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도대체 저건 뭐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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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봤어요?”
“뭘?”
“현수막 걸린 것이요.”
“갑자기 현수막은 왜?”
“형 등교할 때, 정문으로 안 해요?”
“버스 환승해서 셔틀 타고 오잖아.”
“그럼 우리 지금 교문에 잠시 갔다가 오죠.”
“쓸데없이 거기까지 무슨 일로?”
강의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벤치에 앉아 커피와 더불어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진호 녀석이 뛰듯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그런데 다짜고짜, 내게 교문 쪽으로 가자고 보챈다.
“헐! 골 때리네. 누가 이런 짓을 했어?”
“장산곶매 애들 작품이죠.”
“그럼 저기 본부에 걸린 것은?”
“그거야 당연히 대학본부에서 내건 것이고요.”
한마디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학교 정문에는 가스를 넣은 애드벌룬을 이용해서 대형 현수막을 하늘높이 띄워 두었고, 대학본부 건물 외벽에도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물론 다른 현수막이라면 내가 신경을 쓸 이유도 없겠지만, 두 현수막 모두 그곳에 나와 예나의 얼굴이 실사로 구현되어 있었다.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단편영화제 입상과 드레스덴 국제 단편영화제 초대작이라는 사실은, 아주 작게 쓰여 있었고 말이다.
“예, 오빠.”
“현수막이 좀 많이 심했다.”
“예? 그렇게 하면 안 되나요?”
“회사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고 저런 사진을 게시하는 것은, 초상권 위반으로 소송의 대상이 될 수도 있거든.”
“오빠하고 언니 사진인 데도요?”
“당연하지. 우리가 그냥 개인 자격으로 활동하는 것이라면 우리 동의만 얻어도 가능하지만, 우리가 예담기획에 소속된 이상 초상권뿐 아니라 모든 일정은, 회사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 하거든.”
영화 동아리 장산곶매 회장인 은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사전에 내게 이야기하면 내가 반대할 것 같아서, 우선 일을 저지르고 보자는 생각에 이렇게 현수막을 내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이 학교에서 3년 반이란 시간동안 계속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에 관해 홍보하는 것은, 내게 결코 도움이 될 일도 없고 자칫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설득하는 대신에, 법적인 문제로 겁부터 줬다.
물론 엄밀하게 법을 따지자면, 방금 내가 은교에게 이야기한 그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나나 예나가 소속사인 예담기획과의 관계를 생각하자면, 이런 법적인 문제는 딱히 신경을 쓸 일도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은교에게 한 이야기는, 다분히 겁을 집어먹고 스스로 현수막을 내리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하지만 오빠하고 예나 언니가 소속된 회사가, 예나 언니 아빠 회사잖아요?”
“개인적인 관계와 회사 업무는 다르지. 그리고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면 알 수 있겠지만, 예담기획은 대표이사가 선 대표님일 뿐이지, 개인회사가 아닌 주주들의 투자로 만들어진 법인이야. 그러니 아무리 선 대표님이 대표이사라고 하더라도, 대표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
“힝~ 그럼 어떻게 해요? 현수막 제작하고 애드벌룬 준비한다고, 용돈을 다 털기까지 했었는데.”
“지금 학교에 있니?”
“예. 오늘 오전 강의가 있어서요.”
“그럼 같이 점심 먹을까?”
“정말이요? 정말 오빠랑 점심 같이 먹어도 돼요?”
현수막 때문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주눅이 든 목소리를 내던 은교 목소리에 활기가 넘쳤다.
일단 점심을 같이 먹으며 내 사정을 설명하면서 이해를 구하고, 현수막을 교체하는 방향으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또 어딜 가려고요?”
“본부에 가지 가긴 어딜 가?”
“대학본부에는 왜 가요?”
“홍보실에 이야기해서, 현수막 교체해달라고 해야지.”
“전 보기만 좋은데, 왜 교체를 하시려고 해요?”
