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장수한 감독의 선물(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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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의 야수’ 촬영은 정말 순조로웠다.
연기력뿐 아니라 티켓파워까지 담보한 문지훈 서예나 투톱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촬영장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고, 조연 중에서도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은 나 역시도 문지훈 배우와 붙을 때마다 불에다가 기름을 붓고 있었으니, 촬영장 분위기는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수 네 생각은 어때? 방금 장면은 한 번 더 가는 것이 좋지 않겠어?”
“그렇죠.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이 돌려차기 하던 이 부분에서, 제가 좀 몸을 사린 느낌이네요.”
“그렇지. 감독님 한 번만 더 가죠.”
“어차피 그 장면은 연습하는 장면 아닙니까. 연습하시면서 무슨 실전처럼 하신다고 그래요?”
“아니죠. 이 시점에 만구 형님이 강수에 대해서 의심을 품기 시작한 시점 아닙니까. 그러니 평소 대련 때와는 달리 당연히 의심하고 감정이 실린 일격을 날려야지요.”
“그렇지! 강수가 해석한 것이 정확하잖아. 수한이 형, 여긴 진짜 다시 한 번 가야 하는 장면이야.”
결국 나하고 지훈이 형의 강력한 요청으로, 조금 전의 대련 장면을 재촬영하기로 했다.
덕분에 감독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고 현장을 정리하려던 스태프들은, 현장을 조금 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액션!”
장수한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자 지훈이 형과 나는 다시 격렬하게 맞붙기 시작했고, 드디어 문제의 그 장면에 도달했다.
‘퍽!’
순간 나는 정신이 가물거린다는 느낌이었고, 내 다리가 절로 휘청거렸다.
그리고 시나리오에서와는 달리 살짝 부딪치는 것이 아닌, 얼굴에 제대로 강한 타격을 받았다.
‘퉤!’
맞으면서 입안이 찢어진 것인지 입안이 비릿해졌고, 나는 대본에도 없는 애드리브로 침을 내뱉었다.
“에이~ 시팔! 대련하면서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시팔? 야 이 새끼야. 지금 뭐라고 씨불였어?”
그리고 피를 본 것 때문에 흥분한 것처럼 쌍욕을 섞어서 항의하는 애드리브를 쳤고, 지훈 형 역시도 애드리브로 맞섰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아예 대본과는 무관하게 서로 개싸움을 벌이는 애드리브의 향연이 펼쳐졌고, 개싸움 끝에 지친 우리 둘은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채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이런 시발 놈아. 동생이라는 놈이 형을 이렇게 개패 듯 패는 놈이 세상 어디에 있냐?”
“좆 까는 소리 하지 마. 시작은 형이 먼저 했잖아. 나는 아까 맞은 곳에 어금니까지 흔들거리는구먼.”
“새끼야. 그건 우리가 늘 하던 대로 합대로 하던 수준이잖아.”
“됐어. 형이 뭣 때문인지 몰라도 요즘 나한테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지랄! 내가 너한테 감정을 가질 일이 뭐가 있다고.”
“정말 없어?”
“없지 그럼. 내가 계집도 아닌데 감정이 있으면 한판 붙으면 될 일을 꽁해 있을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 순간 만구 형이, 내 쪽으로 손을 내밀어 슬며시 내 손을 잡았다.
“에이~ 닭살 돋게 이게 뭔 짓이야.”
“지랄하네. 인마, 형이 동생 손도 마음대로 잡지 못해. 이제 일어나자. 네 형수 나올 시간 됐다.”
그렇게 우리 둘은 널브러졌던 땅바닥을 박차고 일어났고, 서로 등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형수인 예나의 모습이 보였다.
“컷! 오케이!”
“헐! 대박! 저게 전부 애드리브였어?”
드디어 장수한 감독님의 오케이 떨어졌고, 그때까지 조용히 침묵하던 스태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습니다. 형님.”
“빨리 의사에게 가보자.”
