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팀이 식구가 되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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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며칠 사이지만, 그 며칠 사이에 내 위상이 많이 달라진 것이다.
지난번 선 대표님이 밴을 이용하라고 말씀하셨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과연 내가 밴을 타고 다닐 정도의 자격이 있는 배우인가를 고민했다.
하지만 ‘네 안의 야수’ VIP 시사회가 가져온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훨씬 이상이었고, 소속사인 예담기획에서도 완벽하진 않지만 아예 내 전담팀을 꾸려지게 된 것이다.
아직은 딱히 주연을 맡은 작품도 없었고 아직 스타라고 불리긴 모자라지만, 소속사에서는 한강수란 배우가 지닌 상품가치를 인정한 것이고, 나 역시도 회사가 매긴 그 상품가치를 스스로 인정한 결과인 것이다.
“총무과에 가면 필요한 내용을 안내해줄 걸세.”
그렇게 김진수 팀장은, 날 전담한 메이크업 담당과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대표실을 나갔다.
“한 배우 전담팀이 꾸려졌다니 기분이 어떤가?”
“아직은 얼떨떨합니다.”
“이제 한 배우가 저 친구들을 먹여 살려야 해. 한 배우 실적에 따라서 저 친구들뿐 아니라, 우리 예담기획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네.”
선 대표님과 몇 가지 잡다한 이야기를 더 나눈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카 한도가 확 늘어났다.”
“식구가 늘었으니 당연하지. 이제 네가 좋아하는 소고기 열심히 사 먹어도 되겠네.”
“한 배우님, 저도 소고기 좋아해요.”
“저도요.”
진수는 법인카드의 한도가 늘어난 것이 가장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회사 내에, 나만의 전용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훨씬 좋았다.
비록 방이 크진 않았지만, 이제 회사에 나와도 다른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겼으니 말이다.
“두 분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한 배우님보다는 약간 많아요.”
“그러니까 얼마나요?”
“아무리 잘생긴 한 배우님이어도, 여자 나이를 대놓고 물어보시면......”
“알았습니다. 그럼 앞으로 두 분께는, 제가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정말이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미정 씨, 지민 씨 그렇게 할까요? 그리고 누나들도 말 편하게 하세요. 진수 이놈에게도 그렇게 하시고요.”
그냥 간단하게 호칭 정리를 끝냈다.
어차피 진수나 나보다는 서너 살은 많은 것처럼 보였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길게는 몇 년을 함께 지내야 할 사람들이니, 최소한의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서로 편하게 지내는 것이 여러모로 좋은 것이다.
“그런데 로드 뛸 친구가 있다면서?”
“너도 아는 애야.”
“나도 안다고? 누구?”
“미선이.”
“뭐? 정미선?”
“응. 왜 미선이 걔는 싫어?”
“내가 남자인데 여자를 로드로 쓰면 좀 그렇지 않나?”
“걔 운전도 잘하고 성격도 털털하니 좋잖아. 그런데 아이돌 쪽 로드를 2년 했었는데, 실장이 완전히 개새끼라더라. 그래서 지금 옮길 자리를 찾는 중이라고 하기도 하고.”
예전 내가 휴가를 나왔을 때, 진수가 소개팅을 시켜준다는 핑계로 만났다가 그 소개팅은 없었던 일이 되고, 이후에도 몇 차례 같이 만난 적이 있었던 친구다.
키는 좀 작기는 했지만 얼굴이 갸름하니 제법 귀여웠고, 당차기도 했다는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창피한 이야기지만 당시 내가 까였었다.
잘 생긴 놈은 얼굴값을 한다나 뭐라나 라고 하면서, 나는 자기 체질이 아니라고 대놓고 나를 깠던 것이다.
“걔가 한다고는 해?”
“아직 전화도 해보지 않았는데 하긴 뭘 해.”
“그럼 연락해봐. 하겠다고 하면 이참에 회식이나 하지.”
“콜!”
“누나들은 혹시 저녁에 약속이 있어요?”