“너야 좋겠지만 재학생들이나 교직원 중에서, 저 현수막을 보고 아니꼬워하거나 싫어할 사람이 없겠냐?”
“형하고 예나 누나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인마, 너나 좋아하지, 우릴 싫어하는 사람들 의외로 많다.”
진호는 현수막을 교체하는 것을 아쉬워하지만 남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지 간에, 내가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도 아닌데 저렇게 대형 현수막에, 나와 예나의 얼굴이 걸려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담기획과는, 저희 쪽에서 조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대표이사님께 말씀드리기도 했고, 대표이사님께서도 현수막은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셨습니다.”
“꼭 교체를 해야 합니까?”
“예. 이번 단편영화의 주인공은 저나 집사람이 아니라, 영화 동아리 장산곶매 회원들 아닙니까. 회사와 학교 당국 간의 법적인 문제도 법적인 문제지만, 제 개인적으로도 솔직히 저건 아니다 싶습니다.”
“그럼 어떤 내용으로 교체하면, 배우님께서 동의하시겠습니까?”
“시안을 회사 홍보팀에 부탁해두었습니다. 아마도 내일 오전 중으로는 시안이 확정될 것이니, 파일을 받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홍보실 담당 직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법적인 문제를 걸고 나오는데 자기가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홍보실 담당 직원은 속으로 불만을 삭이면서, 내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예. 한 배우님. 신혼 재미는 어떠세요?”
“남들 다 하는 결혼인걸요. 그런데 팀장님께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요.”
“말씀해보세요. 우리 한 배우님께서 부탁하시는 일이라면, 제가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나는 방금 있었던 일에 관해서 설명하고, 나나 예나가 튀지 않는 선에서 현수막에 사용할 시안을 부탁했다.
그러자 홍보팀장님은 장산곶매 회원들이 찍은 영화의 파일을 요구했기에,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이메일로 전송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현수막 문제를 일단락 짓고, 나도 수업을 듣기 위해서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함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는 교수님이 오시고 난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교수님 나이가 젊어서인지, 교수님 역시 이번 단편영화제에서의 수상에 관해 관심이 아주 많았으니 말이다.
“응, 어서 와.”
“와~ 전 여기 처음 와 봐요.”
“나도 처음이긴 마찬가지다. 뭘 먹을까?”
“오빠 드시는 것하고 같은 거로 할게요.”
메뉴판을 살피던 은교는 가격이 제법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선택하는 것을 단념하고 내가 주문한 것과 같은 것을 먹겠다고 했다.
“은교야.”
“예. 오빠.”
“이번에 입상한 영화는 너하고 장산곶매 회원들 영화야. 나나 예나는 그 부속품 중의 하나일 뿐이고.”
“아뇨! 오빠하고 언니가 아니었으면, 영화제에서 절대 입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물론 배우를 아마추어를 캐스팅한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긴 하겠지.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배우의 연기력도 보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세심하게 보는 것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야. 그래서 세계에서 이름 있는 영화제에서 주연상보다, 감독상이나 작품상을 훨씬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것이고.”
“아무튼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영화에 오빠하고 언니가 안 계셨더라면, 제대로 찍지도 못했을 거예요.”
얘도 고집이 한 고집 하고 있었다.
“혹시 은교 너 성이 ‘강’ 씨나 ‘최’ 씨야?”
“아뇨. 양은교인데요. 여기서 갑자기 성이 왜 나와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네가 고집이 센 사람 같아서.”
“치! 그렇게 팩 폭하시는 것은 좋은 습관 아니거든요.”
“아무튼 학교 홍보실에도 이야기하고 왔는데, 현수막을 교체하도록 하자. 현수막 교체에 들어가는 비용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어떻게 교체하실 생각이신데요?”
다행히 교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아까 홍보팀 담당 직원과 이야기했던 내용을 은교에게 반복했고, 은교는 성에 차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수긍하고 있었다.
