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제 딸입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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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 자리에 기자라고는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특종이란 단어의 뜻과 특종이란 단어가 가지는 무게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랬기에 장기훈이라는 이름의 기자뿐 아니라 배우와 스태프 모두, 선 대표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것인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선 대표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배우, 잠시 이쪽으로 오시게나.”
잔뜩 기대에 부푼 사람들 앞에서, 선 대표가 나를 불러서 자기 가까이 오게 했다.
“며칠 전 여기 한강수 배우가 우리 예담기획과 계약하여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담기획은 한강수 배우가 가진바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간헐적으로 박수를 보내긴 했지만 대부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도 예상했던 것처럼 내가 예담기획 소속 배우가 된 것만으로, 그것을 특종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허~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저는 나름 우리 한강수 배우에게 숨겨진 가능성을 보고, 엄청난 보석을 발굴했다고 자평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한 배우의 배우로서 가능성이야 이미 이곳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선 대표가 모르고 있을 것도 아니잖나. 사람들 그만 놀리고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지그래.”
사람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내가 멋쩍어하자, 이런 나를 구제해주시려는지 장수한 감독께서 나서셨다.
“장 감독. 우리 서예나 배우가 이제 누구 후광을 입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넘어섰지?”
“당연한 말 아닌가? 대한민국 여배우 중에서도 Top이라 꼽히는 서 배우에게 누가 후광 운운하려고.”
“그럼 서예나 배우가 다른 회사로 이적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Top 배우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지. 그런데 정말 서 배우를 놔주려고?”
“그거야 본인 마음에 달린 거지 막는다고 막아질 일인가.”
“그럼 뭐 한다고 그런 소릴 해.”
중요한 발표를 할 것이라고 하시고서는 또다시 객쩍은 소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예나에 관한 말을 하시는 것을 보니 ‘혹시?’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거기 장기훈 기자라고 하셨소?”
“예. K 일보 연예부 장기훈입니다.”
“기자가 한 사람뿐인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이제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네요. 먼저 아비로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께 고맙다는 인사부터 드리겠습니다.”
정말 뜬금없는 소리였다.
물론 나야 전생의 기억 덕분에 지금 선 대표께서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은 방금 선 대표의 입에서 나온 ‘아비’란 단어에 혹시 내가 선 대표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고,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와 선 대표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여러분께서 제 말을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우리 한강수 배우도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만큼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요.”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참 대단하게도, 지금 선 대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인지 알고 있을 예나 또한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은 아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태프들과 배우들 또한 조금 전에 선 대표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벌써 몇 년째 부동의 Top 배우로서 자리매김하면서도 선 대표와 소속사 대표와 배우라는 관계 이외에는 전혀 접점이 없었던 예나가, 설마 선준호 대표의 딸일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아니 오히려 선 대표의 농담에,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제 말이 정말 믿기지 않는 모양입니다. 자세히 보세요. 한 배우보다 내가 나이가 조금 더 들긴 했지만 아직 배우 선준호가 죽진 않았습니다.”
“대표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조금 전에 ‘아비’로서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 혹시 한강수 배우가 선 대표님의 아드님이란 말씀이십니까?”
결국 참다못한 장기훈 기자가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선준호 대표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지, 잔뜩 긴장한 가운데 선 대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식의 앞길을 막는 길이 될 것이니, 아비로서는 해야 할 일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서예나 배우가 제 딸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 과연 이런 사실을 밝히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하고 고민을 했지만, 조금 전 장수한 감독의 말처럼, 서예나 배우가 더는 누구의 후광을 입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는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이제야 사실을 밝히게 된 것입니다.”
순간 정적이 돌았다.
이 자리에 함께한 그 누구도 예나가 선준호 대표의 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던 모양이었고, 심지어 선 대표의 지기인 장수한 감독님 역시 긴가민가했던 모양이었지만, 확신하지 못했던 사실에 놀란 표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예전에 그 꼬맹이가 예나 너였단 말이야?”
“예. 감독님. 죄송해요.”
예나의 입으로 선 대표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확인하신 장수한 감독님은 아예 허탈한 표정이었다.
“대표님, 그럼 지금까지 왜 서예나 배우가 대표님 딸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도 한때는 잘나간다는 소릴 들었던 배우입니다. 그런데 제 딸인 예나가 배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나가 오디션을 보러 갔다면 심사위원들이 공평하게 예나의 연기를 심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심사위원들이 공정하게 연기를 평가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오디션에 참가했던 다른 배우지망생들이 그 오디션 결과를 놓고 공정한 심사를 받았다고 인정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보통 대부분 사람은 그런 부모찬스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오디션에서는 부모찬스 대신에 소속사찬스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오디션에서 소속사의 지원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형기획사와 계약을 한 상태라는 것은 일단 그 친구의 능력을 일차적으로 검증받았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요?”
