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지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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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제안하시는 바람에 대표님께 허락받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지금 시점에는 회사에서 일거리를 찾아줘야 할 시기가 맞지만, 나는 한 배우가 며칠이라도 좀 쉬게 한 후에 작품을 찾아줄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알아서 일거리를 잡아 왔는데 그게 무슨.......”
회사 연습실에서 예나와 대사를 맞춰보기로 약속하고 회사로 출근했다.
우선 대표님 방에 들러서, 어떻게 해서 출연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그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마마~ 이러시면......”
“장 위장!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겠네.
(장 위장은 갑작스럽게 안겨온 순정효황후를 어쩌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런 곤혹스러움 속에는 장 위장이 순정효황후에게 가지는 안타까움과 연민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만약 지금 이런 광경이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게 된다면, 황제 폐하에 대한 불경을 넘어 폐하를 능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두려움은 엿보이지 않는다.)
살포시 안긴 예나의 머리에선, 아주 기분 좋은 향이 나고 있었다.
“자기야, 나 매일 이렇게 자기를 안고 싶어.”
“응?”
대사를 맞추던 예나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마 촬영 때문에 내가 양산에서 보낸 두어 달의 시간 동안 예나의 감정이 더욱더 깊어진 결과일 것이고, 사실 나 역시도 양산에서 촬영하는 동안, 예전과는 달리 예나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 결혼해!”
“결혼?”
“응. 나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자길 안고 싶어. 아니 그냥 매일 자기하고만 있고 싶어.”
예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예담기획의 직원들이 듣게 되면, 완전히 뒤집힐 소리를 태연히 하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예나는 예담기획이 보유한 최고의 배우이자 캐시카우(Cash Cow)인 것이 분명한데, 그런 최고의 여배우가 결혼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파장이 어떻게 번질지 모르는 것이다.
“그 말이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알아?”
“응.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가 흔들릴 정도는 아닐 거야. 그리고 요즘 대중들 생각도 많이 변했잖아.”
“그렇지만 여배우가 결혼하게 되면, 인기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잖아.”
“약간 영향이 있긴 하겠지. 그런데 그 인기 때문에 내 행복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
분명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나의 의견에 순순히 동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약 내가 배우가 아니라 일반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예나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배우이고 또 전생에도 배우생활을 해봤었기에 배우란 족속들이, 얼마나 인기에 연연하는지는 나 스스로 경험했던 일이고, 갑자기 인기가 폭락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그 순간의 끔찍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나 말처럼 결혼을 발표하고 그 결과 인기가 폭락한다고 해도, 예나는 크게 타격을 받지 않을지도 모르고 예담기획 역시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담기획에 소속된 직원들은 한동안 불안해할 것이고, 만약 회사에 위기 상황이 닥치기라도 한다면 그 모든 원망이 나와 예나에게 쏟아지게 될 것이다.
“일단 그 문제는 지금 찍고 있는 ‘마지막 황후’ 촬영이 끝나고 다시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떨까?”
“알았어. 그때까지 고민을 해봐.”
“고민하고 말고 할 것까지는 없어. 나도 양산에서 생활하면서 너하고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으니까.”
“그럼 자기도 나하고 결혼할 생각이 있단 말이지?”
“그렇지만 지금 당장 결혼한다는 것은 고민해봐야지. 우리가 아무리 서로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줘선 안 되잖아. 그리고 대표님께 허락도 받아야 하고.”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데 그게 왜 남에게 피해가 돼?”
“네가 네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괜찮을 위치가 아니잖아. 우리 결혼으로 네 인기가 떨어지게, 되면 당장 회사에 손해가 가잖아. 그럼 자연적으로 직원들이 피해를 보게 될 거고.”
결혼이란 문제가 개인사이기는 하지만, 예나가 지금 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예나와 결혼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예나에게 분명히 밝혀야 할 것도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배우란 직업을 그만두고, 정치를 시작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예나가 그 이야기를 듣고, 또 정치인의 배우자에 대한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난 이후에도 예나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예나에게 청혼할 것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서로 좋아해서 사귄다는 것만으로는 이상을 꿈꿀 수 있는 노릇이지만, 결혼해서 함께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는 것은 현실이니 말이다.
“그런데 자기 어디서 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있어?”
“학교에서 교수님께 지도받은 것 말고는 없는데. 그리고 따로 연기를 배울만한 시간도 없었잖아.”
“그런데 왜 자기하고 같이 대사를 맞추다 보면, 자기가 마치 중견 배우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그야 나도 모르지. 자기 마음이 편해서 그런 것 아니야?”
대단한 감각이었다.
아니 그만큼 예나가 나이답지 않게, 연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아무튼 예나라고 하더라도 내가 전생에서 회귀했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으니, 예나의 질문에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내가 출연하기로 한 날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였지만 나는 예나의 등쌀에, 매일 새벽부터 예나의 로드매니저 아닌 로드매니저 역할을 해야 했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계속 예나의 차를 타고 다녔기에, 진수보고는 아예 집에서 쉬라고 했다.
그렇게 매일 촬영장을 오가면서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얼굴을 익혔고, 그렇게 새로운 촬영장의 분위기를 익혀가고 있었다.