“현수막에 사용할 이미지 파일이 필요한데, 혹시 따로 스틸로 찍어둔 것이 있어?”
“스틸은 그냥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서 찍어둔 것밖에 없어요.”
아마도 메이킹 필름을 대신하기 위해, 스틸 카메라로 따로 찍어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홍보팀에서 원하는 것은 영화 내용 중에서 몇 장면을 원하는 것이니, 현장 주변을 찍은 스틸사진으로는 부족했다.
“너희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혹시 영화 파일을 우리 회사 홍보팀에 좀 넘겨줄 수는 있을까? 홍보팀에서는 영화 장면 중에, 몇 컷을 선택해서 현수막에 넣었으면 하거든.”
“정말이요? 정말 회사에서 그렇게 해주신다고 해요?”
“응. 그런데 파일을 건네줄 수 있는지 그게 관건이지.”
“그 큰 회사에서, 우리 같은 학생들이 찍은 작품이 뭐가 대단할 거라고요. 또 영화 주인공이 오빠하고 언니잖아요. 언제 드려요?”
“점심시간 끝나고 이메일로 보내준다고 했어.”
“자요!”
내 말이 끝나자 은교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가방 속에서 USB를 꺼내 내게 넘겼다.
“설마 이거 원본 파일은 아니지?”
“오빠하고 언니께 드리려고 복사해뒀던 거예요.”
“고맙다.”
굳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백 팩에서 노트북을 꺼내, 홍보팀장님 이메일로 은교에게서 받은 USB 안의 파일을 전송했다.
그렇게 현수막 문제는 일단락 지을 수가 있었다.
“이게 뭐야?”
“오늘 학교 정문하고 대학본부 외벽에, 이렇게 난리를 쳐 뒀더라.”
“부산 사람들 엄청 화끈한 모양이네. 그런데 뭐 한다고 두 개씩이나 붙였대?”
“교문 쪽 애드벌룬으로 띄운 것은 동아리 애들이 한 거고, 본부 건물 외벽 현수막은 학교 홍보실에서 작업한 거라던데.”
“애들이 무슨 돈이 있어서?”
“용돈을 쏟아 부었겠지.”
예나의 반응은, 내가 현수막을 처음 발견했을 때와는 달리 오히려 즐거운 표정이었다.
하긴 같은 배우라고 하더라도 바깥에 나가기만 하면, 셔터 세례를 받고 살았던 예나와 내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빠도 당분간 쉬어도 괜찮다고 하셨다던데.”
“아버님하고 통화했었어?”
“응. 아까 전화 받았는데 아빠도 빨리 아기 가지라고 하더라. 그래야 가정이 안정되고 자기도 책임감을 훨씬 더 많이 느낄 거라면서.”
결국 예나의 고집을 꺾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하긴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할 일이 없으니, 빨리 아기를 가지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이렇게 아기 가지는 것을 미루려고 하는 것은, 왕성하게 활동하던 예나가 아이를 임신하고 또 낳아 기르면서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면, 혹시 그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그것이 걱정되었을 뿐이니 말이다.
“그럼 오늘부터 아기 만들어 볼까?”
“자기 가능하겠어?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걱정도 팔자다. 사내란 족속들은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그걸 생각하는 족속들인데.”
“정말 그래? 그런데 언니들 얘기 들어보면, 안 그런 아저씨들도 많다던데?”
“그거야 그 부부 둘만 알 수 있는 일이지. 아니면 바깥에서 힘을 빼고 들어왔을 수도 있고.”
“어머! 갑자기 왜 그래?”
내가 양손으로 예나를 뻔쩍 들어 안자, 예나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예나 스스로 아기를 가지길 원하니, 굳이 미뤄야 할 이유도 없다.
오늘은 초저녁부터 땀을 좀 흘려야 할 것이란 생각으로, 나는 예나를 침대 위에 던졌다.
이제 내가 짐승으로 변신할 시간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