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오늘부터 1일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결국 두 여자의 고함에 나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고, 내가 포기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예나는 거침없이 밴의 문을 열었다.
밴이 열리자 순간 ‘와!’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고, 예나의 매니저와 함께 밴을 에워싼 여고생들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던 진수가 예나의 양옆에서 예나를 보호했다.
“오빤 그냥 가만히 있어.”
“저러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어.”
“오빠가 내리면 더 난리가 나. 진짜 둘이 사귄다는 생각에 쟤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지수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지수가 나도 연예인으로 인정해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기대가 깨지기에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지수가 나보고 내리지 말라고 한 것은, 아이들이 나에게도 몰려들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예나와 내가 사귄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굳어지게 되고, 그런 상황이 된다면 아이들의 흥분이 훨씬 더 강해져서 통제가 힘들 것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자~ 조용! 조용히 하지 않으면 나 그냥 갈 거야.”
“언니! 예뻐요.”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나도 내가 예쁜 것 알아. 사인 필요해서 온 거지?”
“예! 그런데 정말 예뻐요.”
“그럼 차례로 줄을 서. 아니면 서로 밀치다가 넘어져 다칠 수가 있으니까. 알았지?”
“예!”
예나의 말이 끝이 나자, 아이들은 서둘러 줄을 맞춰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해서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던 아이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뭐 받칠 것 없을까?”
“그러네. 그런데 차에는 뭐 마땅한 것이 없는데 어쩌지?”
“그럼 됐어요. 뒷문 좀 열어 줘요.”
그러자 매니저는 버튼으로 뒷문을 열었고, 예나는 발판에 퍼질러 앉아서 사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오빠, 교실에 가서 책상을 하나 가지고 올까?”
“가지고 나와도 선생님들이 뭐라고 안 하셔?”
“쓰고 도로 제 자리에 갖다 두면 되지.”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 문을 열고, 진수에게 다가갔다.
“교실에 가서 책상 하나만 얻어 와줘.”
“책상?”
“응, 쓰고 제 자리에만 갖다놓으면 별일 없을 거라는데.”
그렇게 진수에게 책상을 갖다달라고 부탁하자, 진수는 줄 뒤에 서 있는 여학생 하나와 잠시 이야기 하더니 그 여학생과 함께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정말 한강수 오빠랑 사귀는 거 맞으세요?”
“응,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어. 너희 학교에 있는 누구 때문에.”
“누구요?”
“강수가 절대 나하고 사귀는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는 그 친구 때문에.”
“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이름이....... 아, 이름이 민경이네.”
“예. 김민경이에요. 아람 여자고등학교 1학년이고요.”
“민경이 너, 내가 누군지 알지?”
“당연히 알죠. 서예나 언니잖아요. 국민 여배우 서예나.”
“그런 내가 한강수에게 까였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니죠. 절대 그럴 수는 없죠.”
“그니까······. 국민 여배우, 대한민국 남성들의 이상형인 내가 까여서는 안 되겠지?”
“맞아요. 언니가 까이는 것은 절대 안 되죠.”
“그러니까 일단은 무조건 사귀어야 하는 거야. 나중에 내가 까면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Top 여배우와, 여고 1학년생의 대화 수준이 마치 초등학교 학생 수준 같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둘의 말장난에, 주변에 서 있는 여고생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는 도중에 여학생과 함께 학교로 들어갔던 진수가 책상과 의자를 가지고 왔고, 예나는 그곳에 앉아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고생 많았어.”
“어깨나 좀 두드려 봐.”
“언니, 내가 두드려 줄게요.”
“아냐, 이런 건 서방이 두드려주는 거야.”
“서예나, 애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야.”
“요즘 고딩들 알 건 다 알거든. 그런데 배가 무지 고프다. 어디 밥 먹을 만한 곳이 있을까?”
배가 고프다고 했지만, 우리 동네에 예나를 데리고 갈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설령 그런 곳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예나가 나타나면 또다시 소란이 일어날 테니, 그것만은 극구 사양하고 싶었다.
“시내로 나가자. 내가 밥 살게.”
“그건 귀찮아. 그냥 간단하게 먹을 게 없나? 라면이나 그런 거.”
“언니, 우리 집에 라면 많아요. 종류별로 다 있을 걸요.”
“그래? 그런데 지수라고 했지? 지수가 지금 오빠 대신에 나한테 작업 거는 거야?”
지수가 엉뚱한 말을 하는 통에, 예나가 예정에도 없는 우리 집 방문이 성립되었다.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예나의 매니저는 아예 체념한 것인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수가 먼저 출발했고 예나 매니저는 진수가 방향 지시등을 켤 때마다 진수 뒤를 따라가다가 보니, 어느새 우리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야? 집 엄청 예쁘네.”
대문 앞에 차가 도착하자 대문 앞에서 집을 올려다보던 예나가 집이 예쁘다면서 좋아했고, 그런 예나 옆에서 지수는 아빠가 엄마를 위해서 지은 집이라고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수가 예나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나는 예나의 매니저에게도 집으로 들어갈 것을 이야기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예나 씨를 집까지 데리고 왔어?”
“나도 모르겠다. 배고파서 라면 먹고 간다더라.”
“라면? 웬 개그야.”
“그러게. 그러니 넌 빨리 가서 라면이나 끓여.”