질문은 기자가 아닌 이 자리에 참석한 배우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그럼 부모찬스를 쓰는 배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저희 같은 조 단역들은 텔레비전에 얼굴 한번 비추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인데요.”
“그 점에 관해서는 저 또한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든 가수든 자기가 가진 실력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흐름을 굳이 막을 생각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어차피 텔레비전에 얼굴 한번 비추는 것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확 달라진다고 생각하질 않거든요. 아무리 부모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식을 밀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도 여러분과 같은 배우입니다. 연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배우가 오래가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배우는 연기로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존재이니, 연기가 바탕이 되지 않는 인기는 모래성일 뿐입니다.”
“하지만......”
선 대표의 설명에도 쉬이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선 대표의 그 말에 오히려 억울함이 생긴 것인지, 방금 질문했던 배우는 또다시 손을 들어서 말을 이어가려고 했다.
“연기 선배로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수많은 배우가 떴다가 스러지는 것을 목격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저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배우 중에서도 주변의 도움으로 반짝하고 떴다가, 단 한 편의 영화를 끝으로 더는 스크린에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된 친구도 많습니다. 소위 주변에서 밀어줌을 당한 배우가 지닌 한계지요.”
“......”
“그런데 그 배우였던 사람의 말년이 어떤지 아십니까?”
“......”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평생을 빛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조 단역으로 전전했던 배우들보다 훨씬 더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순간적으로 누렸던 과거의 영화(榮華)를 잊지 못하고, 딱 그 순간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탓이지요. 벌어들이는 수입은 전혀 없는데, 씀씀이는 한때 잘나가던 시절의 씀씀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사람의 결말이 어떨지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시면 답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실제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쌔고 쌨다는 것이 정답이다.
우연히 영화나 드라마에 발탁되어서 잠시 반짝인기를 누리든지, 아니면 주변 누군가의 도움으로 캐스팅되고, 또 그 주변 누군가의 도움으로 한동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긴 했지만, 결국 연기력의 부족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게 되는 그런 사람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선 대표의 지적처럼 예전 한때 잘나갔다던 그 시절의 꿈에서 깨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데 필요한 자기를 치장하는 비용과 분수에 맞지 않는 씀씀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게 되고, 그것이 한계에 달하면 결국 지키지도 못할 약속으로 돈을 빌리면서 결국 사기꾼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반면 연기력은 있지만 외모나 다른 이유로 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지만,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찍게 되면 감독이나 제작사에서 꼭 찾게 되는 조 단역 또한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큰돈을 손에 쥐진 못해도 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갈 만큼의 수입은 가질 수가 있고, 나이가 들어서도 대중들에게 잊히지 않고 인정받는 배우들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장기훈 기자 대신에 조 단역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연달아 질문했고, 질문을 선도해야 할 장기훈 기자는 오히려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선 대표에게 질문하고 선 대표가 답하는 그것을, 노트북에 옮기기에 바쁜 희한한 광경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럼 서예나 배우가 따님이란 사실을 하필이면 지금 공개하신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오전에 예나와 한강수 배우가 사귄다는 사실을 기자회견을 통해서 공개한 바가 있습니다. 그 말은 이제 제 딸인 예나가 아비인 제 품을 벗어나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 선준호의 딸 선예나가 아니라 배우 서예나로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 말입니다.”
“그럼 대표님께서는 서예나 배우와 한강수 배우가 사귄다는 것에 반대하시지 않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예나가 한 배우와 친구를 하자고 했다고 하던 날, 예나가 저를 따로 찾아왔습니다. 한강수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하고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는 말이었지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나에 관해 알고 계시는 분들이라면 저처럼 깜짝 놀랄 일이지요. 예전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예나는 그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그 어떤 남자와도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이 없었고, 심지어 여럿이 모이는 모임조차 가능한 한 피해왔습니다. 그런 예나였기에 그 말에 놀랍기도 했고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반가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선 대표의 말소리에는 처연함이 느껴졌다.
정말 예나와 선 대표에게는, 길을 걷다가 음주 운전 차에 부딪혀 상처를 입고 지금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린다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가 어쩌면 영원할 것이라는, 그런 불안함 역시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란 존재의 등장은, 예나 뿐 아니라 선 대표에게도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