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구원자(2)
밤의 구원자(2)
나는 등탑 준비를 마친 뒤, 곧바로 탑을 올랐다.
새로 뽑은 차가 마음에 드셨는지, 원장님이 탑까지 데려다주신 덕에 이번에는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이번에도 몸조심하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원장님은 내가 탑에 들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셨다.
매번 탑에 들어갈 때마다 혼자였는데, 배웅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네.
그렇게 도착한 98층.
이번에 나는 윌리엄을 먼저 찾았다.
쿵쿵쿵.
“윌리엄, 계세요?”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얼마 가지 않아 문이 열렸다.
“오, 정수. 돌아왔구만.”
“네. 근데······ 이 시간에 주무시려고요?”
잠옷 차림인 윌리엄은 하품을 쩍 하며 대답했다.
“출장을 갔다 와서 말이야.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지금 자면 밤에 잠들기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눈을 빛냈다.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고객을 잡을 수 있겠어.
“그럼, 잠을 깰 수 있는 물건을 준비해드려야겠네요.”
“잠을 깰 수 있는 물건?”
윌리엄이 관심을 보였고, 나는 곧바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물은 금방 끓어올랐고, 나는 컵에 커피 믹스를 뜯어 넣은 후, 물을 부어 숟가락으로 저었다.
“호오, 향이 괜찮군. 그건 뭔가?”
“커피 믹스라는 건데, 달고 잠을 깨는 걸 도와줄 겁니다. 드셔보세요.”
윌리엄은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호호 불어 마셨다.
후루룩.
“오! 달짝지근하고 좋군. 살짝 씁쓸한 뒷맛 덕분에 물리지 않겠어.”
“그것만은 아니에요. 그게 진짜 효과를 발휘하는 건, 30분 정도 후가 될 겁니다.”
윌리엄은 나와 마법에 관한 이야기 나누며, 커피를 마셨다.
그렇게 30분이 지나자, 윌리엄은 문득 무언가를 느낀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옷! 정말 힘이 솟아오르고, 정신이 맑아지는군! 조카가 돌아오기 전에 조금 쉬려고 했는데, 할 일을 마칠 수 있겠어! 정수, 고맙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카요? 조카가 있었어요?”
“그래. 죽은 내 누이의 아들이지. 오늘은 도시로 나갔던 녀석이 돌아오는 날이야. 저녁 약속이 있네.”
윌리엄은 조카 이야기를 하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텅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불쌍한 녀석.”
“조카분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윌리엄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녀석의 꿈은 훌륭한 셰프였어. 그 꿈을 위해 도시로 나갔는데, 셰프 슬레이어에게 당하고 말았지.”
셰프 슬레이어?
이 세계에는 요리사를 사냥하는, 그런 직업도 있는 건가?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윌리엄이 말했다.
“자네는 모르는가? 하긴, 셰프 슬레이어가 남부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진 못했으니, 모를 수도 있겠지. 그놈은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요리사의 자존심을 박살 내는 질이 나쁜 놈이야.”
설명을 듣고 나니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마치 프랑스 미식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미슐랭 스타를 찾아다니는 비밀 평론가 같은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사람에게 잘못 걸려서 꿈을 포기하고 돌아오게 됐다니, 참 딱한 사정이다.
“근데, 그 사람은 귀족인가요? 쫓아내지도 못하고 욕을 듣고 있어야 한다니······.”
이 세계는 미식이 그렇게 발달한 것 같지는 않았다.
미식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그에 맞는 신분과 지위를 가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윌리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도 정체를 모르니까 단정할 수는 없겠지. 물론 거침없는 언행을 보면 귀족에 가깝지 않을까 싶네만······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도 돌더군.”
“인간이 아니라고요?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인가요?”
조금 흥미가 돋았다.
이 세계에 와서 본 건 경비대원들과 윌리엄, 마을 사람 몇과 백작가의 기사단장이 전부니까.
탑 안에 이종족이 산다는 소문도 듣긴 했는데, 실체를 본 적은 없으니 조금은 궁금하네.
그러나 윌리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종족이라면 감히 제국에서 행패를 부리긴 힘들겠지. 셰프 슬레이어의 정체는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조차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모든 종을 초월한 종, 드래곤.
숨을 한 번 내뱉는 것만으로도 도시를 부술 수 있다는 공포의 존재.
그런 존재가 밥 먹고 맛없으면 하는 일이 고작 셰프의 멘탈을 부수는 거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군. 하지만, 자네 생각보다 장수하는 종족들은 괴짜가 많아. 드래곤은 워낙 오래 산다고 하니, 맛있는 걸 찾아다니는 게 유일한 낙인 녀석도 있는 거겠지.”