“라면은 네 주 종목이잖아.”
“인마, 오늘은 내가 배우잖아. 그러니 라면은 당연히 매니저가 끓여야지.”
“언제는 내가 끓인 라면이 맛이 없다면서.”
그렇게 진수와 티격태격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강수 네가 라면 죽여주게 끓인다면서?”
“뭐?”
“지수가 그러던데. 네가 끓인 라면이 분식집에서 파는 라면보다 훨씬 맛있다고.”
결국 라면 끓이는 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자그마치 다섯 명이 먹는 라면은 끓여본 적이 없었다.
결국 나는 냄비를 두 개 동원해서 각각의 냄비에 물을 붓고, 먼저 파를 깨끗하게 씻은 후에 파의 이파리 부분과 뿌리 부분을 반씩 크게 썰어서 냄비에 투하했다.
“파를 왜 먼저 넣어? 파는 금방 익는다고 하던데?”
“처음부터 파를 넣어야 파물이 우러나서 국물이 시원한 느낌을 주거든.”
내가 라면을 끓이는 법은 간단했다.
프라이팬 정도 두께의 냄비에다 물을 끓이면서 파의 뿌리 부분과 이파리 부분을 반씩 크게 썰어서 넣고, 물이 팔팔 끓으면 라면을 넣어 라면이 풀어지길 기다렸다가, 라면이 풀어지면 연신 들었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면을 공기와 접하게 만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그렇게 하니 라면의 면발이 훨씬 쫄깃한 느낌을 줬던 것이다.
그렇게 라면이 익게 되면 그때야 나는 스프를 풀고, 국물이 화르르 넘친 후에 달걀을 깨서 푼다.
그리고 달걀이 설핏 익을 즈음에 라면 면을 건져서 그릇에 담은 후, 그 위에 국물을 조심스레 붓는 것으로 라면 끓이는 일이 끝나는 것이다.
“한 배우님, 정말 라면 면발이 쫄깃하니 살아 있네요. 정말 맛있어요.”
“많이 드세요. 매니저님. 혹시 밥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요. 하필이면 오늘은 식은 밥이 없지만.”
라면에는 식은 밥이 최고다.
라면의 면을 대충 건져 먹고 그릇에 남은 국물에 식은 밥 한 덩이를 말아서 먹으면, 그것만한 꿀맛은 없는 법이다.
아무튼 예나의 매니저는 그동안 잔뜩 곤두섰던 감정이, 라면 한 그릇에 완전히 풀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예나는 마치 라면이란 것을 처음 먹어보는 아이처럼, 아예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면발을 빨아들이기에 바빴다.
“하아~ 정말 맛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배고픈 거야 한두 번이 아니잖아. 촬영하다가 보면 배가 고파서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랜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그런데 오늘 먹은 라면은, 진짜 내가 태어나서 먹어본 라면 중에서 제일 맛있었어.”
“라면 맛이 거기서 거기지.”
“아뇨. 한 배우님. 이 라면 정말 맛있어요. 국물도 정말 시원하고요.”
그러더니 예나의 매니저는, 예의상 던졌던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란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그릇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릇에 담긴 밥을 꾹꾹 말아서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해결하고 예나는 지수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고, 거실에는 예나의 매니저와 진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앉아 있었다.
“부모님들께서는 같이 안 사세요?”
“아, 저희 남매가 어릴 때 두 분이 모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미 오래 된 일인데요.”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분이서만 사셨어요?”
“예. 제가 군 복무를 할 당시에는, 여동생이 이 친구에게 신세를 졌고요.”
“두 분이 예전부터 엄청 친하셨나 봐요?”
그냥 보기에는 제법 까칠하게 여겨졌던 예나의 매니저가,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난 이후에는 제법 인간적인 면이 보이면서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예나 정도면 원래 매니저님 말고, 로드매니저와 스태프들이 따라다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다른 배우님이라면 그렇겠죠. 그런데 예나가 사람을 엄청 가리거든요.”
“그게 무슨?”
“예전에 예나를 서포터 하던 스태프들에게 제법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때 메이크업 담당자와 코디를 다른 팀으로 보내고 심지어 로드까지도 해고했어요. 그 이후로는 예나가 사람들에게 곁을 잘 주질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지금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질 않고요. 한 배우님께 지금 예나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몰라서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내용이었다.
오늘 예나의 밴에 올라타면서 느꼈던 이질감이, 바로 이것이었다.
사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라고 불리는 예나에게 로드매니저도 없었고, 여배우가 움직일 때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코디나 메이크업 담당자조차 없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었기에, 아예 자기를 서포터해줄 사람까지 거부하게 된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나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내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예나의 그런 모습이 더욱더 이해가 되지 않았고 말이다.
“매니저님, 이제 예나 데리고 돌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시간이 제법 많이 늦어서......”
“그래야겠네요. 제가 올라갔다가 와도 될까요?”
어느새 시곗바늘이 열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이곳이 촬영 현장이라면 별 대수로울 일이 없는 일이지만, 이곳이 여배우가 있기엔 구설에 오르기 딱 좋은 우리 집이란 것이 문제였다.
물론 나나 예나가 찍을 신(scene)은 내일 저녁이나 되어서야 촬영이 예정되어 있기에, 조금 늦잠을 잔다고 하더라도 크게 지장이 있을 것은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