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이거 내 영화야!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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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안에서도 지수를 찾기란 요원했다.
도대체 글을 읽고 이해할 방법이라도 있어야, 어디가 어디인지를 알 것이 아닌가 말이다.
독일어 옆에 영어를 함께 적어두었더라면 서투른 영어라도 건물을 찾는 것은 가능할 텐데, 어떻게 된 나라가 아예 영어를 구경조차 하기 힘이 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대한민국이 외국인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기본적으로 영어가 있고, 거기에다 나이가 좀 든 어른들 중에서 일본어 구사가 가능한 사람도 많고, 심지어 지하철 같은 경우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 3개 국어로, 번갈아가면서 안내방송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그냥 여기 앉아서 기다리자. 괜히 이렇게 쏘다녀봐야 찾을 수 있다는 확신도 없고, 자칫 길이라도 어긋나면 오히려 더 고생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지수를 찾아다니는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동아리 장산곶매 동생들은 아직 버틸 여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지수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 때맞춰 눈앞에 노천카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냥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지수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왜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어?”
“어~ 오빠 미안해. 강의실에 있었거든.”
“들어가도 괜찮다고 했어?”
“그냥 들어갔지. 여긴 강의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런데 지금 어디야?”
“응, 잠깐만. 저걸 어떻게 읽지?”
뭐라고 쓰여 있긴 있는데, 도통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몰랐다.
결국 그냥 건물 쪽으로 다가가서, 건물 이름으로 짐작되는 현판을 사진으로 찍어 지수에게 전송했다.
“알았어. 대충 어디쯤인지 짐작이 가니까, 그 옆에 노천카페에서 커피나 마시며 기다리고 있어.”
“뭐? 여기 노천카페가 있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가까운 곳에 있어?”
“아냐, 가서 이야기해줄게.”
신기하긴 했지만, 지수 말대로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수가 내가 사진으로 찍어 보내준 것만 보고 이곳에 노천카페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 지수가 도착하면서 자연 알게 되었다.
“지도는 어디서 구했어?”
“안내데스크에서.”
“거긴 어딘데?”
“피~ 이야기해준다고 해서 알아? 어차피 오빠는 독일어엔 젬병이잖아. 읽지도 못하는 지도가 무슨 필요가 있다고.”
“아무튼 조금만 더 쉬었다가 가자. 다리가 아파서 돌아버리겠다.”
아무튼 지수가 도착하자 갑자기 긴장이 풀린 것인지, 그때부터는 꼼짝하는 것조차 싫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나와 장산곶매 회원 동생들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렇게 노천카페에서 잠시 쉬면서 체력을 회복한 후에, 우린 지수 뒤를 따라다니면서 라이프치히 시내를 구경했다.
“뮌헨은 정말 가지 않을 거야?”
“내가 뮌헨에 관심 가질 일은 전혜린뿐이야. 진짜 뮌헨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때가 온다면, 그때 다시 가보면 되는 거고. 그리고 나 이미 결심했어.”
“뭘?”
“여기로 유학 와서 공부하기로.”
돈이야 좀 들겠지만 지수를 이곳 독일로 유학 보내는 일이야, 그다지 어려울 일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곳 현지 언어인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유학을 하는 데 있어 기본은 갖췄다고 할 수 있으니까.
아무튼 베를린에서는 아예 지수 뒤를 따라, 대학 건물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빤 어디가 좋겠어?”
“뭐가?”
“어제 라이프치히와 여기 베를린 중에서.”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독일에 유학을 오게 되면, 라이프치히 음악대학이나 베를린 음악대학 중에서 선택할 생각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어디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냐고.”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해. 네가 하고자 하는 공부에 맞는 곳이, 어딘가 그게 중요하지.”
연극이라면 겉핥기식이라도 뭐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었겠지만, 음악대학에 대해 아는 것도 관심도 전혀 없었다.
그리고 특히 독일이 아니라 아예 외국 유학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지수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지수가 이곳 베를린 음악대학까지 찾아보는 것으로 독일에 따라온 목적을 다 했다고 했기에, 우린 편안한 마음으로 지수를 따라다니며 통일 독일 수도인 베를린 시내를 관광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쟤네만 아니면 며칠 더 놀다가 가고 싶다.”
“난 이제 김치 생각이 간절한데.”
“김치야 찾아보면 구할 수 있을 거야. 쟤네들 먼저 보내고 우린 며칠만 더 있다가 갈까?”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정 불편하면 통역사를 하나 구하면 되지 않을까?”
예나는 독일에서 며칠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함을 견디기 힘들었었다.
결국 우리는 장산곶매 회원 동생들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베를린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비행기는, 이곳 독일로 올 때보다 훨씬 짧은 12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뭘요. 언니하고 오빠 덕분에 독일 구경은 실컷 한 걸요.”
“그랬다면 다행이고.”
인천공항에 우리는 바로 과천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KTX를 이용해서 부산에 내려왔다.
“형, 독일은 잘 다녀오셨어요?”
“응, 죽을 맛이다.”
“왜요?”
