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예나가 떴다. (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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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야, 저기 밴 저거.......”
“응?”
“아무래도 번호가 서 배우 밴 같은데?
“그 친구가 여길 왜 와?”
“아까 통화하면서 지수 마치는 시간을 물어봤다면서?”
지수 학교 앞에 도착해서 눈을 뜨니, 진수가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런데 진수가 가리킨 곳에 주차해 있는 밴을 보니, 진수 말대로 예나가 타고 다니는 밴처럼 보였다.
“여기 있어 봐. 내가 가서 확인해볼 테니까.”
“정말 예나 차인 것 같은데. 걔 미친 것 아니야?”
소위 말하는 연예인 밴, 그러니까 예나가 타고 다니는 최고급 밴인 S 밴이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흔하지도 않은 밴이, 여자고등학교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을 보니 황당하기까지 했다.
‘혹시 지금 너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내가 타고 온 차 바로 건너편에 있지.’
‘네가 여길 오면 어떻게 해?’
‘내가 내 발로 왔는데 그게 뭐 어때서?’
‘진짜 돌겠다. 이제 어쩌려고?’
‘여동생 마치고 나오거든, 데리고 내 차로 와.’
진짜 사람을 돌게 만든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했기로서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것도 오전에 지수 친구가 SNS에 올린 내용을 가지고 기사에까지 나온 상황에서, 이렇게 학교까지 찾아온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여기에 서 있다가 나중에 난리 나. 고등학생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잖아.”
“난리가 날 것이 뭐가 있어. 손목이야 좀 아프겠지만 정히 안 되면 사인을 해주면 되지.”
“매니저님, 빨리 서 배우 데리고 출발하세요. 학생들 곧 마칠 시간입니다.”
“대표님에게 허락받았거든. 내가 알라도 아니고 연애하는 문제를 가지고 간섭하시지 않기로 했어. 아니 우리 대표님은 이왕 말이 나왔으니 너하고 잘해보라더라.”
“진짜 난리다. 너 그러다가 정말 시집 못 간다. 여배우가 구설에 올라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결국 나는 문자 대신에 전화를 걸었고 혹시 옆에서 매니저가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매니저에게 빨리 데리고 가라는 소리까지 했다.
그런데 예나의 대답은 아예 내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부전자전’이 아니라 ‘부전여전’이었다.
예나는 내가 모르는 줄로 알고 있겠지만 지금 예나의 소속사인 ‘예담 기획’의 대표는, 예나의 부친인 선준호 배우가 대표로 있는 기획사이다.
물론 알려진 성이 다르긴 하지만, 예나는 선준호 배우의 친딸인 것은 확실했다.
후일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예나가 데뷔하면서 부친의 후광을 입지 않고 홀로 서겠다는 의지로, 예명을 짓는 대신 이름은 그대로 쓰고 성만 바꿔서 활동하였다는 이야기를, 전생에서 기사로 접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빨리 가. 여기 있다가 만약 기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는 추측이 아니라 아예 사실이라고 난리를 칠 테니까.”
“그렇게 난리를 친다고 달라질 것이라도 있어? 아니면 네가 손해를 볼 일이라도 생겨?”
“야! 나야 남자니까 문제가 될 것도 없지만, 넌 여배우잖아. 여배우가 남자 문제로 구설에 올라서 좋을 일이 뭐가 있다고.”
“여배우가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은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나도 모르게 언제 그런 법이 제정되기라도 했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차라리 사귄다면 깔끔하게 공개연애를 하면서 박수를 받을 수가 있지. 하지만 사귀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구설에 오르게 되면 억울하잖아.”
“그럼 우리 사귀자.”
“뭐?”
순간 내 머릿속에 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무슨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예나의 그 말에도 불구하고, 예나의 매니저는 아예 말릴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나 솔직히 널 처음 본 날부터 네가 좋았어. 아니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백마 탄 왕자가 날 찾아온 것 같은 느낌, 아무튼 그랬거든.”
“......”
“그래서 내가 대표님께 그날 바로 남자친구를 만들어도 되느냐고 물었고, 대표님은 나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셨거든. 그리고 조금 전에도 전화로 확실하게 대답을 들었었고. 그러니 네가 마음이 불편하면 아예 기자를 불러서, 우리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을 공개해도 돼.”
드라마를 찍다가 보면 감정이입이 잘 되는 배우들 같은 경우에는, 서로 사랑하는 배역인 배우들이 그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실제 사귀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이 경우는 그런 것도 아니고 소위 말해서 첫눈에 반했다는 것인데, 요즘 세상에서는 믿기지 않는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니?”
“내일 촬영이 끝나면 나하고 우리 회사에 같이 가야 해. 그래서 우리 대표님께 헤어지더라도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겠다는 약속은 해야 하거든.”
나는 아직 정신이 혼미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예나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버린다.
그렇게 반쯤 얼이 빠진 상태에서 멍하니 있는데, 야간자율학습을 마친 것인지 학생들이 교문 쪽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가자.”
“뭐?”
“여동생 찾아야지.”
“알았어. 찾아서 데리고 올게.”
“아니, 같이 나가.”
“너 정말 어쩌려고 그래?”
순간 내 입에서 ‘미쳤어?’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나 미친 것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차피 사귀기로 했는데 아이들이 뭐라고 한들 어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미적거리자 예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섰고, 예나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진수를 향해 손짓하면서 진수를 불렀다.
