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식 아머리(1)
아카식 아머리(1)
“야옹!”
정신이 들자, 보이는 건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였다.
그런데 이 녀석, 코에 있는 점과 몸의 얼룩이 익숙하다.
“나비?”
내가 어릴 때부터 고아원 근처를 돌아다녔기에, 원장님이 종종 밥을 챙겨주던 녀석.
근데, 이 녀석이 왜 탑에 있지?
그 전에, 내가 있는 곳은 어디지?
마을 밖의 숲이긴 한 것 같은데,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주위에는 경비대원들도, 백작가 사람들도 없었다.
나는 갸웃거리면서도, 나비의 근처로 갔다.
“나비야, 오랜만이네. 이런 위험한 곳에 있으면 안 돼.”
“캬아악!”
평소에는 가까이 다가가면 도망치기 바빴던 녀석이, 세 발자국을 남겨두고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
탓!
“엇!”
나비는 내가 반응하지도 못할 속도로 품을 파고들더니, 얼굴을 할퀴어댔다.
“끄악! 뭐 하는 거야! 이 녀석! 떨어져!”
나는 혼비백산하며 고양이를 떨어트리려 했지만, 녀석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굴을 할퀴어지며 정신 못 차리고 팔을 바동거리던 중.
“정수! 정신이 드나?”
내 얼굴을 긁어대던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버둥대며 얼굴을 가리던 팔을 슬쩍 내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숲에 있던 나는 경비대원의 소초에 누워 있었고, 제임스와 클라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멍한 정신을 깨우며 중얼거렸다.
“고양이······.”
“고양이?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 아니에요. 꿈속에서 고양이를 봤거든요. 쓰러지기 전에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고양이라······.”
클라크와 제임스가 눈을 마주쳤다.
“대장님?”
“우연이겠지.”
무슨 소리지?
클라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수. 아마 강력한 레드문과 블루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환청을 들은 것 같군. 자네는 달이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쓰러졌어.”
“아, 블루문. 근데, 블루문은 떠오르지 않는다면서요?”
클라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모르겠군. 하지만 블루문이 오래가진 않았어. 잠시 떠오른 블루문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레드문이 시작됐으니까.”
“아······ 블루문이 완벽하게 뜬 건 아니라는 거네요. 레드문이라······ 근데, 마을 중앙에서도 몬스터가 나타난 건가요? 쓰러지기 직전에,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경비대원들이 뛰어가는 걸 봤거든요.”
클라크와 제임스는 잠시 당황하며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더니, 조금 긴 시간 동안 시선을 교환했다.
결국, 클라크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원래 외지인에게는 말해주면 안 되는 일인데, 계속 숨길 수는 없지. 그리고 정수 너니까.”
“네?”
“정수, 마을 중앙에 경비탑이 있는 건 알고 있지?”
“아, 네. 경비대원들이 돌아가면서 올라가 지키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탑이죠?”
“그래. 사실 우리는 그 경비탑을 지키도록 파견된 병사들이야.”
말이 조금 이상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게 아니라, 탑 자체를 지키기 위해서 파견되었다는 이야긴가?
“마을이 아니라, 탑을 지키는 거라고요?”
“그래. 그 탑 지하에는 고대 유적이 있어.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 아니, 밝히지 못했다는 게 맞겠군. 애초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봉인이라도 된 건가요?”
제임스는 고개를 저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대장님도 지켜줄 수 없다고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 유적에 봉인된 괴물이 있거든. 더 자세한 건 알려줄 수도 없지만, 우리도 많이 알지는 못해. 괜히 호기심에 다가가지 마.”
“아, 알았어요.”
클라크와 제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편히 쉬게. 쓰러지고도 이틀을 내리 잔 걸 보니, 며칠은 요양하는 게 좋겠어.”
쓰러지고도 이틀이나 잠들었다니······ 내 몸에 이상이 생기긴 했나 보다.
경비대원들이 방을 나간 뒤, 나는 내 몸 상태를 살폈다.
