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첫 키스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우리 한 배우 평소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르게 선수였네. 거기서 어떻게 그런 장면을 연기할 생각을 했어?”
“예?”
“입술로 눈물을 닦는 장면 말이야. 지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았잖아.”
“그게....... 그 순간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위로가 될 것이란 느낌이 들어서요.”
“콜! 아주 좋았어! 앞으로도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시도해봐.”
그러면서 장 감독님은 내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내 등을 팡팡 두드리신다.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내가 너무 오버했지?”
“오버는 무슨. 감독님 말씀이 장면 잘 나왔다더라.”
다음 신은 예나가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고 내가 예나 곁을 떠나는 아주 단순한 장면이었다.
“컷! 다시 갑시다! 한 배우, 아련한 감정도 좋지만 조금 더 담대한 느낌....... 무슨 뜻인지 알지?”
엉뚱하게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한 신에서 NG가 나왔다.
그리고 장수한 감독님이 내게 원하시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내 표정이 장 감독님의 디렉팅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 배우가 너무 감정이입이 심한 것 같아.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금 장면은 백제의 계백 장군이, 마지막 전장에 나가면서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결사항전의 각오로 나가는 거잖아. 그런데 지금 한 배우는, 결사항전의 자세보다는 가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진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사랑을 해보지도 못했던 내가 조금 전 예나의 오열 신을 보다가, 나 역시도 갑자기 사랑의 감정에 빠진 것인지 나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마른세수를 하고서, 손바닥으로 뺨을 강하게 두드린 후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컷! 오케이!”
“감독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한 배우도 고생했어. 2시간쯤 시간이 있으니 잠시 쉬다가 와.”
자그마치 다섯 번의 NG를 연발한 후에야, 오케이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오늘 촬영은 만구가 보스로 있는 내가 예전 속해 있었던 상두파와의 마지막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예나와 함께 우릴 붙잡는 상어파 애들과도 이별하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영화의 엔딩장면만 남았다.
이 신이 ‘네 안의 야수’에서 예나가 촬영해야 할 분량이 모두 끝난다.
“너 괜찮아?”
“응, 뭐가?”
“아까 장면은 NG를 낼만한 장면이 전혀 아니었잖아. 그리고 원래 표정 연기가 네 전공이기도 했고. 그런데 몇 차례나 NG를 내는 것을 보니, 혹시 네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해서.”
“아냐. 앞 장면에서 예나가 오열할 때, 내가 너무 휘둘렸던 모양이야. 그 잔상이 남아서.......”
“그런데 엔딩장면이 너하고 서 배우라면, 주인공이 뒤바뀐 것 아니야?”
“지훈이 형이 감옥에 가 있으니 그렇게 한 것뿐이지. 엔딩 장면 찍었다고 모두 주연이면 세상에 주연하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겠다.”
내가 예상치도 않았던 장면에서 NG를 연달아내자, 진수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저녁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어디 커피라도 마시러 가자.”
그렇게 나는 조수석에 올라탔고 진수는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커피숍으로 차를 몰았다.
북한강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조금 전 예나의 행동을 돌이켜봤다.
솔직히 예나는 어떤 상태인지 몰라도, 조금 전 예나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내가 많이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정말 지금 예나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조금은 거리를 두면서 예나를 지켜봐야 하는지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이야 예나가 의지할 대상이 없어 내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일 테지만, 언젠가 예나가 다른 세상 여자들처럼 편한 마음으로 남자들을 대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예나가 오늘의 결정을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 두려운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냐. 이게 내 커피지?”
“그래. 그런데 이런 곳은 너하고 나하고 올 것이 아니라 예나 씨랑 와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가? 그런데 네가 느끼기에 예나 감정이 진짜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야?”
“예나가 언젠가는 훌쩍 날아갈 것 같아서....... 아니 분명히 그럴 거야. 물론 당분간은 아니겠지만......”
“별걱정 다한다. 그냥 현재에 충실하면 돼.”
하긴 전생에서도 나만 따라다니느라 결혼조차 하지 않았던 놈이, 여자에 대해서 뭘 알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나 진수나, 전생에서의 삶이 참 팍팍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넌 연애 같은 것 안 해?”
“야! 솔직히 내가 집안이 좋기나 하냐? 아니면 너처럼 잘 생기기라도 했냐. 그렇다고 돈이나 많기나 해? 이런 날 좋다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
“그럼 평생 이렇게 나하고 둘이 살겠다고?”
“미쳤어! 네가 진짜 스타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그때는 나도 돈을 좀 만지겠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Top 배우인 한강수를 키운 매니저라고 하면, 그때는 나한테도 여자들이 들러붙지 않겠어?”
“지랄한다. 지금부터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들어대 봐!”
“됐네. 네가 남들이 다 인정하는 Top 배우로 우뚝 설 때까지는, 내 사전에 연애란 것은 없어.”
이런 마음을 가진 진수를 전생에서의 나란 놈은, 전혀 알려고도 고맙다는 사실조차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물론 나도 여자를 끼고 방탕한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와의 인연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살았던 나야 그렇다고 치지만, 진짜 내 생에서 유일하게 친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진수 몫의 삶까지 내가 모두 차지하고 살았었던 것이었다.
