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구원자(3)
밤의 구원자(3)
다니엘은 커피 믹스를 보며 눈을 빛냈다.
“물약? 아무리 봐도 액체처럼은 안 보이는데?”
“그러니까 마법적이죠.”
내 말에 다니엘의 눈이 한층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까지 꼴깍 삼키는 게, 뭘 떠올린 거야? 무슨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어떻게 내가 뭘 꺼내자마자 군침부터 삼키지?
“그래서, 그건 어떻게 사용하는 물건인가?”
“커피 믹스라는 물건인데, 차처럼 마시는 겁니다. 맛과 향도 좋지만, 진가는 밤에 드러나죠.”
“밤에 말인가?”
“예. 내용물을 뜨거운 물에 타서 야간 근무를 나서는 병사들에게 투입 전에 마시게 하면, 졸음을 호소하는 병사가 신기할 정도로 줄어들 겁니다.”
“호오. 간편하군.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의 말이라면 신용할 수 있겠지. 여태 봤던 것들이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고요. 아주 달콤하죠. 그때 그거처럼.”
내 말에, 다니엘이 다시금 군침을 삼키더니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 그거 말인가? 후후······.”
고작 라면과 아이스크림으로 이 정도로 신용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한데?
하지만 커피의 성능은 진짜지.
“몇 개 드릴 테니, 오늘 밤에 시험해보세요.”
“고맙네. 한 번 써보지. 이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네.”
커피 믹스를 소중하게 챙겨 넣은 다니엘은 병사들을 이끌고 저 멀리 사라졌다.
이번에는 뭘 달라고 할까?
검은 바꿨으니 갑옷?
아니면, 마법석으로 달라고 할까?
나는 무엇을 받아야 할지 흐뭇하게 고민하며 검을 휘둘렀다.
며칠간 사냥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레드문이 뜨기 전까지는 폐관 수련이다.
*
사흘이 흘렀다.
오늘은 레드문이 뜨는 날.
그 탓인지, 평소에는 꽤 생기 넘치던 톨른 마을 주민들도 집에 틀어박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작가의 병사들과 경비대원들이 레드문의 대비를 마친 채 숨죽여 대기하고 있을 뿐.
오늘, 경비대원들은 레드문이 뜨기 전에 숲의 상황을 살피며 일정 구역을 백작가의 병사들과 번갈아 지킨다고 한다.
제임스가 보여준 지도를 보니, 마을에 피해가 가는 걸 막기 위해서 꽤 넓은 범위를 지키고 있었고, 그 구역에는 약초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덕에 나는 투견 길드에 납품할 약초를 캘 수 있었다.
열심히 약초를 캐고 있을 때, 클라크가 물었다.
“정수, 자네도 여기서 레드문을 보겠나?”
“레드문을요? 하지만, 위험하다면서요.”
“우리 뒤쪽에 있으면 괜찮아. 듣자 하니, 레드문을 제대로 본 적 없어 보이는데, 불길하긴 해도 한 번쯤은 볼만한 경치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초를 캐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데다, 레드문으로 몬스터들이 얼마나 흉포해지는지도 좀 궁금했으니까.
거기다, 경비대원들이 진심으로 싸우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 기회에 경비대원들이 싸우는 모습을 봐두면, 실력 상승에도 도움이 되겠지.
“저야 좋죠.”
“그래. 레드문이 가까워지면 알려줄 테니까, 하던 건 빨리 마무리하라고. 앞으로 한, 두 시간 정도면 달이 뜰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약초를 캤다.
평소에는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우스갯소리를 나누던 경비대원들이 오늘따라 조용했다.
그 침묵 사이로, 내가 약초를 캐느라 흙을 파는 소리만이 울렸다.
사각, 사각.
하지만 그 어색한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단하신 경비대원들, 잘 지내셨나?”
백작가에서 파견해 온 인물 중, 가장 레벨이 높고 무장 상태가 좋은 이들이 경비대원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도련님의 호위들이군. 오랜만이다.”
“석 달 만이군. 클라크 대장께서는 이제 제국과 계약 기간이 25년 정도 더 남았나?”
도련님의 호위라는 자들은 턱을 치켜들고 웃음기를 가득 담아 물어보았다.
뭐지, 저 시비라도 거는 것 같은 태도는?
그러나 클라크는 익숙한 일인 듯,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뭐, 그 정도 남았겠군. 그보다, 너무 일찍 온 거 아닌가? 아직 도련님이 오실 시간은 아닐 텐데?”