“약속이 있어도 미뤄야지. 보스가 처음으로 회식하자는데 그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보스는 무슨.”
“그렇다고 강수야 그래? 아무튼 우리 팀의 메인이 강수 너잖아. 그러니 대충 넘어가자.”
원래부터 성격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내가 편하게 대해주니 그러는 것인지 몰라도, 미정이 누님과 지선이 누님 두 사람도 별 거리낌이 다가왔다.
“미선이 벌써 그만뒀다는데?”
“그럼 됐네. 약속은 했어?”
“응, 우리 동네로 오라고 했어.”
“하필이면 우리 동네야?”
“거기 식육식당 고기가 괜찮잖아. 거기서 고기를 사서 집에 가서 구워 먹자.”
하긴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집을 워낙 널찍하게 지어두신 덕분에, 거실에서 예쁜 정원을 내다보면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것도 제법 괜찮았다.
설거지야 어차피 가위바위보로 결정할 것이고, 가위바위보를 할 때면 진수는 항상 주먹을 내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으니, 내가 설거지를 할 일도 없고 말이다.
어차피 당분간 가족처럼 지내야 할 사람들이기에, 이번 기회에 집을 구경시키는 것도 괜찮을 일이다.
“야~ 정미선 오랜만이다.”
“으~응, 예. 한강수 배우님. 오랜만입니다.”
“뭐래. 갑자기 너 왜 그래?”
“제가 한강수 배우님의 로드매니저가 될 수 있다고 해서......”
“지랄! 그래 넌 앞으로 계속 한강수 배우님이라고 불러라.”
오랜만에 만난 미선인, 평소의 털털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예전과는 많이 다른 미선이의 행동에, 슬며시 장난이나 쳐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야, 그냥 평소대로 해. 여기 누나들도 서로 말 편하게 하기로 했거든.”
내가 미선일 놀리려던 계획은, 진수의 한 마디로 끌이 났다.
“여기가 보스 집이야? 도대체 이게 몇 평이야?”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직접 지으신 집입니다.”
“아버님이 어머님을 무척이나 사랑하시나 보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거야 서로 연애할 때나 적용되는 이야기지. 대부분 사람은 결혼하고 몇 년 지나면, 그때부터는 사랑이 아니라 정으로 산다잖아.”
그리 화려하진 않지만 널찍하면서도 오밀조밀한 맛이 있는 집은, 내가 가진 자랑거리 중 하나다.
우리 집을 찾아온 사람 중에서, 집에 대해 칭찬하지 않았던 사람은 내 기억에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돌아가신 아버지가 로맨티시스트였음은 확실한 사실이다.
진수가 함께 살기 전까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진수가 입주한 후에야 지수가 차지하게 된 2층은, 아버지가 오롯이 엄마를 위해 꾸민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진수가 주방에 달린 창고에서 불판을 꺼내고 누나들과 미선인 냉장고에서 채소들을 꺼내 씻고, 그렇게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띵~똥’
“누구지?”
벨 소리에 진수가 일어나서 인터폰을 확인했고, 인터폰으로 얼굴을 확인하고선 대문을 연다.
“누구야?”
“이 시간에 이 집 벨을 누를 사람이야 서 배우 말고 누가 있겠어요.”
“서 배우? 서예나 배우님 말이야?”
“예. 김 실장님하고 같이 오셨네요.”
“정말 우리 보스하고 서 배우님하고 사귀는 것이 맞아?”
그러는 사이에 현관문을 열고, 예나와 김 실장님이 들어왔다.
“서 배우님, 안녕하세요. 실장님도요.”
“안녕하세요.”
“두 사람이 한 배우님 팀에 배정된 거야?”
“예. 오늘 대표님께서......”
“그래 잘 됐다. 그런데 저분은?”
“첨 뵙겠습니다. 한강수 배우님 로드매니저로 채용된 정미선입니다.”
