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공개연애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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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연예인이라고 하더라도, 요즘 시대에 미혼인 남녀배우가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사귄다는 것을 두고 시비를 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서로 좋아서 사귄다는 것과는 별개로 결혼도 하지 않은 남녀가 한집에서 지낸다는 것은,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것은 또 다른 문제다.
특히 여자인 예나로서는 지금 상황이 조금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예나로서는 생존의 문제인 잠을 제대로 자기 위해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데, 기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봐주지 않고 마치 육체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예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 한밤중에라도 언제든지 우리 집을 찾아오라고 큰소리를 쳤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나에 국한된 사정이었고, 연예계와 무관한 내 동생 지수의 사생활 보호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심각한 피해를 주는 그런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급한 대로 여동생의 동의를 얻은 후, 기자들이 의심을 해소할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예나가 우리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것을 시인한 것으로 기자회견은 끝이 났다.
여배우 그것도 소위 국민여배우라고 불리는 여배우가, 아직은 별 볼일 없는 신인 남배우의 집에서 함께 거주한다는 그것 이상의 자극적인 기사제목이 어디 있겠는가?
기자들은 예나의 그 말이 끝나자 썰물처럼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고, 일부 기자들은 그 뒤의 말은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모니터에 얼굴을 처박고 자판을 두드리기에 바빴다.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봐.”
“괜찮아. 방법을 찾아봐야지.”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해?”
“그럼 네 말대로 기자들에게 집을 오픈해야지.”
“지수가 문제니까 걱정이지. 그렇게 되면 지수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잖아.”
“기다려 봐. 내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하지만 이미 생각해둔 방법은 있었다.
물론 내가 창작한 아이디어는 아니고 이따금 방송사에서 시도해서 재미를 보곤 하는, 관찰 예능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기자들의 취재 욕구를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다.
기자회견은 끝났지만 그걸로 오늘 일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예나와 저녁에 다시 만나서 의논하기로 하고, 나는 서둘러 ‘네 안의 야수’ 촬영장으로 향했다.
“이왕 터트리려면 우리 영화가 개봉하기 직전에 터트리지 그랬어.”
“죄송합니다. 당분간 비밀로 하려고 했었는데, 연애 패치 기자가 눈치를 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담기획 선 대표님께서, 엉뚱한 말이 나오기 전에 밝히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셔서요.”
“선 대표가 공개연애를 이야기했다고?”
“예. 선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반이 뭔 일이래? 서 배우가 예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가볍지도 않을 텐데. 아무튼 잘해봐. 내가 보기엔 우리 한 배우도 괜찮은 사람이지만, 예나 역시도 아주 괜찮은 아가씨거든.”
“고맙습니다.”
장수한 감독님은 기꺼운 표정이셨다.
어쩌면 나는 모르는 장 감독님과 예나 사이의 그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감독님께 인사를 드리고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는데, 예나와 사귀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빠질 수가 없었다.
기자회견이 진행되던 시간부터 이미 실시간검색이 1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예나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실검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떻게 된 일이야? 예나가 촬영장에서는 그나마 덜한 편인데, 바깥에서는 아예 남자를 만나지도 않는 그런 애인데.”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짜고짜 친구로 지내자고 하기에, 처음에는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웠었거든요.”
“그럼 기사에 나온 것처럼 예나가 먼저 사귀자고 했었다는 말이야?”
“예. 솔직히 예나 자존심 때문에 제가 먼저 사귀자고 고백했다고 하려니, 예나가 제 말을 가로막고 자기가 먼저 했다고 밝히는 통에.......”
“역시 우리 예나가 대단하긴 대단해. 아무튼 예나 눈에 눈물 흐르게 하지 마. 만약 그렇게 하면 길가다가 변사체 되는 건 순간이다.”
따로 국민 여동생, 국민 여배우가 아니었다.
조 단역 배우들뿐 아니라 스태프들 대부분도 내가 예나와 사귀기로 했다는 사실에 축하의 인사를 건넸고, 함께 영화를 찍는 지훈 형 또한 예나와 계속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의 말을 보내면서도,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촬영장에서의 하루는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 촬영도 없는데 뭐하려고 왔어?”
“신고식은 해야지.”
“무슨 신고식?”
“이제 너하고 내가 사귀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없잖아. 그러니 촬영장 식구들에겐 신고식을 해야지.”
촬영이 마무리될 즈음에 예나가 촬영장을 찾아왔다.
사실 오늘과 내일 예나의 촬영 분량이 없었기에, 그것까지 고려하여 오늘 기자회견을 열었던 것이다.
아무튼 예나는 우리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에 대한 신고식을 하려고 왔다는 말을 남기고 감독님께로 다가갔다.
“감독님 오늘 스케줄 없으시죠?”
“촬영이 끝났으니 당연하지.”
“그럼 오늘 회식하러 가요.”
“회식?”
“촬영장 식구들에게 신고식은 해야죠. 오늘 제가 고기 쏠게요.”
“그래? 오늘 오랜만에 우리 서 배우가 사는 고기 맛을 볼 수가 있겠네. 그런데 오늘 숫자가 만만찮은데 감당이 가능하겠어?”
“에이~ 제가 누구예요. 서예나라고요. 다른 누구도 아닌 서예나!”
“그래 맞다. 대한민국 최고의 Top 배우 서예나지. 가자!”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선 대표와 예나 사이에서 느껴지던 모습보다, 이 둘의 모습이 훨씬 더 부녀지간처럼 느껴진다.
촬영장의 식구들에게 고기를 먹이려면 그 비용이 만만찮다.
