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인연인가?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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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배우, 어서 와. 촬영으로 피곤했을 텐데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예담기획 사무실은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이곳저곳 사무실에는 제법 많은 직원들이 늦게까지 남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차는 뭐로 할래?”
“생수면 충분합니다.”
선 대표님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내 앞으로 밀었고, 자신은 마시고 있던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촬영장 분위기는 좀 어떤가?”
“제가 아직 잘 모르지만 무난한 편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래. 요즘 한 배우의 연기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잘하겠지. 그런데 오늘 일이 좀 있었다면서?”
“......”
“한 배우에게 뭐라고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닐세. 한 배우도 그리고 예나도 이미 알만한 나이니까.”
“그게......”
“혹시 현재 사귀는 여자가 있나?”
“없습니다.”
“그럼 됐네. 솔직히 자넬 이용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늘 김 실장에게 그 이야길 듣고 나는 오히려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네.”
“예.”
“그런데 내가 한 배우에게 하나 부탁을 해도 되겠나?”
“예. 말씀하십시오.”
“지켜주게. 그리고 정말 책임질 자신이 생기거든, 하루라도 빨리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나로선 좋은 일이고.”
이 아저씨가 진도를 빼도 너무 빨리 빼고 있었다.
도대체 나를 뭘 믿고, 그리고 나는 예나의 어떤 점을 믿고 결혼이란 것을 생각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신인 배우에 불과한 내가, 예나의 아버지이자 소속사 대표인 선 대표에게 대놓고 들이댈 수는 없었다.
“물론 내 말이 한 배우에게는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한 배우도 생각을 해보게. 우리 예나가 어디 모자라는 구석이 있는 아이도 아닌데, 한 배우에게 그렇게 갑자기 끌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심지어 지금 예나가 사는 곳도, 또 집에서도 지난번 그 일이 있었던 이후에는 잠조차 제대로 푹 자지도 못하던 예나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던 자네 집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양반 역시 김 실장님처럼, 천생연분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선 대표님의 그런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자칫하면 평생 남자라고는 모르고 혼자 외롭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딸이, 갑자기 나타난 나란 존재에게는 그동안의 행동과는 전혀 배치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최소한 딸의 미래가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자넨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일단 대한민국에서 Top을 찍고 싶습니다.”
“그래서 해외로 진출할 생각인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Top을 찍어서 대중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난 후에 정치를 해볼 생각입니다.”
“정치?”
“예. 그렇습니다.”
“연예계에서 정치판으로 간 사람들 중에서 뒤가 좋은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정당에서 얼굴마담으로 영입하는 그런 정치인이 아니라, 제 노력으로 당선이 되어 정당에 입당하는 그런 수순을 밟을 생각입니다.”
“......”
내 확신에 찬 말에 선 대표는,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냥 내가 자신의 삶과 크게 관계가 없는 소속사 대표와 배우의 관계라면 미래에 내가 무엇을 하든지 상관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현재의 상황을 볼 때는 자기 딸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당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결심을 굳힌 것인가?”
“예. 배우를 지망하게 된 이유도 결국 정치권 진입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정치를.......”
“.......”
이렇게 물어보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내 전생의 기억 때문에 정치를 제대로 해보려고 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땅히 다른 거짓말을 할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히 한 배우 자네라면 배우로서 성공할 수도 있고,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나처럼 배우를 키우는 회사를 경영할 수도 있을 텐데......”
“죄송합니다. 이미 결심한 지가 오래되기도 했고, 이 결심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내가 왈가왈부할 수가 없는 일이지. 그래 자신은 있고?”
“예. 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출마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제 아버지 고향이자 제 본적지인 양산에서 출마할 생각입니다.”
“양산보다는 자네를 잘 아는 서울이 훨씬 나은 것 아닌가?”
“아까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가 정치판에 입문할 시기는 지금이 아니라, 제가 배우로서 완벽한 입지를 구축해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Top 배우가 되었을 때라고 말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출마할 지역이, 서울이든 양산이든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구먼.”
선 대표의 속이 아주 답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선 대표가 뭐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아니 만약 나의 이 결정 때문에 예나와의 관계가 여기서 끝이 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의 내 결심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회귀가 결정되기 직전에 내가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정말 황당하게도 커피가 고파서였지만, 그런 내 개인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된 다른 이유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고,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정치판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완성시키는 것일 터였으니 말이다.
나는 회귀가 단순히 내 개인의 의지가 아닌 하늘의 뜻이 안배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네. 그런데 오늘도 예나가 자네 집에서 잘 것이라고?”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서 남녀가 서로 좋아서 사귀는 것을 가지고 부모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 아무튼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만 만들지 않는다면 괜찮을 걸세.”
그렇게 선 대표님과의 면담은 끝이 났다.
“이야기는 끝냈어?”
“먼저 집에 가서 쉬라니까.”