“그래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예나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말을 잘 섞지 않았기에, 예나가 할 말을 모두 김 실장님이 대신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렇게 여자 넷이서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예나는 살며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자기 팀이 꾸려졌다기에 축하해주려고 왔지. 진수 씨, 축하해요.”
예나는 진수에게 팀장으로 승진한 것에 대해 축하인사를 했다.
“야! 아까운 고기 다 타잖아!”
역시 미선인 전혀 바뀌지 않았다.
한창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떠들썩한 가운데 고기가 타는 냄새가 나자, 까마득한 직장 상사가 될 김 실장님과 또 로드매니저로서는 감히 제대로 눈을 맞추지도 못할, Top 급의 배우인 예나 앞에서 고함을 지를 수 있다니 말이다.
아무튼 미선인 남들이 앉든지 말든지 우선 불판으로 가서 탄 고기를 들어내고, 다시 고기를 불판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저 친구 하고 말 편하게 하기로 했어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굽니다.”
“그래요. 하지만 촬영장을 비롯한 외부활동을 할 때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죠?”
“조심할 수 있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빨리 앉으세요. 주인이 먼저 앉아야 손님도 앉을 수가 있죠.”
그렇게 다시 소고기 파티는 재개되었다.
“자기야, 마당에 있는 저 건물은 뭐하는 건물이야?”
“예전에 아버지가 작업실로 쓰시던 곳이야. 창고도 겸해서.”
“작업실이라고? 아버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데?”
“화가셨거든. 그다지 이름이 있는 유명화가는 아니셨지만.......”
“그럼 지수 방에 있는 그림도 아버님께서 그리신 그림이야?”
“응.”
“그럼 나도 작업실에 있는 그림을 좀 구경해도 돼?”
“작업실은 그냥 텅 비어 있어. 화구들하고 그림은 모두 창고에 넣어 뒀거든.”
예나가 본채와 약간 떨어져 있는 창고에 관심을 표시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엄마는 2층에서 피아노를 치셨고, 아버진 저 건물에서 그림을 그리시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두 분께서 일을 하시고, 나와 지수는 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던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는데.......
“그럼 2층은?”
“2층은 손님방이야.”
“손님방도 있어?”
“지금이야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예전에 부모님 살아계셨을 때는 부모님 제자들이 이따금 놀러 와 자고 가기도 했거든.”
“제자들? 부모님이 학교 선생님이셨어?”
“두 분 모두 대학에 재직하셨었어. 그러다 엄마가 세미나에 참석해야 해서, 아버지가 세미가 열리는 대구까지 모시고 가던 길에 사고가 난 거지.”
언젠가는 예나도 알게 될 일이었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서 내 개인사를 밝히게 되었다.
덕분에 흥겨워야 할 소고기 파티가, 조금은 숙연한 분위기로 변해버렸다.
“그럼 안 되겠구나.”
“뭐가?”
“자기에게 팀이 생겼다기에 아빠에게 얘기해서 저 건물을 수리해서 자기 팀 식구를 살게 하고, 자기에게 사용료를 내게 하려고 했었는데.”
“응? 갑자기 그건 왜?”
“그럼 내가 자기 집에서 살아도 말이 나올 일이 없잖아. 어차피 진수 씨도 함께 살고 있으니까 다른 언니들도 여기 같이 산다고 하면 이상하게 여길 사람도 없고.”
뜻밖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만큼 예나의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었다.
“요즘도 잠을 깊이 들지 못해?”
“어쩔 수 없잖아. 그래서 핑계거리만 있으면 오늘처럼 이렇게 오게 되잖아.”
“그럼 그러자. 그런데 먼저 누나들 생각부터 들어 봐야지.”
아버지 작업실과 창고를 손대지 않더라도 2층에 방이 세 개나 되니, 스타일리스트 누나와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누나가 집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 방이 필요하면, 아버지가 작업실로 사용하시던 그 공간을 이용해도 되고 말이다.
예나의 말에 팀을 꾸리게 된 일을 축하하는 자리가, 갑자기 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자리로 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