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구원자(1)
밤의 구원자(1)
신호와 함께 먼저 달려든 건, 황인철이었다.
“그렇게 잘난 실력 한 번 보죠!”
구경하던 아이들은 놀라서 탄식을 내뱉었다.
늘 자신감에 차 있던 황인철.
그 자신감 때문에 얄밉게만 보이던 녀석이, 이토록 빠른 줄 몰랐다.
타다닥!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황인철이 날카롭게 검을 찔러 들어갔다.
“헉!”
“안 돼!”
민희와 지수가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그만큼 황인철의 공격이 날카로웠다.
일전에 보았던 오크보다도, 훨씬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그러나 김정수는 여유롭게 검의 옆면을 쳐냈다.
캉!
황인철이 검을 놓쳤고,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검이 땅에 박혔다.
푹!
“대, 대체 어떻게······.”
황인철은 황망한 얼굴로 김정수와 자신의 검을 번갈아 보았다.
당연한 결과라는 듯 웃는 김정수가, 황인철을 향해 물었다.
“유망주라면서, 이게 끝이야?”
“방심했을 뿐이에요!”
황인철이 다시 검을 쥐고 달려들었다.
‘역시 느려.’
방심했다고는 하나, 레벨 30에 가까웠던 빚쟁이, 박대수를 상대할 때조차 느리다고 느꼈던 김정수다.
이제 갓 1층을 돌파하기 시작한 햇병아리를 상대하니, 근육의 움직임까지 보일 정도였다.
검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던 김정수는, 이번에도 여유롭게 황인철의 검을 쳐냈다.
캉, 카강!
그러나 검을 휘두를 때마다 김정수의 손바닥에 막히기 일쑤였다.
베기, 찌르기, 갈고 닦은 기본기를 넘어 응용 동작뿐만 아니라 속임수를 섞어도 간파당했다.
“으아아!”
붕, 부웅!
김정수는 이제 쳐내는 것도 그만둔 채, 뒷짐까지 지고는 여유롭게 검을 피했다.
그러다 가끔 손가락으로 황인철의 신체 부위 곳곳을 찔렀다.
레벨 120이 넘는 제임스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흥분하지 마. 동작이 커졌잖아.”
“여기 찔리면 죽는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봐야지.”
나긋나긋한 말투로, 김정수는 황인철의 심장에 비수를 찔러댔다.
김정수가 손가락으로 찔러대는 곳 중, 급소가 아닌 곳이 없었다.
“너 이런 실력으로는 토끼한테 죽을 수도 있어.”
이를 악물고 덤비면 황인철은, 마지막 말을 듣고 고함을 질렀다.
“허억, 허억. 젠장! 헛소리하지 마세요! 고작 토끼 따위에 당할 것 같아요?”
황인철은 이런 모욕적인 조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분노했으나, 나긋하던 김정수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너, 토끼 무시하다간 진짜 탑에서 송장으로 나올 수도 있어.”
김정수는 자신의 몸에 올라서 타서 파운딩을 내리꽂던 파이트 래빗을 상기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차가운 말투에서 어마어마한 분노가 느껴졌기에, 황인철이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무슨 사람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어?’
한순간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황인철은 오기로 김정수를 도발했다.
“하, 토끼의 뭘 조심하라는 건데요? 앙증맞은 앞발? 툭 튀어나온 이빨?”
“그런 게 있어. 너도 크면 알게 될 거야.”
도발해보려고 했으나, 도발에 당한 건 자신이었다.
말싸움으로는 김정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황인철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뒤로 물러 호흡을 가다듬고 큰 동작을 준비했다.
김정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스킬을 준비하나 보네. 1층을 거의 끝내고 2층을 준비하고 있다더니, 벌써 스킬이 있을 줄이야.’
종종, NPC뿐만 아니라, 등탑자가 전수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
등탑자들끼리 전수할 수 있는 스킬은 꽤 가치가 높아서, 길드의 유망주를 키울 때 쓰곤 한다.
김정수는 황인철이 스킬을 배웠다는 사실에 잠시 놀라면서도 차분하게 대비했다.
아무리 레벨과 실력이 많이 차이 난다고 할지라도, 스킬은 맨몸으로 받았다가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흐읍! 관통의 일격!”
황인철이 양손으로 검을 단단하게 쥐고 바닥을 박찼다.
처음의 찌르기와는 속도도, 힘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리한 찌르기.
그러나, 맹렬하게 찔러 들어오던 황인철의 움직임이 한순간 느려졌다.
그 모습을 보며 김정수가 씩 웃었다.
‘그림자 분신. 저 녀석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무려, 레벨 120이 넘는 제임스도 실체를 알아보지 못한 그림자 분신이다.
이제야 탑 1층을 클리어 한 애송이가 눈치챌 수 있을 리 없다.
무기를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스킬을 쓰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으니 반칙은 아니다.
대신, 크게 다치지 않을 정도만 쓸 생각이었다.
그렇게 위력이 줄어든 황인철의 스킬은 김정수가 받아치기 알맞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카앙!