“배우가 바깥에서 활동하는데 매니저란 놈이 집구석에서 이불 속에서 뒹굴 거린다면, 그게 매니저로서 자격이나 있는 놈이야?”
“그래 너 잘났다.”
“맞아. 나만큼 잘난 놈이 있거든 나와 보라고 해.”
선 대표님의 방을 나오니, 집으로 먼저 출발한 줄 알았던 진수가 사무실 빈 책상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수 이놈도 하루 종일 대기를 하고, 또 서울까지 운전하느라 나보다도 더 피곤했을 텐데 말이다.
“자기 왔어?”
“그 옷은 또 뭐야?”
“아까 집에 잠시 들러서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왔거든.”
“갈아입을 옷?”
“응, 앞으로 자주 올 테니까 미리 갈아입을 옷은 갖다 놔야지. 앞으로 계속 지수 옷을 빌려 입을 수는 없잖아.”
“아예 월세를 내고 입주를 해라.”
“정말 그래도 돼? 얼마든지 낼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즐거워하는 예나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다.
인간관계란 것이 자꾸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보면 그 상대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서로 물이 드는 법인데, 예나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드러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이렇게 생활하다가 보면, 정말 나중에 후회하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안기게 될 수도 있다.
“김 실장님은?”
“2층에서 자고 있지.”
“그럼 넌 왜 아직 자지도 않고?”
“자기가 오면 라면 끓여달라고 해서 먹고 자려고.”
“밤에 라면 먹고 자면, 아침에 얼굴 퉁퉁 붓게 되는 것 몰라?”
“나 배가 고프단 말이야. 자기가 끓여주는 라면 먹고 싶어. 응~”
얼굴도 예쁜 놈이 저렇게 애교까지 부리고 있으니, 그걸 이겨낼 사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나 역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싱크대 쪽으로 갔다.
“아이고, 이걸 라면 물이라고 받아둔 거야?”
“응, 많이 모자라?”
“차라리 한강 물에 라면을 끓이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요리사가 될 수가 있는 라면을, 그냥 라면 봉지에 적힌 라면 끓이는 법만 읽더라도 물을 어느 정도 부어야 하는지 알 것인데, 예나는 겨우 라면 두 개를 끓여야 하는 냄비에 냄비가 찰랑찰랑할 정도로 물을 가득 담아 놓았다.
“힝~ 자긴 날 자꾸 미워만 해.”
“미워하긴 뭘 미워해. 그리고 김 실장님 내려오면 어쩌려고 또 이래?”
“치! 집안에선 괜찮다 뭐!”
내가 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냄비에서 물을 따라내고 파를 다듬고 있으니, 예나는 등 뒤에서 나를 가만히 안아 왔다.
도대체 정말 예나가 김 실장님이나 다른 사람들 말처럼, 나를 만나기 이전에는 다른 남자와 손조차 잡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스킨십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너 이렇게 나를 안아도 괜찮아?”
“응, 견딜 만해. 자꾸 가슴이 콩닥거리기도 하고, 자기하고 키스도 하고 싶고 또 부끄러운 것도 하고 싶단 생각이 들긴 하지만......”
“부끄러운 것?”
“치! 그런 걸 여자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면서 예나는 내 등에 머리를 대고서는, 내 허리를 감은 팔에 강하게 힘을 주고 있었다.
정말 예나와 나 사이가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천생연분, 그런 인연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예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가진 예나에 대한 감정은, 단순히 귀엽고 예쁘다는 그것 말고는 없었고, 어제부터 걸핏하면 예나가 내뱉는 키스를 하고 싶다는 그런 감정조차도 생기지 않으니,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 나도 뜨거운 육체를 가진 사내인지라 예나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는 별개로, 예나의 가슴이 내 등을 짓누르자 내 몸의 한 곳으로 피가 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조금 더 기다려야 해.”
그렇게 예나가 내 등을 안고 있는 사이에도 레인지 위에 올려놓은 냄비에서는 라면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고, 나는 면발이 조금 더 탱글탱글하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젓가락으로 라면 면발을 건져서 공기를 쐬고 있었다.
“진수 나오라고 해."
“알았어.”
드디어 라면이 완성되었고, 나는 그릇에 라면을 퍼면서 진수를 부르라고 했다.
예나가 진수를 부르러 간 사이에 라면 그릇을 식탁으로 옮기고, 냉장고에서는 김치를 그리고 밥솥에서는 밥을 퍼서 세 사람이 먹기 좋게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맛있다. 진수 씨도 맛있죠?”
“제가 예전에 그랬잖아요. 강수가 라면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잘 끓인다고요.”
“인마, 똑같은 라면인데 누가 끓인다고 그 맛이 달라져?”
“응. 나는 아무리 네가 하는 대로 해도 내가 끓인 라면이 맛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그렇게 우리 셋은 라면을 흡입했고,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배를 채웠다.
내일 아침이면 분명히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면서 후회를 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