“입안이 약간 찢어진 것뿐입니다.”
“인마, 배우에겐 몸이 밥줄이야. 아무튼 미안하다. 순간적으로 나도 너무 몰입해서.”
“에이~ 괜찮다니까요.”
그렇게 지훈이 형과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장수한 감독님뿐 아니라 서예나 선배가 우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한 배우 괜찮아?”
“별일 아닙니다. 그냥 입안이 살짝 찢어진 모양입니다.
“빨리 의사 선생에게 가보자.”
“아이고 괜찮다니까요.”
어차피 피부도 아니고 입안이 살짝 찢어진 것이어서, 병원에 간다고 해봐야 따로 치료할 일도 없다.
그냥 몇 시간쯤 그대로 놔두면 알아서 아물 텐데 지훈 형과 장 감독님은 호들갑이었고, 서예나 선배는 내가 무슨 큰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 애매한 상황입니다. 물론 당장 급하다면 꿰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상처라면 몇 시간이면 자연스럽게 아물거든요.”
이번 ‘네 안의 야수’가 액션 신(scene)이 많은 촬영 현장이었던 덕분에, 제작사에서는 갑자기 발생하는 사고에 대비해서 아예 의사를 한 사람 수배해서 촬영 현장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고에 대비하게 했기에, 나는 한 감독님과 지훈이 형 등쌀에 의사 선생에게 끌려가서 입안의 상처를 보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의사 선생은 꿰매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럽게 아물게 하는 것이 낫겠다는 진단을 내렸다.
“오빤, 어떻게 적당히 할 줄을 몰라.”
“그건 강수 쟤 때문이야. 저놈하고 연기하면 마치 현실처럼 느껴진다니까. 그러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잔뜩 감정이 이입되어서......”
“강수야, 괜찮아. 입술이 이렇게 부르터서 어떻게 해?”
그러면서 서예나 선배는 마치 내 누나라도 된 것처럼, 얼음 팩을 내 볼에 가져다 댄다.
“지훈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애드리브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해?”
“왜? 버려야 할 것 같아?”
“그 죽여주는 장면을 버리긴 왜 버려? 나중에 영화가 스크린에 걸리면 오늘 이 장면은 두고두고 관객들 입에서 오르내릴 거다. 내지르는 너나 받아치는 한 배우나 정말 대단했다.”
“형, 내지른 것은 내가 아니라 강수 얘였어. 나는 강수 얘가 내지르는 것을 받아줬을 뿐이고. 형이 지난번에 기자들에게 선포했던 것처럼, 강수 이놈 확실히 보통은 넘어. 아니 그 훨씬 이상이야.”
지훈이 형 말에 장수한 감독과 서예나 배우는, 아예 얼어붙은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지훈이 형 주먹에 얻어맞아 입안이 찢어진 그것에 대한 보답 훨씬 이상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명배우를 넘어 이 시대의 대배우라는 소리까지 듣는 문지훈 배우로서는, 조금 전의 애드리브야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애드리브의 시작이 지훈이 형이 아닌 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문지훈이라는 배우가 한강수를 배우로서 인정했다는 그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 배우, 지금 상태로 계속 찍을 수 있겠어?”
“예. 전 괜찮습니다.”
“그럼 잠시만 쉬었다가 다음 장면은 바로 가지.”
“감독님, 얘 입술이나 좀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입술이 이렇게 퉁퉁 부었는데 어떻게 계속 작업을 해요?”
“선배님 괜찮습니다. 저 충분히 찍을 수 있습니다.”
“아냐. 강수 넌 좀 쉬어야 해. 드라마도 아닌 영화인데 괜히 무리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너만 손해야.”
장수한 감독님이 계속 진행하자고 나서자 서예나 선배가 쌍심지를 켰지만, 나로서는 지금 이 상태에서 계속 찍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다.
