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2회 차 인생의 시작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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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안 일어나고 뭐 해? 오늘 오디션 있다면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시끄럽다는 생각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내 주변에서 일어났었던 일들을 돌이켜 봤다.
검은 슈트를 쫙 빼입고 내 앞에 나타났던 수호신이라는 양반,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던 하얀 빛의 기둥, 또 그 빛의 기둥을 피해서 도망을 치다가 마치 블랙홀과 같은 검은 동굴로 빨려 들어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제기랄! 커피 때문에 죽는 것을 거부했다니.’
남들이 알면 웃긴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황당한 것이, 내가 평온한 죽음을 거부하고 도망을 친 이유가 커피 때문이었기에 솔직히 쪽팔린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빠! 자꾸 게으름 피울 거야? 이번에도 또 늦어서 오디션조차 보지 못하게 되려는 거야?”
옆에서 앵앵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유일한 가족이자 하나뿐인 여동생인 지수였다.
“너, 학교는 가지 않고 뭐해?”
“오늘 토요일이거든. 자꾸 게으름 피우면 물을 확 부어버린다!"
“알았어. 일어날 테니 그만 소리 질러. 골이 다 흔들린다.”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니 그러지. 어젯밤에 진수 오빠가 업고 들어온 것 기억조차 나지 않지?”
지수의 말에 대충 오늘이 언제쯤인지 기억이 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차례 오디션을 봤다가 탈락하고, 그 때문에 내가 연기자로서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방황하면서, 친구 진수와 함께 매일같이 술에 절어서 살면서 방황했던 그때였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오디션에 참가해봐야 결과는 역시 탈락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몰라도, 오디션 탈락 후 한참이 지난 후에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고, 원래 내가 지원했던 배역이 아닌 대사가 몇 줄이나마 있는 단역으로 처음 이 판에 얼굴을 내민 그런 드라마이기도 했다.
물론 그래 봐야 크게 임팩트가 있는 역할도 아니었고, 또 후일 내 필모그래피에 그저 그렇고 그런 한 줄을 차지했을 뿐인 드라마였기에, 그냥 오늘 오디션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주연을 맡았던 김수지 배우와 연관된 사건으로, 한 배우의 소속사인 한라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계약한 한라 엔터테인먼트가 내 배우 인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었으니,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인지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빠, 진수 오빠 도착했어.”
“알았어. 들어와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
“치! 자기가 진짜 배우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진수 오빠가 아직 오빠 매니저 아니거든.”
“알았다니까 그만 까불어. 나 속이 울렁거린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울렁거리는 속부터 해결하기 위해, 응급처방으로 손가락을 입안에 집어넣고 변기에 얼굴을 처박은 상태로 속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속에 든 것을 올라오자 나는 그에 따른 고통으로,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리고 순간 예전에 읽었던 무협소설의 한 장면이 생각나면서, 순간적으로 ‘제길, 이럴 때 내공이란 것이 있었더라면 내공으로 술기운을 다 날려버렸을 텐데.’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속은 좀 괜찮아?”
“응, 왔어. 미안하다.”
“미안한 줄 알면 빨리 준비해. 우리 같은 초짜가 오디션에 지각해서는 안 되잖아.”
대충 머리를 감고 세수를 마치고 나오니, 진수가 거실에서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런 진수에게 인사를 건넨 후 나는 방으로 들어가 옷장에서 하얀 면으로 된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입고, 대충 머리까지 손질을 마친 후에 방을 나섰다.
“그냥 오늘 오디션은 가지 말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디션이 네가 보고 싶다고, 그때마다 나오는 자리도 아니잖아.”
“어차피 될지 안 될지도 모르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가자. 그래서 빨리 네가 데뷔를 해서 나도 네 매니저 노릇 좀 하자.”
원래 진수의 꿈이 원래부터 매니저였는지, 아니면 나 때문에 매니저를 꿈꾸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가 배우를 하겠다고 하자, 진수는 그때부터 내가 배우가 되면 내 매니저를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고 살아왔고, 내가 방송연예학과를 지원하자 진수는 매니지먼트학과를 지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야 아직 데뷔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진수는 이미 매니저로서 해야 할 것들을 하고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진수는, 내 SNS 계정을 자기가 운영하면서 내 일상의 모습들을 하나씩 찍어 올리기 시작했고, 대학졸업 후에는 내 필모그래피를 만들어 기획사에 뿌리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오디션을 받으러 가는 이것 역시도, 진수가 그렇게 수도 없이 뿌린 명함과 필모그래피를 보고 연락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오디션이 열리는 경원 프로덕션에 도착하자, 진수는 트렁크에서 카트를 꺼내서 카트 위에 음료수 상자를 올렸다.
그리고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인사하면서 음료수 캔을 건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인배우 한강수 매니저 김진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단편 영화 이외에는 필모그래피에 올릴 만한 제대로 된 드라마나 영화 한 편도 찍지 않은 내가, 졸지에 배우 지망생이 아닌 신인배우가 된 것이다.
진수의 인사는 끝이 없었다.
오디션 관계자들에게뿐 아니라 오늘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온 각 기획사의 매니저들에게까지, 음료수 캔을 돌리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다.
“대본은 다 외웠어?”