“이상하다? 아픈 데도 없고, 오히려 가벼운데?”
생각해보면, 나는 레드문의 영향을 받기 전에 쓰러졌다.
블루문이 떠오른 이후, 너무 많은 마나를 흡수해 쓰러졌다는 메시지도 봤었지.
마나 하트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메시지도 있었으니, 어쩌면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나가 밀려 들어와서 쓰러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봉인된 유적이라면······ 던전이잖아?”
탑 안에는 ‘던전’이 존재한다.
매우 위험하지만, 막대한 보상을 주는 특별한 장소들.
물론 98층의 던전인 만큼, 내가 공략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겠지.
언젠가 등탑자들이 98층에 도착하면 그곳을 공략하게 되는 시나리오 같은데······.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정수, 들어가도 되겠나?”
“아, 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기사단장 다니엘이었다.
“아, 기사단장님!”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다니엘이 저지했다.
“괜찮네. 누워 있게.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을 텐데.”
나는 누워서 다니엘을 맞았고, 다니엘은 내 옆에 앉아 웃었다.
“그래도 빠르게 정신을 차려 다행이야. 경비대장에게 정신을 차렸다는 말을 듣고 상태도 볼 겸, 고맙다는 말을 전하러 왔네.”
“고맙다는 말이요?”
“그래. 자네가 준 마법의 물약, 커피 믹스 말일세.”
“아 네!”
위대한 카페인 신을 영접한 모양인데?
나는 미소를 참았다.
“그걸 마신 병사들도 그렇고, 나도 레드문을 버틸 때 가장 힘들었던 건 쏟아지는 잠이었어. 하지만, 커피의 효과 덕분에 경비대원들이 없이도 레드문을 가뿐히 넘길 수 있었네! 맛과 향도 너무 훌륭하더군. 정말 고맙네!”
다니엘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팔아먹을 생각으로 준 건데,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고개까지 숙이니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레드문을 잘 넘겼다니 다행이다.
“참 다행이네요.”
“그런데, 정수. 마법의 물약을 마시고 나니, 조금 이상한 일이 있네.”
“이상한 일이요?”
“그래. 레드문 당일 밤에 잠이 안 온 건 좋은데, 왜 다음 날 밤에도 잠이 안 오는 거지? 어제도 뜬눈으로 밤을 새웠네.”
“네?”
“혹시 이게 마법이라면, 마법을 푸는 주문이 또 필요한 건가?”
이게 무슨 소리지?
아무리 커피를 마셨어도 카페인이 이틀이나 갈 리가 없는데?
설마······.
“다니엘, 혹시 커피를 얼마나 드셨어요?”
“맛있어서 열일곱 잔은 마신 것 같네.”
나는 이마를 짚었다.
내가 처음 커피를 마신 날, 다음날까지도 잠이 오지 않아 고생했던 때가 생각났다.
커피를 처음 마시는 사람이 이 정도로 많이 마시니, 다음 날까지도 잠이 안 올만 하지.
“제가 부작용을 설명 안 해드렸네요. 한 번에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돼요.”
“부작용도 있는 건가? 흠······ 하지만 너무 맛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리고 마실 때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게, 꼭 젊었을 적 혈기 왕성할 때로 돌아간 것처럼 묘한 기분이야.”
다니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이 양반은 어떻게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맛있어서 못 참겠다는 말을 대놓고 하지?
처음 만났을 때 느껴졌던 포스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명색이 기사단장이신데, 자제하셔야죠.”
“크흠! 알겠네. 그래야지. 그보다, 자네가 준 걸 다 마셔버렸는데, 혹시 더 있나?”
“아니, 한 박스를 다 드셨어요? 그 많은 걸 한 번에 다 드시다니······ 효과를 보셨다시피, 더 드리고는 싶지만 구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은 물건이라서 말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분명히, 다니엘이 보상은 섭섭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겠다?