[철릭의 사나이는 누구?]
[마지막 황후를 지키기 위해서, 온몸을 불사른 사나이]
[마지막 황후 예고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서예나 배우와 공개연애를 선언한 배우 한강수, 서예나 주연의 마지막 황후에 깜짝 등장!]
[한강수 배우, 검도를 비롯해서 도합 12단인 무술의 달인]
김 감독님께서 말씀하셨던 목요일 저녁 예고편이 나가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나와 관련된 기사가 연이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기사 대부분은, 예고편의 내 연기가 아닌 나와 예나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 12단 별것 아님. 1~2단씩만 따도 12단이고, 특히 태권도는 군대만 제대하면 무조건 단증을 줌.
⌞ 너 군대는 다녀왔니?
- 한강수 얘는 여자 하나 잘 물어서 졸지에 스타 등극일세.
- 어차피 저런 장면은 거의 대부분 대역배우를 쓰는 것이 일반적임. 저 장면도 대역 100%임!
⌞ 한강수 배우가 직접 연기한 장면입니다. 한강수 배우 액션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합니다.
⌞ 한강수 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댓글 달 시간이 있다면 대역배우 쓰실 생각을 말고
진짜 제대로 된 무술을 배우세요.
솔직히 호의적인 댓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마음이 쓰일 일도 없었다.
특별히 악성 댓글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설령 악성 댓글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댓글에 상처를 입을 수준은 이미 훌쩍 넘어선 것이다.
“얘들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리 난리야?”
“모르니까 저러고 살지. 알면 저러겠어?”
“모르면 가만히 있기라도 해야지.”
“신경 쓸 일도 아닌 거로 왜 이렇게 흥분하고 그래.”
“자긴 화도 나지 않아?”
“난 오히려 고마운데?”
“응? 뭐라고 했어?”
“고맙다고.”
이 고맙다는 말이, 솔직한 내 본심이었다.
댓글의 반응을 보고 예나가 화를 냈지만, 솔직히 무관심보다는 이렇게 욕이라도 해주는 것이 좋은 것이다.
물론 악플보다는 선플이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악플 또한 나에 관한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고, 언젠가 내 진가를 알게 된다면 저들 또한 내 팬으로 돌아설 수도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연예인에게 무관심만큼 견디기 힘들고 무서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생에서 무명배우 시절을 전전하면서, 그 무섭고도 서러운 ‘무관심’이란 경험을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겪어 봤었으니까.
“감독님, 한강숩니다. 고맙습니다.”
“아! 봤어요? 내 나름으로 신경을 써서 편집한다고 하긴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당연히 만족하지요. 너무 잘 찍어주시고 편집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기사에 댓글들이 조금 심해지는 것 같던데......”
“그만큼 감독님께서 편집을 잘해주신 덕분이지요.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현실감이 없을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그거야 한 배우가 워낙 액션 연기를 잘해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요.”
“아무튼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촬영이 끝나면 제가 한번 따로 모시겠습니다.”
잔뜩 열 받아 하는 예나를 달래고, 나는 바로 김형국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다.
사실 조금 전 방영된 예고편 장면은 카메오 출연 부탁을 받고 찍은 것이었기에, 내가 이번 ‘마지막 황후’ 드라마에 고정출연을 결정하기 전의 일이었고, 편집 또한 그 이전에 끝을 냈다고 들었다.
물론 예고편이라는 것이 다음 회에 대한 궁금증을 고조시켜서, 다음 회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기는 하다.
그리고 시청률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김형국 감독님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하다.
아무리 내가 연기한 그 장면이 제대로 찍혔다고 하더라도, 나란 존재는 아직 대중들에게는 연기력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별 볼 일 없는 신인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나오는 장면을, 과감하게 예고편으로 선택한 김형국 감독님께 고마운 것이다.
아무튼 이제 내가 ‘마지막 황후’에 고정 출연하기로 결정이 났으니, 이번 드라마로 대중들에게 나란 존재를 부각시킬 준비는 해야 했다.
“대사 아직 덜 외웠어?”
“대사가 몇 개나 된다고 이걸 못 외워.”
“그런데 뭐 한다고 대본을 계속 손에 쥐고 있어. 외울 것도 별로 없다면서.”
“내가 늦게 합류했으니 분위기는 제대로 파악하고 들어가야,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지.”
예나는 오랜만에 함께 있음에도 자기와 놀아주지도 않고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자 불만을 표시했지만, 나로서는 대사가 거의 없는 역할이었기에 오히려 대본을 보고 공부할 것이 더 많았다.
내 역할이 아예 카메오로 끝이 났다면 모를 일이겠지만, 고정 출연하기로 확정이 되었는데 존재감조차 없이 예나 옆에서 마냥 병풍 역할만 하고 끝을 낸다면, 그것은 오히려 내가 이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음만 못한 것이 될 것이고, 내 이력에도 나쁜 이미지를 남기게 될 것이다.
나에게 할당된 대사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대본에 적힌 지문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한 작가님이 무슨 의도로 이 장면을 그렸는지를 고민하고, 그 장면에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