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전생의 기억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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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오케이!”
드디어 장수한 감독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러자 진수가 달려와서 내게 마른 모포를 씌웠고, 나는 진수가 손에 이끌려 현장을 벗어났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자.”
조 단역배우를 위한 탈의실이 마련되어 있는 현장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고,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세트장 바깥의 외벽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았고, 거기서 진수가 모포로 앞을 가리자 그 뒤에서 옷을 전부 벗고 젖은 몸을 닦은 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좀 괜찮아?”
“이 정도로 뭘 그래? 예전 혹한기 훈련받을 때를 생각하면 천국이지.”
솔직히 괜찮지는 않았다.
아무리 옷 안쪽에 핫 팩을 주렁주렁 매달아 두었다고 하지만, 흙탕물 위를 뒹구느라 온몸이 푹 젖었기에, 핫 팩도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찬바람까지 맞고 있었으니, 괜찮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튼 나는 추위를 떨쳐내기 위해서 몸을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땀이 나기 직전의 상태까지 몸을 움직이고 나니, 그때서야 조금 살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제작사 이 양반들 너무 심한 것 아니야?”
“심할 게 뭐가 있어.”
“오늘처럼 이렇게 진흙탕에 뒹군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거잖아. 그럼 최소한 젖은 옷을 갈아입을 공간은 마련해줘야 하는 것 아니야?”
“지랄! 누가 조연에 불과한 배우에게 탈의실까지 마련해 주겠냐. 꿈 깨!”
“하지만.......”
“혹시라도 지나가는 소리라도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마. 만약 그 소리가 새나가서 제작사 직원 귀에 들리기라도 하면 당장 방 빼란 소리가 나올 테니까.”
나라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영화 촬영현장에서 조 단역배우가 제작사나 감독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 땅을 파고 무덤으로 들어가 눕겠다는 선언이다.
어차피 말 많은 인간을 대체할 조 단역배우들이야 쌔고 쌨다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영화촬영 도중이어서 대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말이 바깥으로 새나가게 되면 다음 작품을 잡는 것에도 지장을 주게 될 것이 분명하니, 말 한마디 하는 것에도 조심해야 한다.
“몸은 괜찮아?”
“패딩 걸쳤잖아. 젖은 옷을 갈아입고 나니 이젠 좀 살 만해.”
“어디서 갈아입었어. 내 차에서 갈아입으라고 하려고 찾으니 보이질 않는다고 하던데.”
“저쪽에 햇볕 잘 드는 곳이 있어서......”
예나야 그렇게 말했겠지만 예나 매니저는 전혀 생각이 다를 것이다.
마른 옷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여배우 밴에서 갈아입는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촬영은 끝이 났지?”
“응. 예정대로면 나는 끝이야.”
“그럼 가자. 가다가 뜨끈한 국물이 있는 것으로 배를 채우면 훨씬 속이 훈훈해질 거야.”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나는 진수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나왔다.
내 상태를 알고 있는 진수는 히터 온도를 잔뜩 올린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차 안에 들어가니 차 내부가 후끈거리는 느낌이다.
“가다가 국밥이나 먹고 가자고 하네.”
“알았어. 먼저 출발하라고 해. 뒤따라간다고.”
그렇게 촬영장 인근의 음식점에서 동태 탕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랜 후, 우리는 다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오늘 네 집에 가면 놀러 가면 안 돼? 강수 네가 끓여준 라면 먹고 싶은데.”
“예나 너는 내일 오전에 촬영 있잖아. 오늘은 많이 늦어서 그렇고, 촬영이 없거나 오후에 있는 날 와. 그때 맛있게 끓여줄 테니까.”
“치! 나는 오늘 라면 먹고 싶은데.”
“금방 밥 먹고 왔잖아.”
라면 때문에 우리 집에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야, 나도 알고 예나도 알고 있는 일이다.
나야 아직 얼굴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나는 이미 Top 배우 반열에 올라 있는 배우이니, 기자들뿐 아니라 일반인의 눈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나가 우리 집을 들락거린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그 파장이 어떨 것이라는 것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집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 들어갔지만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금방 젖은 옷을 갈아입기도 했고 오는 길에 뜨거운 동태 탕으로 속을 다스렸기에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자리에 눕자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강수야, 괜찮아?”
“으~응, 괜찮아.”
“일단 힘들더라도 일어나 봐. 병원부터 가보자.”
촬영이 없다면 그냥 억지로 버티면 곧 괜찮아질 몸이었지만, 촬영 중인 지금은 내 몸이되 내 몸이 아닌 것이다.
그랬기에 옷으로 온몸을 친친 감다 시피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주사를 맞고 처방한 약을 드신 후 한 이틀 푹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예. 고맙습니다.”
그렇게 병원 문을 나섰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틀을 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지 않으면 어째? 여기가 학교도 아닌데 하루 짼다고 할까?”
주사를 맞은 덕분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과 오한은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몸 컨디션이 정상은 아니었다.
손끝 하나 꼼짝하기 싫고 몸도 축축 늘어지는 기분이지만, 그렇다고 촬영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촬영장까지 가는 도중에 시트에 완전히 파묻다시피 하고 잠을 잔 덕분인지, 촬영장에 도착해서는 그나마 컨디션이 조금은 회복된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응, 왔어. 몸은 괜찮아?”
