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조심해야 할 때(1)
가장 조심해야 할 때(1)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가 명동 경매장의 매니저 최상임입니다. 부하 직원이 무례를 범했다고 들었는데, 사죄드립니다. 추후 교육하겠습니다.”
덩치 큰 안경 쓴 남자였다.
이 사람은 국내 I-브릿지의 임원 중 한 명으로 알고 있는데······ 무려 이런 사람이 직접 나온 건가?
드워프제 무기가 좋긴 좋은가 보다.
“괜찮습니다. 혹시 VIP 등록 기준 좀 물어볼 수 있을까요? 이 물건으로는 무리일까요?”
“아뇨, 이 정도 아이템을 거래해주신다면, 당연히 VIP 등록이 가능하십니다!”
나는 VIP 등록을 마친 뒤, 아이템 감정을 받았다.
감정을 마친 뒤에는 곧바로 아이템 판매 등록을 위해 매니저에게 설명을 들었다.
“수수료는 기존 회원 10%보다 인하된 5%입니다. 신분은 철저하게 비밀로 보장되고, 대금은 경매장에서 지급해드리는 비밀 계좌로 입금될 예정입니다. 진행할까요?”
“좋네요. 그렇게 진행해주세요.”
“정말 좋은 거래 감사드립니다. 약소하지만 VIP께 드리는 계약 선물이 준비되어 있으니,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매니저라는 사람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직원들을 시켜 쇼핑백에 담긴 것들을 잔뜩 쥐여주었다.
뭐, 만드라고라탕에 등탑용 에너지 드링크 선물 세트 같은 것들.
어째, 명절 선물이라도 받아서 돌아가는 것 같네.
“다녀왔습니다.”
내가 양손에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것들을 내려놓자, 원장님의 눈이 커졌다.
“정수야. 그게 다 뭐냐? 아직 명절도 아닌데?”
원장님은 달력을 보시더니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나를 키워주신 분이라 그런가? 어떻게 된 게 생각이 똑같네.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선물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번에 좀 크게 거래한 게 있는데, 계약 선물이래요. 아, 만드라고라탕 같은 건 각성자가 아니라도 건강에 좋다니까 원장님 챙겨 드세요.”
“그래?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몸에 좋다니까 조금 혹하네. 고맙게 마시마.”
원장님은 말이 끝나자마자 만드라고라탕을 한 팩 뜯어 드셨다.
하긴, 원장님도 이제 건강을 신경 쓰실 나이인데, 우리 뒷바라지하시느라 본인 건강 같은 건 신경도 못 쓰셨지.
이제는 원장님께 효도할만한 것도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네.
여행 같은 걸 보내드리면 좋아하시려나?
아무래도, 이건 애들이랑 상의를 좀 해보는 게 좋겠지.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이렇게 또 늘어나네.
그렇게 다음날.
첫 번째 아이템 판매되었다는 문자가 왔다.
경매장에서 지급해준 비밀 계좌에 입금이 되었다는 알림도 말이지.
“크, 역시 드워프제가 좋긴 좋은가 보네.”
어제 팔린 건,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측정되었던 ‘흑철 전투 도끼’였다.
B++등급 아이템이지만, 옵션이 엄청나게 특별한 건 아니어서 상위 등탑자들이 서브 아이템 정도로, 혹은 대형 길드들이 보급품으로 갖춰둘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수수료를 제하고도 약 5억 원에 가까운 금액이 나왔다.
거기에서 VIP 연회비를 제외하고 내게 들어온 건······.
“4억 6천만 원!”
이쯤 되니까, 다른 두 정의 무기는 대체 얼마나 나올지 기대되는데?
“물론, 수수료나 연회비가 장난 아니긴 했지만······ 뭐, 서비스를 생각하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려 1,000만 원이나 하는 연회비를 쓰긴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5,000만 원은 내야 했을 수수료를 VIP 혜택으로 2,500만 원만 냈으니, 이미 본전은 뽑은 셈.
거기다 감정에, 대리 판매에, 신분도 숨겨주고······ 편한 데다 훌륭한 서비스인 건 틀림 없었다.
역시, 돈값을 한다니까.
나는 한참이나 통장을 들여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임야를 구매하느라 텅 비었던 곳간이 다시 채워지고 나니까 마음이 여유롭네.
“월급날은 원래 고기 파티지!”
나는 바비큐를 즐기기 위해 고기를 사 왔다.
고아원 아이들은 물론, 이제는 가족 같은 투견 길드 사람들까지 싹 불러서.
“자, 오늘은 제가 쏩니다! 맛있게 먹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와, 형아 최고!”
“이야, 김 사장님, 가끔 보면 우리 마스터보다 화끈하시다니까! 잘 먹을게요!”
타닥, 타닥.
불꽃이 타들어 가는 기분 좋은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
육즙이 팡팡 터지는 고기에 맥주 한 잔.