“미안하다.”
“뜬금없이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이야? 정말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냥 네게 많이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서.”
“미안한 줄 알면 빨리 성공해. 그래서 한방에 다 갚아! 강수 네가 나한테 진 빚을 다 갚는 방법은 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배우가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앞으론 그렇게 손가락 오그라드는 소리는 하지 말고.”
내가 배우로 성공해야 할, 아니 내 인생에서 꼭 성공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 것이다.
내 전생과 이생을 통해 정말 내 등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인 진수를 위해서라도, 나는 꼭 배우로서 성공하고, 앞으로 하게 될 정치인 한강수로도 꼭 성공해야 한다.
“어디 갔다 왔어?”
“응, 감독님께서 두 시간쯤 시간이 빈다고 하시기에 커피 마시러 밑에.”
“누구랑?”
“진수하고 갔지 누구랑 가.”
“치! 애인 놔두고 남자들끼리 가면 재미가 좋아?”
“김 실장님 걱정하실 거잖아?”
“언니가 왜 걱정을 해. 오히려 지금은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응?”
“언니가 심지어 나보고 마약을 한 것이 아니냐고 묻기까지 해.”
“마약? 무슨 그런 말을 해! 그런 말은 입에서 절대 꺼내서도 안 되는 말이란 것을 몰라?”
“내가 한 말이 아니라 김 실장 언니가 한 말이란 말이야.”
김 실장님으로서도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절대 입에조차 올려서는 안 되는 금기어 중의 하나인, 마약이란 단어까지 꺼냈을 정도라면 말이다.
하긴 데뷔 후 지금까지 그 어떤 남자와도 키스는커녕 손잡는 일조차 극히 꺼리던 예나가 먼저 나를 덮치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예나에 관해 사소한 것까지 잘 알고 있었던 김 실장님으로서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화는 내지 않으시고?”
“아니, 자기랑 키스를 할 때 기분이 어땠는지, 그리고 자기가 내 가슴을 만졌을 때는 소름 끼치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는지를 묻던데.”
“큼, 큼.”
“갑자기 자기 왜 그래? 목에 뭐라도 걸린 것 같아?”
“아니야. 그냥 갑자기 목이 건조한 것 같아서......”
예나의 말에 새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사실 나도 예나의 기습적인 키스에 순간적으로 놀랐고, 이어진 열정적인 키스에 나도 모르게 예나의 가슴을 주물러댔었는데, 그걸 예나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부끄러운데, 당사자인 예나는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문제는 그렇다고 치고 이제 마지막이네.”
“정말 시간 잘 간다. 그러고 보니 자기와 벌써 석 달이네.”
정말 석 달이란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하긴 새벽에 일어나 촬영현장으로 달려가고 새벽이나 되어야 집에 돌아와 뻗은 듯 잠에 빠지다 보니,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가자. 마지막은 멋있게 마무리해야지.”
“자긴 오늘 촬영 마치고 뭐할 거야?”
“하긴 뭐 해. 바로 집에 가야지.”
“그럼 내가 자기 집에 먼저 가 있으면 안 될까?”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지수 꼬드겨야 한다면서. 지술 꼬드기려면 내가 가서 지수 비위라도 맞춰 줘야지.”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치!”
지수를 꼬드겨 설득하려는 생각보다는, 오늘 또 집에 와서 놀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굳이 그걸 막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예나는 오늘 촬영을 마치면 다음 작품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휴식이 정해져 있었고, 우리 집에 오겠다는 그것은 어쩌면 생존에 대한 본능일 수도 있겠다 싶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잠을 편하게 자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또 없을 것이니 말이다.
“형님! 꼭 가셔야 합니까?”
“가지 않으면? 너흰 다르겠지만 나는 내 보스를 내 손으로 은퇴시켰어. 그런데 보스를 은퇴시킨 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내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좌에 오른 세조와 다를 것이 뭐가 있어?”
“하지만 만구 그 새....... 사람은 형님을 죽이려고까지 않았습니까?”
“그 양반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긴 싫다. 그리고 내가 떠나야 윤호 너도 애들하고 일하기 편할 거고.”
비록 만구 그 인간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만구 그 인간을 내손으로 은퇴시킨다면 그것은 반란이다.
또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이, 내가 상두파의 동생들과 마음을 맞춰서 만구 그 인간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간 적대시해왔던 조직인 상어파 애들과 함께 만구 그 인간을 제거하고 상두파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는 만구를 제거한 후에 나도 조직을 떠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예나를 의심하고 있는 상어파 애들로부터, 예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예나와 손을 잡고 윤호를 비롯한 상어파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석양을 향해 새로운 인생길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자긴 아직 많이 남았지?”
“아마도 한밤중은 되어야 촬영이 끝날 걸.”
“치....... 나 혼자 서울 가기 싫다.”
“안 가면 어쩌려고. 촬영 끝나고 바로 올라갈 테니, 가서 쉬고 있어. 심심하면 집에 가서 지수하고 놀든지.”
“그래도 돼?”
“어차피 그렇게 할 거잖아.”
그렇게 예나를 떠나보냈고 예나가 탄 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으니, 밤에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