아직 드래곤에 대한 정보가 극단적으로 적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추정컨대, 드래곤의 수명은 최소 수천 년일 거라고 한다.
하긴, 나 같아도 수천 년을 사는데 즐길 게 극단적으로 적으면 미쳐버리기 딱 좋을 것 같다.
“아, 뭐······ 그건 그렇긴 하죠.”
“아무튼, 자네도 조심하게. 그런 괴짜들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까 말이야. 오늘도 수업을 해주고는 싶지만, 조카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있어 힘들겠군.”
“괜찮아요. 그럼 조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
윌리엄의 오두막을 떠나, 나는 경비대의 소초에 도착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부산스러운 데다 못 보던 얼굴이 많은 것 같은데?
전부 무장한 채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 정수. 돌아왔구만.”
“아, 제임스! 잘 지내셨어요? 근데, 오늘은 못 보던 사람이 많은 것 같네요?”
“아, 레드문을 앞두고 도련님과 병력들이 와서 말이야.”
“레드문이요?”
“뭐야, 정수. 레드문도 모르나?”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제임스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었다.
“아하하······ 제가 몸이 많이 약하잖아요? 그래서 밖으로 나간 적도 적고, 모르는 게 많아서요.”
제임스는 잠시 볼을 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이런 변방이 아니라 안전한 곳에 있었다면 레드문의 영향을 거의 안 받았을 테니까 말이야.”
제임스는 나뭇가지를 들고 큰 원을 그린 뒤 몇 개의 시설을 표기했다.
모양을 보니, 마을의 목책과 경비대원들의 소초를 표시한 듯했다.
“정수, 너도 석 달에 한 번, 붉은 달이 뜨는 건 봤겠지? 마왕의 마기에 영향을 받은 그 붉은 달은 몬스터를 자극해서 흉포하게 만들지.”
제임스는 북쪽에서 목책 방향으로 화살표를 그었다.
“그렇게 되면, 평소엔 마을을 피해 다니던 놈들도 눈깔이 회까닥 뒤집혀서 마을을 습격해. 경비대원들만으로는 마을을 지키기 벅찰 때도 있어서 백작가에서 도련님과 병력들이 지원을 나오는 거야.”
“아······ 그렇군요.”
내가 있는 이곳은 라이언 백작령의 톨른 마을이다.
이전에 만난 기사단장 다니엘도 라이언 백작가의 가신이고, 제임스에게 듣기로는 제국 변방에 자리한 영지라고 한다.
마물의 숲과 경계를 둔 이 마을을 포함해 대부분의 영지가 제국의 변두리에 있다고 하니, 변경백쯤 되는 거겠지.
요약하자면,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아 전투를 대비한다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98층에 처음 도착했을 때, 층을 클리어하는 목표가 마왕을 사냥하는 거라고 했지.
이런 식으로 최종 목표를 다시 상기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작은 마을에 파견된 병력의 수가 족히 수십은 되는 것으로 미루어, 생각보다 큰 전투가 될 것 같다.
내가 그런 전투에서 안전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제임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일 년에 네 번은 있는 행사야. 마을 사람들이 죽어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안전해.”
“하하······ 그럼 다행이네요. 레드문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흠. 앞으로 사흘쯤 남았겠군. 레드문이 가까워지면 몬스터들이 더 흉포해지니, 정수 너도 당분간 사냥은 자제하는 게 좋겠어. 식량은 우리가 준비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귀환 스킬에도 쿨타임이 있으니, 레드문 기간에는 사냥도 나가지 못한 채 마을 안에 갇혀있어야 할 판이다.
그래도 토끼 하나 사냥하는 것조차 버거운 이 98층에서 레벨업 좀 하겠다고 목숨을 내던지는 건 바보짓이지.
이미 충분히 성장 속도는 빠르니까, 조금 아쉽기는 해도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아쉬움을 삼키고 있을 때, 제임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먼 옛날에는 블루문이 레드문의 힘을 억제해서 몬스터들을 굳이 막지 않아도 됐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고생인지 원.”
“블루문은 또 뭐예요?”
“정수 너는 진짜 아는 게 뭐야?”
“하하······.”
이러다가는 내가 진짜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는 거 아닌지 몰라.
“그래도 두 개의 달에 대한 소문은 들어본 적이 있지? 짙고 순수한 마나를 가득 품은 푸른 달이자, 또 하나의 달. 그게 블루문이야. 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이전 시대에 사라졌다고 하니, 모를 수도 있겠지.”