“비행기 안에서 열댓 시간을 버텨봐라. 그럼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을 거다.”
집에 도착해서 완전히 뻗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튿날까지 침대를 애인 삼아 꼼짝도 않고 지내다가, 정말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진호와 동생들이 독일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속을 더부룩하게 만드는 음식, 그리고 라이프치히에서 지수를 찾으러 다녔던 악몽 같았던 시간 말고는,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예. 팀장님.”
“잘 다녀오셨어요? 전 귀국해서 회사에 들렀다가 가실 줄 알았습니다.”
“죄송해요. 솔직히 1초라도 빨리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시기도 하겠네요. 비행시간만으로도 사람 녹초 만들기에 딱 좋은 곳이니까요.”
어차피 수상도 하지 못했기에 예담기획의 홍보팀장님이 전화를 걸 일도 없을 것인데, 학과 동생들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전화가 걸려왔기에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팀장님께서 웬일로 전화를 주셨어요? 상도 받지 못했는데......”
“작품이 하나 들어와서요.”
“홍보팀으로요?”
“그게 제가 좀 가깝게 지내는 감독님이어서요.”
“어떤 작품인데요?”
“영홥니다. 마약전담 경찰관이 주인공이고 마약 수사과정을 그린 영화인데, 코믹한 요소도 좀 섞여 있어서 제법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시나리오를 제가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죠. 이미 배우님 이메일로 보내뒀고, 책은 아마 내일 오전 중에 택배로 도착할 겁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별말이 없겠습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이미 대표님께도 보고를 드려놨습니다.”
선 대표께서 보고를 받으셨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출연제의야 회사를 거치지 않고 배우에게 바로 오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으니, 월권이니 뭐니 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고.
영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솔직히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 벌써 가요?”
“그래. 좀 피곤하기도 하고, 집에 가서 확인할 것이 있기도 하고.”
평소 한두 시간 정도는 도서관에 들러서 공부를 한답시고 폼을 잡았지만, 시나리오를 보냈다는 말에 오늘은 마음이 급해졌다.
“자기가 오늘 웬일이야? 이렇게 일찍?”
“응, 시나리오를 하나 보냈다고 해서.”
“그래? 난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일찍 왔나 싶었는데.”
“당연히 당신이야 순간순간 보고 싶지. 그건 기본이잖아.”
“치~ 그런데 중간에 문자도 한 통 해주지 않았어?”
종일 혼자 집을 지키느라, 예나가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예나 혼자서 외출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고, 설령 외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양산 땅에 아는 사람이라곤 없으니, 아예 외출할 생각도 않는 것이다.
“감독님은 어느 분인데?”
“황우 감독님, 마약반 형사들 이야기라네.”
“황우 감독님?”
“응.”
“그럼 나도 같이 보자.”
예나가 예전에 황우 감독님과 작품을 같이 한 적이 있었기에, 예나도 황 감독님의 새로운 작품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코믹 영화네?”
“응, 아까 팀장님이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
“그런데 자기 이미지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자기가 이렇게 코믹한 장면을 소화해낼 수 있겠어?”
“솔직히 나도 자신은 못하겠다. 해본 적이 없어서.”
하긴 아직 신인에 불과한 내가, 언제 코믹한 연기를 할 기회가 있기나 했겠는가?
그런데 그 점은, 전생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내 앞으로 들어오는 영화나 드라마는, 내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무게를 잡는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드라마와 영화들이 성공한 덕분에, 내가 영화계에서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도 한강수라는 배우의 이미지는, 적당히 무게감 있는 점잖은 배우 그것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 덕분에(?) 나는 당시 집권여당의 영입제안을 받게 되었었고, 수차례 고사 끝에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배지를 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역할이 탐이 나긴 하네.”
“왜? 이 영화를 하고 싶어?”
“우선 내가 이 배역을 소화해낼 수 있는지, 그것부터 확인해 봐야지.”
“그럼 오늘부터 시나리오를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반복해서 계속 읽어봐.”
“그건 어디서 배웠어?”
“배우긴 이런 걸 어디서 배워. 예전에 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은 배역인데도, 진짜 하고 싶어지는 역할이 있으면 시도했던 방법이지.”
“그래?”
“응, 그러니 혹시 자기도 나처럼 하면, 그 방법이 통할지 몰라서 그러는 거지.”
희한한 일이었다.
사실 이전의 삶에서도, 내가 소화해 내기에 힘이 드는 배역이 종종 있었다.
차라리 내키지 않았다면 그냥 한 구석 치워두면 될 일이지만, 이상하게 무엇이라도 씐 것처럼 그 역할을 꼭 하고 싶어지는 것이 있었다.
그럴 때 내가 채택했던 방법이 바로 지금 예나가 이야기한, 시나리오를 달달 외울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해서 그 시나리오를 읽는 방법이었고, 그런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그 배역과 동화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이번 삶에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지난 삶에서처럼 그게 가능해질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직 책도 받지 않고 이메일로 확인하는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내가 꼭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이 영화의 흥행과는 무관하게, 지금 느껴지는 이 촉을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