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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미발견 지역에서 꿀 빱니다-49화 (49/69)
  • 가장 조심해야 할 때(4)

    가장 조심해야 할 때(4)

    언젠가부터 탑을 내려와서 스마트폰을 켜면, 연락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내려와서도 할 일이 많다는 뜻이지.

    가장 먼저 처리한 건 식충 식물 성분 분리 건.

    안도원 지부장의 비서와 통화했다.

    ─테스트까지 끝났습니다. 완성된 물건은 댁으로 보내놨습니다.

    집에 도착해 확인해보자, 취급 주의 스티커가 붙은 특수 금속 재질의 박스가 도착해 있었다.

    【곤충 유도 물약】

    【데스 마우스의 성분을 추출해서 만든 곤충 유도용 물약입니다. Lv.60까지의 곤충 몬스터를 끌어들입니다.】

    【곤충 마비 물약】

    【데스 마우스의 성분을 추출해서 만든 곤충 마비용 물약입니다. Lv.60까지의 곤충 몬스터를 마비시킵니다.】

    각각 15병씩이었다.

    역시 98층에서 가져온 식충 식물에서 뽑아낸 성분이라 그런지, 레벨 50이 넘어가는 98층의 크레이지 호넷도 끌어들일 수 있는 효과가 있었다.

    이거라면 세 균열에서 나오는 크레이지 호넷들을 끌어당겨 일격에 격퇴할 수 있겠지.

    그 효과에 만족하고 있을 때, 소름이 돋는 말이 들려왔다.

    훈련을 위해 우리 집에 온 민희의 친구들이, 이틀 뒤에 시내에서 있을 행사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으니까.

    “그거 들었어? 이번 지역 행사에 아이돌도 온대!”

    “아, 들었어. 근데 아이돌은 별 관심 없고, 지역 주민 대상으로 경품 행사하던데 폰 바꿀 각 떴다!”

    “진짜 꿈도 크다. 네가 당첨되겠냐?”

    “될 수도 있지, 뭐. 나도 아이돌 보다는 등탑자들이 더 궁금하더라. 이번에 태산이랑 서리 길드랑 지역 치안 담당 길드 이임식 하면서, 한슬기 팀장도 온다던데?”

    “뭐? 한슬기? 잠깐만······ 근데, 정수 형이랑 한슬기 팀장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혹시, 잠깐 대화도 하고 사인도 받을 수 있나?”

    아이들은 설렘에 잔뜩 부푼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나를 향해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너네! 행사 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알았어?”

    “예? 아니, 형! 왜요? 아, 설마······ 사실 한슬기 팀장이랑 모르는 거 아니에요? 그거 들키기 싫어서······.”

    “아냐! 진짜 명함 받았다니까? 근데 오빠, 왜 가지 말라는 건데?”

    “맞아요. 경품 탈 수도 있는데 안 갈 이유가 없잖아요.”

    몬스터들을 몰이할 방법과 일격에 쓸어버릴 방법도 있지만, 사람들을 일일이 구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

    혹시라도 아이들이 거기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내가 구하기 힘들 수 있다.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이 녀석들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볼멘소리를 해대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잇, 가지 말라면 가지 마! 사람도 많은 데 균열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도망가기도 힘들다. 그리고 한슬기 팀장은 놀러 가냐? 바쁜 사람 귀찮게 하면 안 되지. 아무튼, 가면 앞으로 수업 없을 줄 알아!”

    나는 아이들에게 엄포를 놓은 뒤, 인터넷으로 행사 일정을 확인했다.

    젠장, 하필이면 왜 그 큰 두 행사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하는 거야?

    그것도 균열까지 터지는 날에!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균열 시작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해 시내로 나갔다.

    균열 발생 이후라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곤충 마비 물약이라도 몇 개 배치해놓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4등급 포탈】

    ─포탈 가동 : 20시간 38분

    ─연결 위치 : 제국 동부, 크레이지 호넷 둥지

    ─포탈 유도자 : 흑마법사 ‘드라우스’

    “진짜 곧 시작하겠네.”

    시간을 대략 계산해보니 균열이 일어나는 건 내일 오후 2시쯤.

    정확히 행사가 시작되는 시간이면서, 가장 많은 인파가 모일 시간이다.

    이거, 단순히 넘기기에는 우연이 아닌 것 같은 요소가 너무 많은데······.

    “후우. 그래도, 계획대로만 가면 잘 막을 수 있을 거야. 무려 윌리엄의 마법이니까.”

    긴장감과 동시에, 기대되기도 한다.

    이 균열을 막기 위해서 숱한 준비를 해왔으니까.

    과연, 강해진 나는 균열을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

    내가 대비한 것들이 과정 멀쩡히 작동할까?

    그걸 확인하고 나면, 한 발자국 더 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거대한 한 발자국 말이지.

    후우웅.

    세 균열이 한 눈에 들어오는 높은 건물.