약초와 식충 식물, 드워프와의 아이템 거래, 또 라면 가게 개업과 새로운 아이템 물색, 그리고 균열 대비로 숨 쉴 틈 없이 바빴다.
하지만,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리고 있는 데다가, 통장을 볼 때마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지만, 이런 날에는 조금 즐겨도 되겠지.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런데, 이목을 끄는 뉴스가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근래 세계 각지에 균열의 빈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세계 등탑자 연맹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대륙별 균열 발생 횟수는 작년 동기 대비 평균 1,000건 이상 증가하였고, 이에 따른 인명피해는 각 균열 당 평균 122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그 뉴스를 듣던 투견 길드원이 말을 얹었다.
“쯧쯧, 말세네.”
“그래서 요즘은 등탑보다도 균열 대응팀에 들어가는 게 돈을 더 번다고 하잖아요.”
“대형 길드들도 요즘 노선을 균열 대응 쪽으로 많이 바꾸고 있다던데.”
―이러한 변화가 가속될 시, 세계는 안전한 곳보다 위험한 곳이 더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이 탑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섬뜩한 소식이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면, 투견 길드 사람들을 포함해도 100명에 한참 못 미친다.
비극을 생각해본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지만, 세계 각지에서, 어쩌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
우리가 각성자가 아니고, 등탑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혹시, 내가 98층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이 순간에 우리의 머리 위에 균열이 열린다면.
한순간에,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세상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
나를 포함해서.
내가 그런 불안함을 느끼거나 말거나, 뉴스에서는 더 암담한 소식을 늘어놓았다.
─특히, 아직 등탑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제삼 세계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국가 체계의 붕괴가 임박한 10개국을 선정, 긴급 구호의 필요를······.─
나는 뉴스를 꺼버렸다.
“정말, 세상 살기 쉽지 않다.”
나는 이제야 안정을 찾아가는데, 세상은 더 위험한 곳이 되어가고 있구나.
입에서 조금 쓴 맛이 나는 것 같아,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저씨! 고기 더 구워주세요!”
“하하! 잘 먹네! 좋아. 더 줄 테니까, 내일은 훈련 30분 더하는 거다?”
“에엑! 그럼 안 먹을래요!”
“푸하하! 녀석, 엄살은!”
내 주위의 모두가 웃고 있었다.
그래, 깊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된다.
“자, 김 사장님! 아까부터 하늘만 보고 계시던데, 그렇게 있지 말고 건배합시다! 자, 건배!”
“좋죠! 건배!”
*
타워 토크.
등탑 이슈를 놓고 매주 등탑자 랭킹이나 새로운 아이템, 스킬, 혹은 특이 사항을 폭넓게 다루는 프로그램.
생각보다 정보의 질이 좋아서, 나도 애청하는 프로그램이다.
라디오처럼 틀어놓고 밀린 집안일을 하기 딱 좋거든.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목을 가다듬고는 카메라를 향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타워 토크의 진행자 최민석입니다. 오늘은 귀한 분을 모셔봤는데요. 한국의 랭커, 박진혁씨를 모시고 우리나라의 균열 대처에 관한 토론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진혁 마스터님.
─안녕하십니까. 박진혁입니다.
뭐야, 박진혁이라고?
나는 라디오처럼 틀어놨던 TV 화면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무표정으로 진행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 박진혁이 카메라를 응시했다.
─네, 등탑으로 바쁘실 텐데,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바쁘신 분이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최근 균열이 잦아졌다고 하죠. 이에 대한 정보가 있을까요?
─예. 먼저, 길드 담당구역에서만 평균 13회가 상승했습니다.
역시, 최근에 가장 핫한 이슈는 균열 빈도가 잦아진 거구나.
균열 한 번에 사람이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수천까지 죽거나 다치니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혹자는 균열이라는 현상을 ‘재난’이 아닌 ‘침공’으로 받아들이고 총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마스터님 생각은 어떠실까요?
그렇게 박진혁과 프로그램 진행자는 잦아진 균열과 이에 대한 방비책에 관해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무언가 신호를 받은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프로그램 진행자가 어색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런데, 조심스러운 질문입니다만, 얼마 전에 랭킹이 2위로 내려가셨죠? 혹시, 혜성처럼 등장한 랭킹 1위에 대한 정보가 있을까요? 세간에서는 탑의 오류라는 말이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랭킹.
탑 0층의 비석에, 가장 높은 층에 오른 사람들 순으로 표기되는 걸 말한다.
그리고 현재 1위는 당연히 나다.
처음부터 무표정을 고수하던 박진혁의 얼굴이, 아주 찰나 간 찡그려졌다.
