은, 날라리라기보다는 양아치 분위기를 풍기는 옷이었다.
하지만 형사라는 직업의 사람들의 차림을 생각해 보면, 차라리 지금 이 옷처럼 양아치 분위기가 살짝 풍기는 옷이 훨씬 어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강 폭력계 형사를 경찰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보면, 그 사람의 직업이 경찰이 아니라 조직생활을 하는 형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마약계 형사들 또한 마약쟁이 이미지가 풍기는 것이, 훨씬 개연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와~우~ 우리 강수 제법 터프한데.”
“잘 나온 것 같아?”
“응, 내가 만진 얼굴이지만 끝내준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평소 내 모습보다는 제법 선이 굵으면서도 조금은 퇴폐적인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골목에서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쥐고 담뱃불을 쪽쪽 빨아댄다면, 딱 양아치 그 자체일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눈 밑의 다크서클은, 마약에 찌든 뽕쟁이가 아닐까 하는 그런 이미지를 더해주고 있었다.
“출발하자.”
차에 대기하고 있던 진수가, 내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는다.
예전 히트를 쳤던 조직폭력배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 영화에서 뽕쟁이로 나왔던 배우를 보고 학창시절 내가 따라 하던, 그 기억이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우리 한 배우, 절반쯤 소원을 달성했네.”
“진수야 그게 무슨 뜻이야?”
“아, 강수가 고딩 때, 부산을 배경으로 찍은 조폭 영화 있잖아요. 거기서 유오진이 뽕에 취해 있던 것을 따라 하느라, 한동안 난리를 쳤던 적이 있었거든요.”
“유오진이 나온 영화? 그 장건동이하고 같이 나왔던 벗이란 영화 말이야?”
“예. 그 영화에 푹 빠져서, 절마 저거 그 영화 열 번도 넘게 봤을 걸요.”
그랬던 적이 있었다.
2001인가 개봉했었던 영화였었는데, 그때 나는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유오진이라는 역할에 푹 빠져서, 한참을 그리 살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