김정수는 너무나도 손쉽게 황인철이 준비한 비장의 일격을 쳐냈고, 다시 한번 급소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와! 방금 황인철 스킬 쓴 거 아니야?”
“정수 형 진짜 대단하시다. 어떻게 스킬을 맨손으로 받아치시지?”
“황인철이 저렇게 밀리는 거 처음 봐.”
“오크도 사냥하고 서리 길드에서 스카우트 받았다는 것도 진짜인가 봐.”
황인철은 아이들의 반응보다도, 자신의 스킬이 막혔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바위도 뚫어버리는 일격을 이렇게 쉽게? 분명히 1층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됐다고 하셨는데, 형님들이 착각한 건가?’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여기서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다.
황인철은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만 닿으면 그걸로 족했다.
캉, 카앙!
그러나 공격이 닿기는커녕, 검을 휘두를수록 몸이 무거워졌다.
누군가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몸이 무겁다.
황인철은 언제나 재능이 있다고 칭찬받았고, 10층에 도달한 스승과의 스파링에서 져도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김정수와 싸우면 싸울수록 무력감이 느껴졌다.
황인철이 벽을 느끼고 있을 때, 김정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레벨이 낮아서 그런가, 진짜 대놓고 발목을 잡아도 모르네.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겠다.’
실험도 끝난 데다, 김민희와 김지수가 거짓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이제 스파링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이제 그만하자. 다른 애들도 배워야지.”
김정수는 달려드는 황인철의 발을 가볍게 걸어 쓰러트렸다.
퍼억!
“컥!”
황인철이 쓰러지며 얼굴을 박았다.
주르륵.
터져 나오는 쌍코피.
황인철은 멍하니 흐르는 피를 바라보다가, 손등으로 피를 슥슥 닦아내고는 다시 검을 쥐었다.
“아직 안 졌어요!”
김정수는 다시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잡는 황인철을 보곤, 양손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옆에 있는 나무를 향해 휘둘렀다.
“J.H.식 검술.”
콰아앙!
나무가 터져나가며, 허공을 수놓은 파편이 눈처럼 내렸다.
털썩!
그 굉음에 화들짝 놀란 황인철이 넘어져 떨어지는 나무 파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들도 덩달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내리는 나무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와······ 장난 아니다······.”
“그 큰 나무를 한 번에 터트렸어······.”
이미 김정수의 실력을 보았던 김지수가 씩 웃으면서 김민희를 향해 속삭였다.
“역시, 너희 오빠 개 멋있어.”
김정수는 양손 검을 다시 등에 메고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벌써 4시야? 더 늦으면 훈련할 시간도 없겠다.”
그리고 황인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등탑을 배우고 싶은 사람?”
*
다행히, 황인철이라는 아이와 대련이 끝나니 더 덤비거나 문제를 일으키려는 아이는 없었다.
역시 어떤 그룹이건 우두머리만 꺾으면 온순해지는 법이지.
쌍코피까지 터트린 건 조금 너무한가 싶기도 했지만, 감히 파이트 래빗의 위험성을 얕보는 녀석의 말에 화가 났다.
레벨 30을 훌쩍 넘긴 나도 사력을 다해야만 잡을 수 있던 몬스터를 무시하다간 큰코다치는 걸 넘어서 송장이 되기 딱 좋지.
오늘 저 녀석은 목숨 한 번은 건질 수 있는 개꿀팁을 배워간 거다.
그 값이 쌍코피 정도면 싼 거지.
나는 그렇게 조용해진 아이들이 검을 휘두르는 걸 봐주면서 자세를 잡아주었다.
대부분은 제임스가 해주었던 말을 인용하는 수준이었지만.
“몸의 중심이 안 맞아. 조금 더 자세를 낮춰.”
“급소가 노출됐으니까, 조금 더 팔을 몸쪽으로 당겨.”
웃긴 건, 황인철도 어느새 아이들 사이에서 내 눈치를 살피며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
귀를 쫑긋 세우고 아이들에게 해주는 조언을 듣고 있는 모습이, 이제야 배울 자세가 된 것 같아 피식 웃었다.
“한 수 가르쳐주겠다더니, 갑자기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야?”
황인철은 모르는 척 검을 휘두르면서도, 자존심이 긁혔는지 변명을 해댔다.
“아직 포기 안 했어요. 저는 원래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해서 이기는 스타일이라고요. 분석이 끝나면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나에게 이기려고 나에게 배운다니, 이상한 녀석이네.
하지만, 황인철은 정말 나에게 이기기 위해 분석을 시작한 건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움직임을 잡아줄 때,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몸을 움직일 때 등.
내 사소한 습관까지 전부 파악하겠다는 듯, 녀석이 뜨거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싸가지는 없지만, 열정 하나는 인정해줘야 하나?
나는 녀석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참이나 아이들을 가르치고 난 뒤, 해가 저물어갈 무렵.
“자, 최종 점검도 할 겸, 각자 수준도 파악할 겸, 이제 한 명씩 스파링을 해보자.”
황인철을 상대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맨손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공격을 적당히 흘려주며 자세를 잡아주었다.
“컥!”
“꾸엑!”
“푸억!”