조 단역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숫자를 더하면 최소 100명은 훌쩍 넘어가니, 삼겹살로 배를 채우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 돈만 해도 몇 백은 잡아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통큰 모습 덕분에 국민 여배우란 소리를 듣는지도 모른다.
장수한 감독님이나 제작사의 진행 PD로서는 제작비를 세이브 할 수 있어서 좋고, 조 단역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오랜만에 고기로 목구멍 때를 벗길 수 있어 좋을 일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즐거운 분위기에서 회식을 끝내고 나면, 최소 며칠 동안은 촬영장 분위기가 아주 활기차게 돌아가게 될 것이니,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도 했다.
“여긴 안 돼.”
“왜요?”
“여기 소고기집이잖아. 여기서 저 많은 숫자를 먹이려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래?”
“감독님 은근히 새가슴이시다.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안 돼. 이렇게까지 부담을 지울 수는 없어.”
“이미 예약을 해서 세팅까지 끝내 놓았거든요. 내일 기사제목에 ‘서예나 노쇼’라고 장식하는 것을 보시고 싶으세요?”
솔직히 나도 부담이 되었다.
그리고 굳이 예나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사실 대표님께서 쏘시는 거야.”
“응?”
“조금 있으면 대표님께서 오실 거야.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우리 예담기획 소속 배우라는 사실도 공개하실 생각이시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고기 회식은 너무 과한 것 아니야?”
“자기가 앞으로 일을 열심히 해서,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다 주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예담기획에 그만한 돈을 벌어다 줄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를 일이다.
물론 내가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나로서는 내 미래에 관해서 충분히 자신만만해 하고 있지만, 그런 나의 전생을 알지 못하고 있는 예나나 예나의 아버지이자 예담기획의 대표인 선 대표로서는 무모한 기대다.
“자~ 강수 씨, 이리 와서 내 잔도 한잔 받아요.”
“고맙습니다.”
“고맙긴. 강수 씨 덕분에 오랜만에 이렇게 고기도 먹게 되는데.”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나가 사는 건데요.”
“강수 씨 덕분이 맞아. 사실 서 배우는 영화를 찍으면 꼭 이렇게 한두 번은 고기로 회식을 시켜주거든. 서 배우만큼 스태프들 사정을 고려해주는 배우도 드문 법인데......”
이러니 예나에 대한 평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예나의 이런 모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전생의 내가 빠트리고 지냈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감독님이나 작가님을 챙기는 것은 회사가 대신했었고, 나는 그 자리에 얼굴을 비치고 생색이나 내는 것으로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배우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전생의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조 단역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
“어! 선 대표께서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오늘 우리 예나가 한턱낸다고 해서, 저도 숟가락이나 얹으려고 왔습니다.”
“에이~ 악덕 사장님이시네. 배우가 한턱낸다고 하면 원래 소속사 대표가 와서 카드를 ‘쓰~윽’ 대신 긁어주고 가셔야 하는 법인데.”
“그런가요? 그런데 우리 서 배우가 워낙 잘나가는 통에 저보다 훨씬 부자거든요.”
“우리 대표님 또 엄살을 부리신다. 예담기획의 선 대표께서 그렇게 엄살을 부리시면 남들이 욕해요.”
그렇게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예담기획의 선준호 대표가 등장했다.
비록 지금은 은퇴해서 배우전문의 연예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한때는 시대를 풍미했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의 대배우로서 대접받았던 양반이었기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우르르 일어서 선 대표를 맞이했다.
“그런데 정말 웬일로 여기까지 온 거야?”
“웬일은 무슨 웬일. 그냥 오늘 회식이 있다고 하니 숟가락이나 얹어서 한 끼 해결할 생각이었지.”
“지랄한다. 내가 당신을 몰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점잖게 높임말을 사용하더니, 감독님과 서 대표 사이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확 바뀐다.
그리고 두 분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예전부터 가깝게 지냈던 분들이셨던 것은 확실했다.
물론 그냥 이 바닥이 좁아서 서로 알고 지내는 그 정도의 친분을 훨씬 넘어선, 배우와 감독이 아닌 남자 대 남자로서의 친구, 그런 분위기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폭탄선언을 하나 해도 될까?”
“어떤?”
“고기 체하지 않게 모두 배를 채우고 난 후에 할 생각인데.”
“다 먹었으니 이야기해봐.”
“다 먹은 것은 당신뿐이고. 당신 닦달질에 온종일 시달리는 스태프들이 다 먹어야지.”
“닦달을 무슨. 나만큼 스태프를 편하게 해주는 감독 나오라고 해봐. 도대체 무슨 얘긴데?”
장 감독님은 선 대표님의 말에 잔뜩 호기심이 동하는 것인지, 선 대표를 재촉하고 있었다.
“혹시 이 자리에 기자님 계세요?”
“예. 선 대표님. K 일보 연예부 장기훈 기잡니다.”
“그래요? 장 기자님 운세가 오늘 확실한 특종을 잡을 운세였던 모양입니다.”
사실 아까 기자들이 몇이 촬영장 주변에 있었다.
그런데 예나가 촬영장에 도착해서도 별 특별한 것이 없었고, 촬영이 마무리될 즈음에 예나가 회식을 쏜다고 선언하자 챙길 것은 모두 챙겼다는 생각에 대부분 철수한 것이다.
그런데 선 준호 대표의 입에서 나온 ‘특종’이란 낱말이 의미심장했다.
예나 말대로 단순히 내가 예담기획과 계약했다는 것은, 배우로서의 내 위치를 고려하면 절대 특종이 될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