    나는 그곳에 서서 곤충 마비 물약을 배치하거나, 균열에 대응하기 적합한 위치를 살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하늘을 보고 있는 거지?”

    시내 곳곳, 건물 옥상에 서 있는 몇 사람들의 시선이 정확하게 균열에 머무르고 있었다.

    단순히 하늘을 보고 있는 거라면, 큰 의심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마치 균열이 보이는 것을 넘어 마치 관찰하듯 세심하게 균열을 뜯어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 어딘가 본 적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

    “어? 저번에는······ 다른 균열 근처 옥상에 서 있던 걸 본 것 같은데······.”

    그래, 탑을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균열을 확인했을 때였다.

    분명히 저 사람을 다른 균열 근처에서 목격했다. 그리고 그때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지.

    그때는 그냥 달이나 별을 보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아하니, 정황상 균열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기우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수상한 데······.”

    이 균열은 흑마법사란 존재에서 의해서 의도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흑마법사들이 각성자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네.”

    나는 균열을 보는 무리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무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놈들의 그림자 속에 내 그림자 분신을 붙였다.

    분신을 통해서,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내일이군.”

    “길고 길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일정 조정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드디어, 거사의 시작이네요.”

    뭐? 거사?

    “그래. 적어도 만 단위의 인간은 죽여 꼭대기에 계신 그분께 생명력을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은······.”

    “그분이 강림하시는 그날이 앞당겨지겠지. 이번 일만 끝나면 레벨이 적어도 5 이상은 오를 거다.”

    “크흐흐. 이번 거사 한 번으로 5라니! 크하하!”

    “쉿. 소리가 너무 커.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 물건들 확실하게 정리해놓도록.”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거 아무리 봐도······.

    나는 방금 들은 말들을 정리했다.

    추론은 어렵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뿐이지.

    “균열뿐만 아니라, 조금은 이른 시기에 행해지는 지역축제도, 치안 담당 길드 이임식도, 굳이 날짜가 겹친 것까지······.”

    역시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되고 있는 듯했다.

    어쩐지, 모든 일이 우연이라기에는 너무 이상할 정도로 딱딱 맞아떨어진다 싶었지.

    분명히 행사 일정을 조율하는 놈 중에도 흑마법사를 따르는 놈들이 있을 거다.

    그리고, 나는 분신을 통해 느껴지는 기운 중, 신경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잠깐, 이건······ 마기다. 어디서 느껴본 적 있는 마기.”

    아주 찰나의 순간 밖에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느껴본 적 있던, 낯설지만 익숙한 마기를.

    그래, 방금 느낀 흑마법사의 마기는······ 마왕의 저주라는 ‘레드문’에서 느낀 것과 아주 흡사했다.

    “생각해보자. 그러고 보니, 안도원 지부장을 납치하려던 놈들, 그러니까 ‘디아블로 컴퍼니’라는 곳이었던가? 언뜻 들은 거지만 분명히 그런 놈들이 있었지.”

    디아블로 컴퍼니는 탑 꼭대기의 보스 몬스터와 내통하는 놈들.

    그놈들은 분명히 균열을 마음대로 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디아블로 컴퍼니······ 탑 꼭대기의 보스 몬스터······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왠지······.”

    98층의 마왕이 떠오른다.

    한편, 트레이닝 룸의 뒤편, 워프 게이트에서 마왕군이 63층을 침공 중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걸 막으라는 퀘스트가 떴었지.

    “다른 층에도 간섭할 수 있었으니, 지구에도 충분히 간섭할 수 있을 수도······.”

    이번 일, 진짜로 98층의 마왕과 그 추종자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추론을 하는 사이, 녀석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흩어지고, 내일 다시 모인다.”

    “예.”

    내일 다시 모인다는 걸 보면, 균열만으로 끝낼 생각은 아닌가 보지?

    구린내가 나는 데 그냥 보낼 수는 없다.

    나는 흩어지는 놈 중 한 놈에게 분신을 붙였다.

    *

    “크크······ 드디어 내일. 내일이면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 그러면, 나도 이제 남의 뒤나 닦아주는 일은 안 해도 되겠지.”

    원래, 그는 별 볼 일 없는 뒷골목 용병에 불과했다.

    주로 하는 일은, 탑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는 등탑자들을 털어먹는 것과 길드의 하청을 받고, 누군가를 협박하는 일.

    별 볼 일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던 그에게, 어느 날 찾아온 기회.

    그건, 퀘스트였다.

    그것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보상이 걸린 퀘스트말이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나도 레벨 40을 달성하고 막힌 구간을 뚫을 수 있을 거야!”

    탑의 장벽이라고 불리는 10층은 뚫어냈지만, 35를 달성한 뒤 좀처럼 오를 생각이 없었던 레벨.

    그는 승승장구하는 등탑자가 될 생각에 잔뜩 부푼 마음을 애써 달랬다.