“아아, 도련님께서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음식을 내리셔서 말이야. 뭐,”
호위병들은 경비병들에게 가죽 주머니 몇 개를 던져주었다.
휙! 탁.
경비대원들이 가죽 주머니를 받아 열자, 그 안에는 딱딱하게 굳은 육포 등,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음식이 담겨 있었다.
“아, 또 딱딱한 육포야?”
“제임스가 요리할 때라면 이것도 없어서 못 먹는 거긴 했지만, 먹고 나면 이빨이 너무 아프단 말이지.”
경비대원들이 투덜거리자, 호위병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도련님이 내리신 음식에 불만을 표하다니, 배가 불렀군.”
“받지 않겠다면 가져가겠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클라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중재했다.
“흠. 마음은 감사히 받지. 도련님의 성의를 거절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챙겨온 음식이 있어서 말이야. 확실히, 지금이 아니면 식사도 힘들겠군. 다들 지금 대충 먹어 두자고.”
클라크의 말에 경비대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곳곳에 숨겨두었던 소시지와 핫바를 꺼내 케첩과 스리라차 소스를 뿌려 먹기 시작했다.
뽀득, 뽀득!
여기저기 터지는 환상적인 소리와 소스의 자극적인 냄새.
경비대원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호위병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뭐지? 소리랑 냄새가 장난 아닌데?”
“아, 이거 말인가? 이번에 우리 쪽에 훌륭한 요리사가 들어와서 말이야. 나눠주고는 싶지만, 여분이 없어서 미안하군.”
꿀꺽.
백작가의 호위병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관심이 없는 척, 자신들의 주머니를 열었다.
“흥! 그깟 것보다 우리가 만드는 음식이 더 맛있을 거다. 이봐, 불 좀 붙여보라고! 도련님이 오시기 전에 수프라도 끓여놓아야겠어!”
“예! 신선한 감자와 닭고기도 쓰겠습니다!”
“그래그래, 레드문이 뜨기 전에 배 좀 뜨끈하고 든든하게 채우자고!”
호위병들은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을 모으고, 부싯돌을 꺼내 들어 일사불란하게 불을 붙일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보던 경비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향해 소곤거렸다.
“이봐, 정수. 라면 같은 건 최대한 숨기라고 했지?”
“네? 뭐······ 너무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곤란하니까요.”
“우리도 수프를 끓이려고 하는데, 가스버너는 써도 되겠나?”
어차피 가스버너는 신문물이라기보단 마법을 이용해 만든 아티팩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입소문을 조금 탄다고 해도, 라면처럼 큰 영향을 끼치진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좋아! 그럼 우리도 수프 좀 끓여보지. 도련님이 주신 성의를 거절해서야 쓰나?”
경비대원들은 씩 웃으며 가스버너에 물을 담은 냄비를 올렸다.
딸깍, 화르륵!
곧바로 불이 솟구치는 걸 본 경호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저건 뭐지? 마법인가?”
“공격할 때 쓰는 게 아니라, 불을 붙이는 아티팩트라니! 백작가에서도 본 적이 없어!”
“저런 사치품은 왕궁이나 가야 볼 수 있겠군. 어떻게 경비대원들이 쓰는 거지?”
경비대원들은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냄비에 육포와 채소 같은 것을 넣어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제임스가 어정쩡한 자세로 휘파람을 불며, 슬금슬금 냄비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흐흠. 크흠!”
제임스는 경호원들이 보지 못하게 몸으로 냄비를 가리곤, 순식간에 라면수프를 털어 넣었다.
탈탈탈!
가루 한 톨까지 털어 넣은 제임스는 뻔뻔하게 국자로 냄비를 섞다가 맛을 보았다.
“크하아! 죽인다! 이 맛이지! 대장님, 맛 좀 보시죠!”
후루룩!
“크아! 이 맛에 산다! 잘했어, 제임스! 역시 넌 최고의 요리사야! 정수 다음으로 말이지!”
그 말에 제임스가 투덜거리며 나뭇가지로 땅을 긁었다.
라면을 먹지 말라니까 수프만 쓰다니, 대체 저건 누가 알려준 거야?
라면 맛의 정수가 어디에 집약된 건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은 경비대원들의 미식을 향한 집착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자, 정수. 자네도 한 그릇 해.”
“아, 네.”