─······처음에는 저도 진짜로 믿었지만, 금방 잊었습니다. 탑의 오류겠죠. 그렇게 강한 사람이 있다면, 본의든 타의든 진작 모습을 드러냈을 겁니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건, 여전히 저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게 박진혁이라는 건 확실히 맞는 말이다.
98층에 있는 게 나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박진혁의 자신감을 응원했다.
박진혁, 파이팅! 나는 너를 응원하고 있다고!
너 같은 최상위 랭커가 빨리 올라와야 나 대신 마왕을 쓱싹 처리해주고, 나는 편하게 돈이나 벌 테니까 말이야!
박진혁의 말에, 진행자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네요. 탑에서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니까요. 전문가들도 이번 사태를 오류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98층이라면, 한국 1위가 아니라 세계 1위일 테니까요. 자, 그럼 마지막으로 바쁜 시간 내주신 박진혁 등탑자님의 한 말씀 듣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박진혁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만약, 만약 진짜 98층 등탑자가 있다면······.
“음?”
─비겁하게 숨지 말고 나오십시오. 나와서 한국의 차원 위기 상황에 힘을 보태십시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시기이니까.
박진혁이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함께 카메라를 향해 삿대질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끝났다.
“허······.”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저런 눈빛이 아닐까?
정말, 한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뭐, 오류라고 안 믿는다면서 왜 노려보고 그래······ 무섭게······.”
나는 힘 없는 일개 보부상인데, 왜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리고 나도 나름 균열 하나 막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 중이라고.
그렇게 한참을 억울해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네, 김정수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안도원 지부장님의 비서입니다.
“아, 네네.”
─오늘 연락을 드린 건, 저번에 의뢰하셨던 성분 추출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연금술사 안도원, 그 아저씨에게 맡겼던 식충 식물 성분 추출.
그 의뢰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곤충형 몬스터를 대상으로 테스트가 진행될 예정이고, 결과가 나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제 균열까지 남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슬슬 조급해지려는 차에, 반가운 연락이 왔네.
정말, 일이 술술 풀린다는 생각이 든다.
돈 벌 구멍도 꽤 많이 뚫어두었고, 강해졌다.
벌여놓은 사업들도 다음 납품일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이제 균열을 대비해야겠지.
나는 시내로 갔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균열의 남은 일수를 재확인하기 위해서.
그런데······.
“왜······ 왜 균열이 세 개지?”
두근, 두근.
긴장감에 심박이 빨라지고,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분명히, 처음에 확인했을 때는 허공에 떠 있는 붉은 소용돌이는 번화가에 있는 단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도시를 감싸듯 삼각형으로 균열이 두 개 더 늘어 있었다.
마치 도시를 포위한 것처럼.
나는 건물 옥상을 박차고 다니며 두 번째, 세 번째 균열을 확인했다.
우우웅.
그림자 암수가 떨리며, 균열의 정보가 떠올랐다.
【4등급 포탈】
─포탈 가동 : 9일 12시간 17분
─연결 위치 : 제국 동부, 크레이지 호넷 둥지
─포탈 유도자 : 흑마법사 ‘드라우스’
포탈들은 정확하게 같은 유도자, 위치, 가동시간을 표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같은 균열이 세 개가 생긴 거다.
“균열이 3개면······.”
한순간 숨이 턱 막힌다.
윌리엄에게 듣기로는 포탈을 통과할 수 있는 존재의 양과 질은 포탈을 구성하는 마나의 양에 따라서 다르다고 했다.
즉, 포탈이 3개면······.
“······몬스터도 3배라는 뜻이잖아?”
나는 새로 생긴 포탈들의 위치를 살폈다.
내가 건물 옥상을 밟고 전력으로 달려도 최소 10분씩은 떨어져 있는 포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스킬과 준비된 물건들로 이 넓은 범위를 다 커버할 수 있을까?
침착하자.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막아야 하지?
정 중앙으로 유인해서 막아야 하나?
세 포탈은 도시를 감싸고 있다.
만약 곤충 유인 성분 실험이 성공한다면, 오히려 도시 중심부로 유인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물론 도시 중심부는 유동 인구가 많지만, 몬스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보다 민간인 희생이 덜 할 거다.
그리고 한 번에 쓸어버리기에도 좋고.
하지만······.
“잠깐만······ 젠장.”
도시의 중심.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돌아다니는 근린공원이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봤다.
그런데, 공원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축) 태산 길드 지역 치안 담당 확정】
【정기 지역 특산물 축제 개최 예정】
두 행사의 날짜가 겹쳤다.
그것도, 균열이 터지는 것과 같은 날짜로.
······우연일까?
뭐가 됐든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중앙에 있는 공원뿐만 아니라, 각 포탈의 위치 자체도 도시의 핵심 지역이다.
그러니, 세 개의 동시에 터지면 단순히 큰 피해가 나는 것을 넘어서······.
도시가, 내 고향이 사라질 수도 있다.
“젠장······.”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그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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