“블루문은 왜 사라졌나요?”
“글쎄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뭐, 기록으로는 마왕이 봉인 되는 순간 최후의 발악으로 블루문을 막아버렸다고 하더군. 자신의 추종자들이 힘을 유지해서 자신을 부활시킬 수 있게끔.”
“마왕이라······.”
나는 98층의 목표를 상기했다.
【메인 목표 ‘마왕 사냥’이 시작됩니다】
메인 목표는 탑이 지정한 필연적인 시련.
그 목표는, 이미 시작되었을지 몰랐다.
“뭐, 동화 같은 이야기지.”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어쨌든, 그래서 백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이 와있으니 괜히 마찰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라고. 정예들이 모여서 파견된 거라 자부심이 대단하거든.”
“알았어요.”
그때, 경비대장 클라크가 다가왔다.
“제임스! 이 녀석, 여기서 땡땡이나 치고 있었나?”
“아, 대장님. 땡땡이가 아니라, 정수에게 레드문과 주의사항을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이 녀석, 대체 어디에 박혀서 살았던 건지 레드문도 모르더군요.”
“응? 가끔 정수는 허당 같을 때가 있단 말이야. 아무리 애들 동화 같은 이야기라도 그걸 모르나? 그나저나 이거, 사냥도 못 나가고, 타이밍이 참 안 좋게 됐어.”
“괜찮아요. 그런데······.”
나는 열심히 움직이는 백작가의 병사들을 살피며, 전부터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을 표했다.
“제임스. 파견된 저 사람들은 백작가의 정예라고 했죠?”
“그렇지.”
“그럼, 저 사람들은 제임스보다 강한가요?”
“뭐? 허허.”
내 물음에, 제임스가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클라크는 아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제임스가 정예병들보다 강하냐고? 크하하하하!”
이거, 너무 웃는 거 아닌가?
내 딴에는 당연히 가질만한 의문이었다.
백작가 정예병들의 레벨은 평균 70~80.
조금 높은 사람도 100을 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비대의 막내인 제임스의 레벨조차 123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자랑한다.
게다가, 저번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충격받아 쓰러지기까지 했던 백작가의 기사단장, 다니엘조차 제임스보다 레벨이 낮았으니, 의문을 가지는 게 당연하지 않나?
내가 뚱한 얼굴로 클라크를 바라보자, 클라크는 찔끔 흐른 눈물을 닦고는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하네. 생각해보니까, 정수 자네는 아직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군?”
뭐야······ 그냥 경비병이 아니었던 거야?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클라크가 어깨를 쭉 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각자 사정이 있어서 여기 모여 있지만, 우리는 한때 밖에서 한 솜씨 했던 사람들이라고.”
아, 그래서 다들 레벨이 높았던 건가?
하지만······ 단순히 그걸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많다.
이런 인재들을 변두리에서 썩히는 것은 아깝지 않나?
기사단장이라거나, 기사들의 교관이라거나, 쓸 데가 많을 텐데 말이지.
“그러면 왜 이런 구석진 마을에 계신 건가요?”
“그건 말이지······.”
내 말에 제임스가 답변하려고 했으나, 클라크가 순식간에 제임스의 입을 틀어막으며 검지를 코와 입에 가져다 댔다.
“쉿.”
제임스는 떨리는 눈으로 나와 클라크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 너는 입이 너무 가벼워서 문제야. 이곳에 온 지가 벌써 몇 해인데, 이제 적응해야지.”
“죄송합니다.”
클라크가 손을 떼자, 제임스는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뭐지 이 분위기?
위험하면서도 흥미로운 냄새가 난다.
“아직도 저한테 비밀이 있는 거예요?”
경비대원들을 슬쩍 떠보았으나, 클라크가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도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게 많지 않나?”
······할 말이 없네.
“허.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데, 너무하시네요.”
“매정해 보여도 너무 서운해 말게, 정수. 세상에는 모르는 게 목숨을 지키는 일일 때가 있는 법이니까 말이야. 이 일과 연관되면, 나조차 자네를 지켜주겠다고 장담할 수 없어.”
“아, 알았어요.”
클라크의 표정과 말투가 어느 때보다 진중했기에, 나는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레벨 130의 괴물이 지켜줄 수 없다고 하는 정보가 뭘까?
궁금했지만, 나는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탑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은, 제 목숨을 소중히 하라는 거니까.
“자, 그럼 우린 다시 일하러 가봐야겠어. 레드문 대비가 바빠서 말이야.”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아, 클라크. 바쁠 때 미안하지만, 훈련장은 좀 써도 될까요?”