매콤한 냄새가 풍기는 수프가 부러웠는지, 호위병들은 침을 계속해서 삼키면서도 끝내 달라고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두 시간이 지나니 백작가의 도련님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붉은 사자를 갑옷 어깨 부에 양각으로 넣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서.
【Lv.93 이안 라이언】
“다들 준비는 마쳤나?”
“예!”
“평소에 하던 대로만 하지. 목표는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는 것. 이상.”
이안은 자신보다 높은 레벨의 기사들이나 경비대원 앞에서도 당당하게 카리스마를 풍기며 검을 뽑아 들었다.
저게 이 세계의 귀족이구나.
왠지 기사단장 다니엘과는 다르게, 라면 같은 음식으로도 호감을 사기 힘들어 보이는 포스가 풍긴다.
“모두 준비! 달이 떠오른다!”
다니엘의 외침과 함께,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고양된 숨소리와 낮게 든 검이 방패에 닿으며 쇠가 긁히는 소리.
어쩐지, 밤의 고요와 함께 병사들의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고요 사이에서, 클라크가 조용히 경고했다.
“정수. 레드문은 너무 강한 마기를 내뿜어서 몸이나 마나가 약한 자들은 열병을 앓기도 해. 문제가 생기면 우리 쪽 사람들이 마을까지 옮겨주겠지만, 긴장하라고. 되도록 달을 똑바로 보지도 말고.”
“알겠어요.”
꽉 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여기서 약한 편에 속하니, 안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98층에 계속 체류하다 보면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다.
언젠가 맞을 매, 미리 맞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꿀꺽.
내가 침을 삼키는 것과 함께, 저 멀리서 붉은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챙, 챙, 챙.
병사들이 검과 방패를 부딪치며, 마을을 감싼 모양으로 넓게 포진한 다른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와 동시에, 저 멀리서 몬스터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
키야아악─!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위협적인 소리.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게······ 뭐지?”
그 순간, 사납게 울부짖던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몬스터들을 하수인으로 부리는 폭군처럼 뜬 붉은 달.
그런 붉은 달을 집어삼킬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그것이, 하늘에 걸렸다.
모든 병사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검을 떨어트렸다.
챙, 채쟁!
“저런 거······ 본 적 있나?”
“아니.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 시대 이후로 처음이겠군.”
이상하게도 그건.
내가 앞서서 들었던 붉은색 달이 아니었다.
블루문.
고─오─오─오──
거대한 그 푸른 달이, 붉은 달을 집어삼킬 듯이 떠올랐다.
“블루문이 실존하는 거였다니······.”
“잠깐만, 그런데 저 달은 마왕이 봉인했다고 하지 않았나? 왜 지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거지?”
두근, 두근.
경비대원들의 말을 들으며, 내 심장이 뛰었다.
【‘아카식 아머리’의 활동을 확인했습니다】
【‘아카식 아머리’가 ‘블루문’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어?”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황당하지만, 대충 알 것 같긴 하다.
아무래도, 블루문은 나 때문에 떠오른 것 같다.
정확히는,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킬, ‘아카식 아머리’ 때문에.
단순히 무기를 소환하는 스킬인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떤 힘이 있길래 봉인된 달을 깨운 걸까?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얻기는커녕, 질문조차 하지 못했다.
그르릉······.
저 멀리, 마을의 중앙에서 거대한 짐승이 낮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그 낮은 울음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르릉─
땅이 울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쪽에서 경종이 미친 듯이 울려왔다.
땡땡땡─
사색이 된 클라크가 이안을 향해 외쳤다.
“젠장! 녀석이 깨어났습니다!”
녀석이라니, 무슨 말이지?
설마, 마을에 괴물이라도 있는 걸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지, 클라크와 눈을 맞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시간부로, 경비대원들의 지휘권은 경비대장 클라크에게 이임한다!”
고개를 끄덕인 클라크가 마을을 향해 내달리며 외쳤다.
“이곳은 백작가의 병력들에게 맡기고, 전 경비대원은 이탈해 소초로 돌아간다!”
“경비대원, 복귀!”
“경비대원, 복귀!”
경비대원들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파악하려고 했으나─
두근, 두근.
마나 하트가 요동을 치며, 경비대원들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제임스가 뭐라고 외치며 나를 둘러멨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에서, 몇 개의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블루문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마나 하트가 성장합니다】
【경고, 과다한 마나 흡수로 마나 하트가 과부하 상태입니다】
【‘아카식 아머리’가 마나 흡수를 차단합니다】
그와 동시에, 내 정신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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