“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독님도 속으론 걱정하셨던 모양인지, 내가 씩씩한 모습으로 현장에 얼굴을 들이밀자 내심 반가운 표정이셨다.
사실 오늘 내 촬영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냥 침대에 누워서 윤호를 비롯한 상어파 애들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 계획을 잡는 것이었으니, 크게 힘들 일도 없었다.
“밀양이나 양산 쪽으로 가자.”
“밀양은 동네가 너무 작지 않습니까? 그런데 양산도 부산 쪽 애들하고 부딪칠 수 있고요.”
“내가 알기로 부산 쪽 애들이 양산까지 넘어올 일은 거의 없어. 온천장 쪽 애들이야 자기네들 땅을 지키기도 급급하고, 온천장을 넘어서는 딱히 조직이라고 할 만한 애들도 없다고 알고 있거든.”
“형님은 부산 쪽 조직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순간 내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양산이란 지역이 이번 영화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전생에 내 지역구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컷! NG! 한 배우 컨디션이 좋지 않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던 것인지 장수한 감독님께서 NG를 외쳤고, 나는 우선 감독님과 스태프 그리고 다른 배우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다시 갑니다. 레디~ 액션!”
조감독의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나는 다시 대사를 치기 시작했고, 윤호가 내 대사를 맞받았다.
그렇게 ‘네 안의 야수’는 특별한 사고 없이 무난하게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 공부를 더 해볼까?”
“공부? 대학원에 가려고?”
“아니, 학부 공부를 더 해볼까 싶어.”
“그게 무슨 말이야? 연출이라도 하려고?”
“아니, 정치외교학과에 편입해볼까 싶어서.”
“뜬금없이 정치외교학과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진수에게 슬며시 내 속마음을 내비쳤더니, 진수는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긴 연예관련학과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이야기였겠지만, 연예계와는 아무 관련도 는 정치외교학과라고 하니, 진수 귀에는 내 이야기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까 촬영하면서 양산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순간부터,나는 가능한 한 빨리 정치에 입문해야 한다는 압박감 비슷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계에 발을 들이밀더라도 전생에서처럼 배우라는 간판으로 정계에 입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전공한 배우출신의 정치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최소한 노회한 정치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가 꿈꾸는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렇게 해야만 전생에서처럼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럼 배우 활동은 어떻게 하고?”
“배우생활이야 계속해야지. 그냥 우리나라 연예계에 정치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배우가 없잖아. 그래서 갑자기 든 생각이지만, 정치를 공부해서 제대로 된 정치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해서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핑계야 그럴싸했다.
하지만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면, 정말 영양가라고는 1도 없는 헛소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 관련한 드라마나 영화는 거의 금기시 되어 있다는 것이 현실이고, 설령 그 금기를 과감히 파괴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한다고 해봤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촬영이 계속 있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준비를 해보든지. 공부해놓으면 언젠가는 쓸 데가 있겠지.”
진수가 원래 이런 친구였다.
특별히 내가 잘못된 길을 간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가능한 내가 원하는 것은 막지 않으려는 친구, 그러면서도 내가 힘들어하면 조용히 옆을 지키면서 말없이 나를 응원하는 그런 친구가 바로 진수란 친구였다.
진수의 동의를 얻었으니 이제 시간 여유를 두고 차분히 대학편입을 준비하면 될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다른 수험생들처럼 기숙학원에 등록해서 학원 수강을 할 형편은 아니었다.
우선 틈나는 대로 인터넷에서 대학편입에 관한 내용을 조사하고, 그렇게 정리된 자료들을 가지고 내 실력으로 편입이 가능한 학교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 배우. 감기몸살을 앓았다면서?”
“이제 깔끔하게 나았습니다.”
“그래 보이긴 하네. 그런데 촬영하면서 흙탕물 속을 뒹군 탓에, 그리되었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
“어차피 영화를 찍다가 보면 꼭 필요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이 제 담당이었고요.”
“하지만 그런 신(scene)이 있었다면 최소한 제작사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 정도의 준비는 해둬야지.”
“대표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 문제는 잘 마무리되기도 했고, 또 만약 그 문제로 컴플레인(complain)을 걸게 된다면 제작사에서는 아예 배우를 교체하려고 했을 겁니다.”
“아무튼 이놈의 나라 영화판은 세월이 흘러도 변할 줄을 몰라. 배우 아까운 줄도 모르는.......”
예나나 예나 매니저가 보고한 모양인지 선 대표가 사무실로 나를 불렀고, 그 자리에서 선 대표는 지난번 촬영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주연도 아닌 조연에 불과한 내가 그 정도 일에 컴플레인을 건다는 것은, 아예 영화판에서 숟가락을 놓을 생각이 아니라면 미친 짓이다.
현실이 아무리 개떡 같다고 하더라고 그 조직에서 버텨내야만 나중을 기약할 수 있는 법이지, 당장 내게 불이익이 있다고 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가리려고 한다면, 그 시비가 가려지기도 전에 내가 먼저 그 조직에서 축출되고 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