“뭐, 그 정도는 상관없겠지만······ 다들 바빠서 챙겨주지 못할 텐데 괜찮겠나?”
“괜찮아요. 훈련장을 내준 것만 해도 감사하죠. 그럼 나중에 뵐게요.”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피해 훈련장으로 향했다.
경비대원들이 없어도, 이제는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익숙하다.
훈련용 검을 꺼내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너는 뭔데 이런 시기에 혼자 놀고 있지?”
무장한 백작가의 병사 두 명이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제임스가 백작가 병사들과 마찰은 자제해달라고 했지.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투로 답했다.
“아, 저는 클라크 경비대장에게 허락받고 훈련장을 조금 빌려 쓰려고 합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뭐? 경비대장? 지금은 공자님이 상황을 총괄 중이시라고! 레드문이 얼마 안 남아서 바쁜 거 몰라?”
“정신을 못 차리는군. 못 보던 얼굴인데, 대체 어디 소속이야?”
병사들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고, 그 탓인지 울타리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소리가 들리는데, 거기서 뭣들 하는 거지?”
그 말에, 병사들이 씩 웃으며, 울타리 너머를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말단처럼 보이는 놈이 혼자 농땡이를 피우는 것 같길래 주의를 좀 주는 중이었습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너 잘 걸렸다는 것 같은데, 이거, 상황이 영 좋지 않다.
“뭐? 농땡이라니! 대체 누구야!”
분노에 찬 목소리의 주인이, 2m가 넘는 울타리를 훌쩍 넘어왔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번쩍거리고 묵직한 갑옷을 입은 채로.
쿵!
가볍게 흙먼지가 피어오르자, 갑옷의 주인이 팔을 휘둘러 순식간에 흙먼지를 걷어내며 말했다.
“누가 농땡이를 피운다는······ 아니, 정수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목소리의 정체는 기사단장 다니엘이었다.
나를 알아본 기사단장은 활짝 웃으며 반갑다는 듯 다가왔다.
어쩌면, 이거 생각보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아, 기사단장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자네 덕분에 잘 지냈지. 오랜만이네. 잘 지냈는가?”
내가 기사단장과 살갑게 인사하는 걸 본 병사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를 보기 바빴다.
다니엘은 병사들을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친구는 경비대원이 아닐세. 그리고 내게는 어떤 면에서 은인이기도 하고.”
“헉! 기사단장님의 으, 은인이란 말씀입니까?”
내가 은인······ 정도였어?
라면이랑 아이스크림 준 게?
다니엘이 내게 다가와서 내 어깨를 감쌌다.
“정수, 미안하군. 우리 병사들이 실수했어.”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기사단장님과 안면이 있는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병사들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쌤통이기도 했지만, 이 병사들을 보니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괜찮아요. 그보다, 새로운 물건이 있는데, 한번 보실래요?”
“물론이지! 자네가 가져온 물건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저번에도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이번에도 신세 지게 생겼구만! 이번엔 어떤 마법 같은 물건인가?”
병사들을 보고 떠오른 아이디어는 역시, 돈 냄새가 나는 아이디어였다.
경비대원들이 밤에도 경비를 서는 걸 보면, 백작가 병력도 불침번을 서겠지.
또, 레드문이 뜨면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싸워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큰돈을 벌 기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혹시, 야간 순찰이나 경계 중 졸음을 호소하는 병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병사가 한둘이 아니야. 이 녀석들도 어제 졸다가 걸렸거든.”
기사단장이 정예병들을 째려보자, 두 병사는 화들짝 놀라 군기가 바짝 든 차렷 자세로 숨까지 참고 있었다.
다니엘은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잠을 못 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경계에 구멍이 생기는 건 골치 아픈 일이지. 이제 고작 투입 사흘 차인데, 벌써 새벽에 졸고 있는 병사들이 늘고 있네.”
지구나 여기나 지휘관들은 경계 근무를 중시하나 보다.
뭐, 당연한 거겠지.
“역시, 그랬군요. 그런 기사단장님의 고민을 단박에 해결해드릴 수 있는 아이템을 소개하겠습니다!”
“오오! 그런 굉장한 물건이 있단 말인가? 기대되는군!”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기사단장과 그 뒤에서 간절한 얼굴로 내 손을 바라보는 병사들.
나는 씩 웃으면서, 가방을 열어 커피 믹스를 몇 개 꺼냈다.
“이 물약은······ 부대의 경계 수준을 대폭 상승시켜줄 마법의 물약입니다.”
어디선가 동전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기분 좋은 환청을 느끼며 나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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