입안이 좀 얼얼하다고 촬영을 계속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고, 어차피 다음 신(scene) 몇 개는 입술이 부르튼 상태를 유지해야 했기에 분장으로 그걸 커버하기로 되어 있었다.
“선배님, 어차피 다음 장면이 입술이 부르튼 상태로 찍어야 할 장면이잖아요. 그러니 분장하고 찍는 것보다는 훨씬 실감이 날 테니, 그냥 찍는 것이 훨씬 그림이 잘 나올 겁니다.”
“정말 괜찮겠어? 아프지 않아?”
“에이~ 남자들은 이 정도로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서예나 선배는 연신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나를 말렸지만 나는 생수로 입안을 한번 헹궈냈고, 순간 따가운 기운에 살짝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급할 것도 없었지만 NG가 거의 없었기에,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오늘 투입된 스턴트 배우들 대부분이 액션스쿨 ‘투(鬪)’에서 나온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의 동작이야 대부분 한두 번 겪어본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마치 이곳이 액션스쿨인 느낌이었다.
“한 배우.”
“예. 감독님.”
“오늘하고 내일은 한 배우 휴대전화는 좀 꺼 둬. 급한 연락이 올 것이 있으면 미리 연락해서 다른 번호를 알려주든지 하고.”
“예?”
“그렇게만 알고 있어.”
내가 찍어야 할 분량의 촬영을 모두 마치고 현장을 나서는데, 장수한 감독님께서 나를 부르시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감독님께서 뭐라고 하셔?”
“오늘하고 내일은 휴대전화를 꺼두라고 하시던데.”
“왜?”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그냥 꺼두라고만 하셨어.”
“그런데 입안은 괜찮아?”
“그냥 약간 쓰린 느낌. 이 정도로 괜찮지 않을 이유는 없잖아. 오랜만에 소주로 입안 소독이나 하러 갈까?”
“지랄한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처럼 병원 실려 가려고?”
“그때는 정말 재수가 없었던 거고.”
“그냥 오늘은 상처 아물 때까지 얌전하게 살아. 이걸 얼굴에 대고 있어. 이젠 붓기는 빼야지.”
진수는 언제 준비한 것인지 내게 얼음 팩을 싼 수건을 건넸고, 나는 다소곳이 그걸 받아서 볼에 댔다.
“한 배우, 전화 왔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진수 말에 눈을 떠보니 벌써 서울에 진입해 있었고,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휴대전화에서는 연신 벨이 울리고 있었다.
“이거 모르는 번혼데?”
“그럼 받지 마.”
“왜?”
“아까 감독님이 오늘하고 내일은 전화를 받지 말라고 하셨다면서?”
“아. 맞네.”
전화를 받으려다가 진수의 말을 듣고 휴대전화를 엎었다.
그런데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고,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전화벨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톡 왔어.’
전화벨이 잠시 멈춘 사이에 톡 알림 소리가 들려서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서예나 선배로부터의 톡이었다.
‘강수 씨,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또다시 전화벨이 울렸고, 덕분에 한참 동안 톡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전화가 몰려와서 답을 늦게 드렸습니다.’
‘아, 혹시 다른 전화 없어요?’
‘010-0840-0608이요.’
‘내가 지금 전화를 할게요.’
무슨 이유인지 서예나 배우가 전화하겠다고 했기에 진수 번호를 불러줬고, 잠시 후 진수의 휴대전화의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예, 한강수 배우 매니저 김진수입니다.”
그러더니 진수가 내게 휴대전화를 넘긴다.
“예. 선배님.”
“정말 입안은 괜찮아요?”
“예. 정말 괜찮습니다.”
“그럼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방금 촬영이 끝이 나서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저녁 같이 먹어요. 내가 주소를 찍어줄 테니까 이리로 와요.”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때는 국민 여동생으로 불렸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다른 아역배우들과 달리 성인 연기자로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서예나 배우가, 아직 신인 티도 벗지 못한 내게 저녁을 같이하자고 먼저 연락을 해오다니.
솔직히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도대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