“응. 외우긴 다 외웠는데 아무래도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어느 부분에서?”
“여기 이 부분 말이야. 지문이 뭘 이야기하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도통 내가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으니.......”
“응? 우리 한 배우 그동안 엄청 열심히 연습했나 보네?”
진수의 말에 순간 나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사실 예전 이곳에 와서 오디션을 봤을 때는, 감정이니 뭐니 하는 것에는 아예 고민조차 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방금 내가 한 말은, 내 전생(前生)의 기억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래도 전생(前生)에는, 내가 소위 말하는 ‘국민배우’라는 소리까지 듣고 살았던 배우였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대사를 맞춰줄까?”
“그래 줄래?”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내가 진수에게 대본을 넘기자, 진수는 뒷주머니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대본을 꺼냈다.
“나도 대본은 가지고 왔어. 대사는 다 외웠어?”
“응. 그러니 너보고 보라고 했지.”
아무튼 진수가 가지고 있는 대본이,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던 대본보다 훨씬 더 너덜거리는 느낌이다.
나야 전생(前生)에는 오디션 전에 그렇게 열심히 대본을 공부하지 않았었고, 이번 생(生)에 와서 대본을 본 것이라고는,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읽었던 것 이외에는 아예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본을 한번 읽자마자, 마치 그 대본을 수백 번이나 읽었던 것처럼 대본이 한눈에 들어왔고, 대사들 또한 눈에 쏙쏙 들이박혔다.
어차피 내가 받아든 번호표는 57번이었고 전생(前生)에도 내가 오디션을 치른 것은, 점심을 먹고 난 이후였기에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복도로 나가자.”
나는 진수와 함께 복도로 나갔고, 안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 거리에 있는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선객(先客)이 우르르 모여, 한창 열심히 담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갈까?”
결국 담배 연기 때문에 목이 갈 것을 걱정한 진수의 손에 끌려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고, 나는 화장실 쪽 복도 끝 창틀에 앉아서 대본을 펼쳐 들었다.
‘형님! 강진이 파 애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선 몸부터 피하시죠.’
‘여기서 내가 몸을 피하면 동생들은 어쩌고?’
‘제가 이곳에서 저 새끼들을 막겠습니다. 빨리 피하시죠. 형님만 건재하시면 우린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동생들을 다 잃을 판인데, 어떻게 조직을 재건할 수가 있어?’
‘제가 동생들 다치지 않게 챙기겠습니다. 형님, 형님께서 여기 계시면 오히려 저희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합니다. 빨리 피하세요!’
조직 간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었고, 나는 급습을 당한 조직인 상두파의 중간보스 역할이었다.
그렇게 진수와 내가 서로 대사를 치면서 연습하고 있으니, 화장실을 찾아온 사람들은 별 지랄을 다 한다는 표정으로 우릴 힐끗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수와 나는 꿋꿋하게 대사를 쳐가면서, 대본에 쓰인 지문의 감정을 캐치하기 위해서 계속 똑같은 대사를 반복했고, 그 덕분인지 조금씩 뉘앙스가 달라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인배우 한강수 매니저입니다.”
“어~ 그래 고마워. 잘 마시겠네.”
한참 열심히 대사를 치던 진수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한 양반에게 캔을 건넸다.
그러자 그 양반은 피식 웃으며 캔을 받아 들고서, 휘적거리는 걸음으로 오디션이 열리는 방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저분은 아까 드리지 않았어?”
“아니야. 오늘 처음 뵙는 분이야. 그리고 설령 아까 드렸다고 하더라도 뭐 어때. 마트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거라서 원가로 따지면 얼마 되지도 않아.”
“영수증이나 줘.”
“영수증 같은 소릴 하네. 인마, 이게 다 내가 너한테 투자하는 거다. 나중에 ‘억!’ 소리가 날 정도로 뽕을 뽑아 먹을 테니까, 그때 배신하지나 마.”
“지랄한다. 배신은 무슨 얼어 죽을 배신.”
이러나저러나 진수의 사람 얼굴 기억하는 능력은 알아줄 만했다.
솔직히 나는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저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어떻게 처음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자~ 모두 점심식사를 하시고 오세요. 오후 오디션은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됩니다.”
내 번호가 오후에 오디션을 보는 것은 역시 변하지 않았다.
진수는 아직 조금 남아 있는 음료수가 실린 카트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나도 대본을 손에 쥔 채로 진수 뒤를 따라갔다.
“우리 삼겹살이나 먹을까?”
“오디션을 하는 날에 무슨 삼겹살이야. 괜히 나중에 속 부대끼면 고생하니까 점심은 그냥 죽으로 대신해.”
“오디션은 나 혼자서 보잖아. 그런데 너까지 배를 곯으면 어떻게 해?”
“한 배우님, 매니저와 배우는 일심동체란 사실을 이미 잊으셨사옵니까?”
“진짜 지랄이다. 우리가 무슨 부부라도 된 줄 알아?”
“원래 잘 나가는 배우는 와이프보다 매니저하고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 부부보다 더 가까운 사이지.”
결국 진수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는 건물 인근에 있는 죽을 파는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충 허기를 면할 정도의 양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오디션이 열리는 경원 프로덕션 사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