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예나가 떴다.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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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이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차로 10분쯤 내려오면 북한강 주변에 있는 식당들이었고, 주연배우들은 주연배우들끼리 조 단역배우들은 조 단역배우들끼리, 자기네들 형편에 맞는 식당을 찾아들어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다.
“강수, 지금 어디야?”
“점심 먹으러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어디냐고?”
“백반 하는 집입니다.”
“그럼 이리로 넘어올래? 예나하고 같이 있는데.”
“여기 식구들이 좀 많아서요.”
“그래? 몇이나 되는데?”
“액션스쿨 식구들이 합류해서 열댓쯤 됩니다.”
“그럼 거기 주소를 좀 찍어.”
주소를 찍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내려오면서 몇 번째 집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되지만, 그래도 선배 배우였기에 문지훈 배우의 말대로 문자로 주소를 찍어 보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이 소란스럽더니, 문지훈 배우와 서예나 배우가 문을 밀고 들어선다.
“인마, 밥을 먹으러 가려면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해야지. 혼자 내빼는 경우가 어디 있어.”
“아까 보니 선배님께서 한창 촬영 중이신 것 같아서요.”
“또 선배, 언제 호칭을 고칠래?”
“오빠, 얘가 숫기가 없어서 그래. 나하고 친구 먹기로 약속해 놓고서도 걸핏하면 말 높이고 그런다.”
문지훈 선배와 예나가 도착하자, 나와 함께 앉아 있던 진수와 하수경 사범 그리고 액션스쿨 투(鬪) 소속의 대역 배우인 창수란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요. 그냥 우리가 테이블을 붙이면 되지.”
“그렇지만.......”
“언니, 뭐가 어때요. 이렇게 오랜만에 같이 점심도 먹게 되어서 난 좋은데.”
결국 진수와 창수가 옆 테이블을 우리 테이블에 붙여서 한 자리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예나야, 이것 봐.”
그렇게 밥을 기다리고 있는데, 서예나 배우의 매니저가 서 배우 앞으로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기사 재미있게 썼네.”
“어떻게 할까? 홍보팀에 연락해서 반박기사를 내라고 할까?”
“대표님은 뭐래?”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
“그냥 놔둬. 그리고 고등학교 애들 SNS 계정의 멘션을 가지고, 기사를 쓴 기자란 사람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게 되면.......”
“그럼 열애 중이라고 선포를 하지.”
“뭐?”
“어차피 내 나이가 연애를 해서 안 될 나이도 아닌데, 이렇게 연애를 해보는 것도 재미가 있잖아.”
“예나야!”
“언닌 내가 연애를 하거나 결혼한다고 내 인기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그거야.......”
“팬 카페에 들어가 봐. 진짜 내 팬들은 나보고 빨리 좋은 남자를 찾아서, 안정적인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난리들이야.”
또 예나에게 열애설이 터진 모양이었다.
예나의 매니저는 잔뜩 굳은 표정이었지만 예나는 전혀 그런 일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그런 분위기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응, 기사 제목이 끝내줘서.”
“기사 제목이 어땠기에?”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나 뭐라나.”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응, 어제 강수 얘하고 핑크빛 기류가 어쩌니 하는 지라시가 떴잖아. 그런데 오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강수 얘의 여동생이란 친구가, 강수는 절대 나하고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부인했다고 하네. 그런데 그 이야길 기자란 인간이 그대로 긁어댄 거지.”
여자고등학교라고 하니,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혹시 지수가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 아닐까 하고, 나도 서둘러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서 그 기사를 확인했다.
그리고 기사를 확인한 순간, 이 기사의 출처가 지수란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강수 너 표정이 왜 그래?”
“미안하다. 이 SNS 출처가 내 여동생인 것 같아.”
“응? 여동생이 있었어?”
“응. 학교 이니셜도 그렇고, 이 계정의 주인이란 아이 얼굴도, 내가 한 번쯤은 본 아이 같아. 정말 미안하다.”
“그게 왜 미안해? 그런데 정말 섭섭하네.”
“응?”
“여동생에게 손사래를 칠 정도로, 나한테는 정말 관심이 1도 없었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
“여기 얘가 써둔 내용을 봐. H 배우의 여동생인 자기 친구가, H 배우는 S 배우에게서 단 1도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쓰여 있잖아.”
“그건 강수 네가 잘못했네. 세상에 대한민국 전 국민들에게 한때는 국민 여동생이라고 불렸고, 지금은 대한민국 모든 남성들의 이상적인 배우자감 1위로 손꼽히는 예나를 보고, 여자로서의 감정이 1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야.”
“선배님, 그건.......”
“또 선배라고 부르지.”
심각해야 할 분위기를,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지금 상황을 개그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실 어젯밤에 지수의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이런 식의 ‘어그로’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막연히 생각했던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자, 지금의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지훈 형과 예나는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것처럼 나를 놀리는데 열심이었다.