무엇을 요구해야 잘 받았다고 소문이 날까?
적어도, 저번에 받았던 양손 검보다는 더 귀한 걸 받고 싶었다.
그때, 다니엘이 먼저 보상을 제안해왔다.
“크흠! 경비대원들이 이탈하면서, 백작가의 병력만으로 레드문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네. 자네가 가지고 오는 물건이 항상 귀한 건 알고 있지. 합당한 대가를 낼 테니, 어떻게 더 구할 수 없겠나?”
그렇게 말하면서, 다니엘은 팔찌를 건넸다.
“이건······.”
“요정의 축복이 담긴 팔찌일세. 아주 강한 방어막은 아니지만, 짐승의 발톱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걸세.”
나는 팔찌를 받아 들고, 옵션을 확인했다.
【요정의 축복이 깃든 팔찌(A)】
- 마법석 소켓 ‘0/3’
- 스킬
1) 요정의 보호 : 사용 시, 충격을 흡수하는 구체 방어막이 작동하여 공격을 막아냅니다.
탑에서 방어막은 소위 ‘원코’라고 부른다.
게임에서 코인 하나를 더 넣는 것처럼, 목숨 하나와도 같은 든든한 스킬이라는 의미.
커피 믹스 한 박스의 대가로 방어막 스킬이 달린 아이템, 그것도 98층에서 얻은 아이템을 받는다면, 남들이 양심 있냐며 욕할 수준.
목숨줄과도 같은 아이템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다니엘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거 하나로는 힘들 거라는 거 잘 알고 있네. 거기에 자네의 몸 상태를 호전시킬 포션과 골드로는 어떻게 안 되겠나?”
다니엘은 금화가 가득 담긴 상자와 함께 사지가 찢겨도 죽지만 않으면 살려낼 수 있다는 최상급 포션 다섯 병을 늘어놓았다.
금화만 해도 만 골드는 되어 보이는데, 팔찌에 포션까지 하면 대체 저게 얼마야?
팔찌만 받는다고 해도 내가 붙잡아야 할 제안인데, 다니엘이 알아서 다른 보상까지 던져준다고 한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혹시라도 다니엘이 팔찌를 다시 가져가기라도 할까 봐 빠르게 내 손목에 착용해버렸다.
“참 예쁜 팔찌네요. 커피를 더 구하는 데 힘 좀 써보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정말 고맙네! 역시, 자네가 이 백작령에 온 건, 큰 축복이야! 하하!”
“과찬이십니다. 하하하!”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그래. 좋은 거래가 따로 있나?
서로 만족했으면 그게 좋은 거래지.
호탕하게 웃은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몸도 좋지 않은 사람 시간을 너무 뺏었군.”
“아,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다니엘이 방을 나가고, 나는 몸 상태를 마저 점검했다.
마나 하트는 한 단계 더 커져서 이제는 내 심장과 비슷한 크기까지 성장했다.
다들 내 몸 상태를 걱정했지만, 오히려 쓰러지기 전보다 활기가 넘쳤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보자 그 효과는 더더욱 강하게 체감됐다.
“와. 이제 파이트 래빗 정도는 검으로만 싸워도 잡을 수 있겠는데?”
마법과 단검까지 이용해야 간신히 사냥할 수 있었던 파이트 래빗.
처음에는 감히 검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였지만, 지금의 몸놀림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정도 성과라면 목숨을 걸고 사냥했던 때보다 더 빠른 성장.
레드문 때문에 사냥을 나서지 못하게 되어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더 빠르게 성장해버렸다.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삼 개월에 한 번이라······ 이 정도면 다음 블루문이 기다려지네.”
달이 뜨는 것과 함께 나는 더 강해질 테니까.
그런데 블루문의 효과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회복을 마치고 소초 밖으로, 약초를 캐러 나갔을 때.
나는 블루문이 만들어낸 또 다른 기적들을 목격했으니······.
“와······ 약초밭이······ 무슨 밀림이 되어있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