    인간을 대량 학살하라는 퀘스트 내용은 자못 끔찍한 것이었으나, 그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제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그저 독가스가 담긴 캔을 몇 개 던지고 빠지면 균열을 타고 온 몬스터들이 그의 퀘스트를 대신 수행해줄 테니까.

    쉬운 내용에 비해 얻는 것이 많은 퀘스트.

    그걸 누가 어떤 목적으로 주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실패할 리도 없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가는 길.

    전화가 걸려 왔다.

    추적되지 않도록 발신 불명으로 걸려 오는 전화.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기에, 그는 주저 없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마지막 확인이다. 내일 시간과 위치는 기억하겠지?

    변조된 목소리의 주인은, 퀘스트를 받은 후 접촉하게 된 집단의 우두머리.

    ‘디아블로 컴퍼니’라는 곳의 한 팀이라고 들었으나, 점조직이라 그 구성원은 다 알지 못한다.

    심지어, 팀 우두머리의 정체조차도.

    얼굴 한 번 내보인 적 없었으면서 명령만 내리는 그의 말투와 행동이 거슬렸으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물론이죠. 오후 2시 중앙공원 동쪽. 서리 길드와 태산 길드의 이임식에 세 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아.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누군지도 모를 우두머리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끊은 뒤, 그는 욕을 중얼거렸다.

    “개 같은 새끼. 내가 언제까지 명령이나 받을 줄 아나? 끝까지 얼굴을 안 내보이는 거 보니까, 별 볼 일 없는 새끼겠지. 이 짓거리 몇 번만 하다가 떠야겠어.”

    이 일을 몇 번만 반복하고 레벨이 오르면, 그 뒤는 혼자 퀘스트를 클리어하거나 비슷한 그룹을 만들면 될 테니까.

    그렇게 애써 기분을 환기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긴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다.’

    가로등도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고, 몇 차례나 습격이 일어난 골목.

    그런 곳을 지나다니려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해가 어둑한 이 시간에는 더욱더.

    그는 몇 개의 골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확실히 나를 따라오는군.’

    인기척은 여전히 이어졌다.

    좋지 않은 징조.

    그는 숨을 들이켜고.

    “흡!”

    순식간에 뒤를 돌며 단검을 던졌다.

    쐐액!

    오크 미간쯤, 간단하게 뚫어버릴 수 있는 그의 유일한 장기.

    이걸로 등탑자 몇 명을 털어먹었던가?

    누가 그의 뒤를 밟았건, 그 기습 한 번에 지옥에 떨어졌으리라 믿었으나, 그는 곧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

    카앙!

    어둠 속으로 사라진 단검이 무언가에 부딪쳐 튕겨 나가는 소리.

    꿀꺽.

    ‘보통 놈이 아니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누구야!”

    하지만 대답 대신 들려온 것은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철걱, 철걱.

    두꺼운 철판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름이 끼치는 소리에, 그는 이를 악물고 단검을 연달아 던져댔다.

    “젠장!”

    쐐액, 쐑!

    그러나, 여전히 들려오는 것은 단검이 튕겨 나오는 소리였다.

    캉, 카강!

    단검은 단 하나도 그 금속을 뚫지 못했다.

    그는 도망치는 것만 생각한 채 내달렸다.

    하지만, 그 탓에 평소와 다른 길로 들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말았다.

    세 번째 가로등에서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뛰었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를 하며 그는 다급히 왔던 길을 되짚어가려 했지만, 또다시 그를 공포에 몰아넣은 소리가 들려왔다.

    철걱, 철걱.

    “씨, 씨발, 누구야!”

    마지막 남은 단검을 부여잡은 채, 어둠 속을 응시하던 그는 보고야 말았다.

    어둠 속에 떠오른 붉은 안광.

    철걱. 철걱.

    주홍빛의 가로등 불빛 아래로, 천천히 등장하는, 전신을 덮는 허름한 회색 망토를 두른 존재를.

    그리고, 골목을 들어오는 괴한이 마침내 후드를 벗었다.

    얼핏, 무방비한 턱과 목선이 드러났고, 그는 그 틈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지금!’

    쐐액!

    빗나갈 리 없는 깔끔한 일격.

    하지만 찰나의 순간, 괴한의 얼굴 위로 무언가 덮이기 시작했으니.

    철컥!

    흡사 용의 얼굴을 닮은 강철의 가면.

    투구가, 저절로 씌워진 것이었다.

    카앙!

    투구에 맞은 단검이 허무하게 튕겨 나가는 것을 보며,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려고 했다.

    “읍!”

    하지만,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 그의 입이 막혀 있었다.

    어느새 등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그를 덮친 것이었다.

    ······상대는 두 명이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그는 믿을 수 없었다.

    35레벨인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다니.

    “읍! 으읍!”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어찌나 강한 힘인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오후 2시, 중앙공원이랬나?”

    묵색의 비늘 갑옷.

    용처럼 뿔이 달린 투구를 쓴 그 존재가, 천천히 다가오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미안한데, 내일 약속은 취소해야겠다.”

    그게, 정신을 잃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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