“강수 여동생 얼굴 알죠?”
“예. 당연히 알지요.”
“강수 여동생이 나오거든, 여기로 부르세요.”
“예?”
“강수 친구이자 매니저 맞으시죠?”
“예, 맞습니다.”
“저하고 강수하고 사귀기로 했으니까 그리 아세요.”
“예? 서 배우님, 방금 뭐라고?”
진수 역시도 예나의 말에 놀라서 뻥 찐 표정이 되었다.
아니 방금 예나가 한 말을 듣는다면, 백이면 백 모두가 진수와 같은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가, 재벌가의 셋째 아들도 그렇다고 장래가 보장된 판검사나 의사도 아닌, 이제 갓 데뷔한 미래가 불확실한 신인배우인 나와 사귀기로 했다고 한다면, 대부분 사람은 웬 미친 소린가 할 것이다.
“저기 지수....... 지수야!”
지수가 교문 앞으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조금 전 예나의 말 때문에 받았던 충격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진수 오빠. 그런데....... 어....... 서예나....... 오빠, 이 사람 서예나 맞지?”
“응, 맞아. 서예나 배우님이셔.”
“예나 언니가 어떻게 여길.......”
진수가 부르자 고개를 돌렸던 지수는, 예나 얼굴을 보고 지수도 정신이 반쯤 나간 표정이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려던 아이들이, 지수 입에서 나온 서예나라는 이름을 듣고 밴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니 아이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수 또래 아이들이 밴을 발견하게 되면, 그 밴 안에 어떤 연예인이 타고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질 나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선팅 때문에 내부를 전혀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밴 속을 들여다보려고 난리를 치는 판인데, 예나가 차 안도 아닌 떡하니 교문 앞에 서 있으니 아이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차에 타요.”
그렇게 지수는 떠밀리듯 밴에 올라탔고, 그렇게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내 얼굴은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말 시키지 마.”
“어떻게 된 일이냐고?”
“예나한테 물어봐.”
“예나? 오빠, 지금 예나 언니에게 말을 놓은 거야?”
“응, 나하고 오빠하고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어요.”
“예?”
예나가 아닌 다른 여자였으면, 지수 입에서는 ‘미친년 아니야?’란 소리가 튀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여배우인 예냐였기에, 아예 지금 상황이 믿기질 않아 마냥 놀라고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수가 놀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학교 앞에 연예인 밴이 떡하니 서 있는 통에 아이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는데, 지수가 예나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외친 탓에, 여고생들이 몰려들어 밴을 포위하듯 빽빽하게 둘러싼 것이다.
그리고 여고생들은 흘낏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밴을 손으로 잡은 채, 얼굴을 유리창에 바짝 붙여서 내부에 누가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려고 하고 있었다.
“매니저님,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좀......”
매니저는 조금 전까지는 내게 대해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이젠 아예 포기한 표정이었다.
“제가 잠시 좀 내릴게요.”
“한 배우님, 한 배우님이 내리게 되면 오히려 소란스러워집니다. 그냥 잠시 이대로 기다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제 매니저와 함께 길을 열겠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큰 도로 쪽으로 진행하세요.”
“그러시다가 오히려 위험해집니다. 그냥 가만히 계세요.”
매니저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배어있었다.
물론 지금 상황이 벌어진 것이 내 잘못만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나로 인해서 이 상황이 벌어진 것 또한 사실이었기에 난감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진수가, 밴 쪽으로 다가와서 학생들을 차에서 떼어내려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언니, 문 열어.”
“예나야.”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이었어. 그냥 사인 좀 해주고 가면 간단하잖아.”
“하지만 네가 나가게 되면......”
“아까 내가 얘기하지 않았어? 오늘부터 강수랑 사귀기로 했다는 거. 그런데 뭐가 걱정이야?”
“하지만 대표님께서......”
“대표님께서 허락하셨잖아. 단지 먼저 강수를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순서를 바꾸는 정도 가지고 무슨 큰일이라도 나겠어?”
그러는 가운데 예나는 스타일리스트에게 문을 열라고 했고, 스타일리스트는 그런 예나를 말리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가운데서 나 역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서예나라는 이 친구는 대한민국의 최고 Top 여배우가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이고, 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인지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아직 내가 예나와 사귀겠다고 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야! 서예나.”
“왜?”
“넌 남자친구를 사귈 때, 너 혼자 사귄다고 결정하면 사귀는 남자친구가 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너랑 사귀겠다고 했었어? 나는 아직 거기에 대해서 답을 해준 적이 없는데?”
“뭐? 그럼 나랑 사귀지 않겠단 말이야?”
“고민은 해봐야지. 안 그래?”
솔직히 그냥 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순간 쪽팔린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별 볼 일 없는 신인배우이고 예나야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아는 잘나가는 여배우라고 하지만, 남녀가 사귀는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안인데, 이런 문제에까지 코뚜레에 꿰인 소처럼 묵묵히 끌려가는 것은 영 아니란 생각이었다.
그러자 예나의 매니저뿐 아니라 예나 또한 이게 무슨 헛소리일까 하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야! 한강수!”
“오빠!”
하지만 그런 놀랍고 당황스러운 순간은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거의 동시라고 할 정도로 예나와 지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고함이, 내 고막을 찢을 듯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