“강수 너, 나하고 잘해보려고 일부러 동생에게 시킨 것은 아니지?”
“뭐?”
“나, 네가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눈이 높은 여자야. 이 정도로 내가 너하고 엮일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마.”
“도대체 무슨......”
예나의 말에 나는 아예 할 말을 잊었다.
도대체 예나가 무슨 마음으로 저렇게 이야길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느낌인지는 몰라도 예나가 지금 한 저 말이 완전한 농담이 아닌 어쩌면 저 말 속에, 예나의 다른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쳤지. 전생의 나라면 예나가 나에게 그런 감정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이란 생각으로 고개를 양옆으로 털었다.
정말 예나의 말대로라면, 아니 내가 ‘혹시나’하는 그 생각 자체가 미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배우 중에서 Top을 달리고 있는 예나가, 뭐가 아쉬워서 이제 갓 데뷔한 신인 배우인 나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가진다는 말인가?
지금 예나와 지훈이 형이 저러는 것은, 그냥 아직은 어수룩하게 보이는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있기에 그러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강수 네 여동생이 내 사인을 받아달라고는 하지 않았어? 나 같이 예쁜 여배우와 같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분명히 그런 부탁을 했을 텐데?”
“아! 맞다! 지훈이 형 사인을 좀 받아 달라고 했어요. 여동생 말로는 ‘짱! 좋아한다던데요.”
“그럼 나는?”
“네 이야기는 하지 않던데?”
“정말? 정말 내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지 않았단 말이야?”
“응.”
“그 말이 사실인지 내가 확인해 봐도 돼?”
“응. 원래 여자애들은 여배우보다는 잘생긴 남자배우를 좋아하잖아.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동생이라고는 여동생 하나밖에 없으니......”
지훈이 형 사인만 부탁하더라고 하니, 예나가 은근히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분명히 내가 지수에게 부탁을 받은 사인이라고는 지훈이 형의 사인뿐인데 말이다.
“네 동생 학교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몇 신데?”
“보통 야자 끝내고 오니까 11시쯤 되지.”
“그래? 알았어.”
어느덧 약속한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예나의 매니저는 조금 전의 기사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지, 그녀가 나를 보는 눈초리가 과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는가?
나는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눈인사를 한 후, 진수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문지훈 배우님이 너를 엄청나게 잘 본 모양이다.”
“데리고 놀기에 좋은 장난감이겠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 혹시 누가 듣기라도 하고, 그 말이 문지훈 배우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지랄, 여기에 너하고 나밖에 더 있어?”
“지금이야 차 안이니까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겠지만,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이야.”
“아이고, 매니저가 아니라 잔소리꾼이야.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처신해.”
진수가 하는 말이 결코 나쁜 말이 아니었다.
또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친구가, 내 매니저라는 것에 대해 고마웠다.
그리고 진수가 한 말, 문지훈 배우가 나를 좋게 본 것 같다는 그 말이, 내심 반갑기도 했다.
솔직히 문지훈 배우의 속마음을 몰라서, 항상 내 마음 한구석에는 이 양반이 나를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혹시 실컷 가지고 놀다가 아무 데나 처박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내가 걱정하는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하게 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상대의 호의를 호의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누군가 내게 호의를 베풀려고 해도 자꾸 그 사람의 호의가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맞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계속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그래, 한 배우도 고생 많았어요. 내일 봅시다.”
마침내 장수한 감독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조감독은 오늘 촬영이 모두 끝이 났음을 선언했다.
“고생했다.”
“그래, 오늘은 좀 빡세네.”
“오전엔 그 난리를 치고, 오후엔 계속 격투 장면이었잖아. 그러니 당연히 힘들었겠지. 누워서 좀 자.”
진수가 건네준 생수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긴 후, 나는 진수 말처럼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한 배우, 전화 왔어.”
“엉?”
진수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니, 옆자리에 올려둔 휴대전화가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귀찮은 마음에 받지 않으려다가 액정을 확인하니 ‘서예나’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한강숩니다.”
“지금 어디쯤이야?”
“응, 조금 전에 촬영이 끝나서 이제 중랑구 지나고 있는데.”
“여동생 데리러 갈 거야?”
“응, 촬영이 늦게 끝나는 날이 아니면 항상 데리러 갔으니까.”
“알았어.”
그러더니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예나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누군데?”
“서예나.”
“서 배우가 무슨 일로?”
“그러게. 나보고 지수 데리러 가는지 그걸 묻던데.”
“그리곤?”
“그냥 끊어 버렸어.”
“혹시.......”
“혹시 뭐?”
“아니다. 설마 그런 일까지 벌이겠어.”
진수는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잠에서 깬 나는 진수가 궁금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몸이 피곤했기에, 진수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