고쳐지지 않는 실수는 몸으로 배우는 게 빠른 법.
마지막에는 큰 빈틈을 노려, 한 방에 끝내주었다.
그래도 수업의 가치는 있었는지, 확실히 처음에 비하면 아이들의 자세가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보람이 있네.
그리고, 마지막 순서는 민희였다.
“지수야, 신호 좀 부탁해.”
“네. 준비!”
민희는 내가 종일 가르친 정석적인 자세와는 조금 다른 자세를 잡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근데,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혹시 저 자세, 나를 따라 하는 건가?
“시작!”
지수의 신호와 함께 민희가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나는 민희의 움직임을 살폈다.
쐐액!
상대의 품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동시에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술.
이거, 내가 자주 써먹는 동작인데?
카앙!
나는 민희의 검을 쳐내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유심히 살폈다.
민희는 검이 튕겨 나가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돌리며 내 턱을 향해 발차기를 날려왔다.
부웅! 탁!
막기는 했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노련한 몸놀림이다.
이 녀석, 내가 싸우는 걸 몇 번 어깨너머로 봤다고 이 정도까지 따라 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시험 삼아 일부러 틈을 내주고, 공격을 유도했다.
민희는 그 틈으로 검을 찌르는 듯하다가, 자세를 바꿔 검을 베어 올렸다.
부웅!
나는 검을 쳐내는 게 아니라, 피했다.
‘어? 조금 이상한데?’
분명히, 황인철이라는 아이가 이 중에서 가장 강한 건 맞다.
아직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는데도 각성한 후 길드에 스카우트 되었고, 스킬까지 배웠다.
기본기도 어느 정도 있고, 안정적인 전투를 한다.
확실히 센스가 있다고 할 수 있는 수준.
그런데, 이상하게 민희의 움직임이 더 따라잡기 힘들다.
대체 무슨 이유지?
아직 전문가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지만, 황인철보다 대응하기 힘든 느낌이다.
경비대원들이 민희를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내가 처음 검을 배웠을 때처럼, 재능이 없다고 놀릴까?
왠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민희의 검을 몇 번 더 피하다가, 몸을 깊게 넣어 어깨로 민희의 몸을 강하게 밀쳐 쓰러트렸다.
퍼억! 쿵!
“크으으······ 아프다.”
엉덩방아를 찧은 민희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숨을 골랐다.
종일 검을 휘둘러서 피곤했을 텐데도 그 정도 움직임을 보이다니.
나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지만, 민희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이건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경비대원들과 상담해봐야겠어.
“자, 오늘은 여기까지!”
여기까지라는 말에, 아이들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거지꼴이 되었음에도 아쉬움을 표했다.
“며칠은 더 여기 있을 테니까, 아쉬운 애들은 내일도 와.”
“진짜요? 감사합니다!”
“아싸! 내일은 아침부터 봐주시는 거예요!”
나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고아원을 떠나는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어두우니까 조심해! 요즘 흉흉한 소문 많은 거 알지? 각성자 범죄자들도 많고, 몬스터 출몰도 잦다니까 다 같이 대로변으로 가!”
최근 탑에 오고 가느라 지구 소식을 많이 못 들었는데, 흉흉한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 각성자 범죄가 늘어났다는 이야기는 물론, 강원도 어디에선 탑에서 나오는 몬스터인 황충 무리가 논,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우리 동네는 도심과 거리가 꽤 있는 외진 곳이다 보니 치안이 썩 좋지 않아서 이런 흉흉한 일이 늘어나는 거겠지.
이런 곳에 균열이라도 일어나 황충 무리라도 나온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다.
고아원 근처는 투견길드가 CCTV를 확인할 수도 있고 순찰도 하지만, 대로변까지 가는 길이 문제다.
나는 아이들에게 거듭 주의하라고 말해주고는 배웅해 주었다.
“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아이들이 손을 흔들고 고개를 꾸벅이며 저 멀리 사라졌다.
그리고 약속대로, 다음날도 열 명이 똑같이 아침부터 고아원을 찾았다.
“흡, 흐읍!”
붕, 부웅!
아침부터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아이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오후에도 훈련을 계속하는데,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렇게 하는 거야?”
“아냐! 이렇게 하는 거지!”
고아원의 꼬마들.
아직 초등학생인 녀석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민희와 친구들이 검을 휘두르는 걸 따라 하고 있었다.
“이얍! 받아라!”
“피했지롱!”
아이들은 놀이처럼 나뭇가지를 휘두르면서 웃고 있었지만, 마냥 달갑지 않았다.
“이 녀석들! 위험하게 나뭇가지 휘두르면 다쳐! 숙제는 다 했어?”
“와아아! 몬스터다!”
“도망쳐!”
내 고함에, 아이들이 꺄르르 웃으면서 나뭇가지를 멀리 던지고는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내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민희처럼, 탑의 마력에 홀릴까 봐.
혹시 저 녀석들도 친부모들처럼 탑이라는 사지에 들어간다고 할까 봐.
가능하다면······ 아이들이 탑의 마력을 거스르고, 다른 꿈을 찾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겠어.
그날 저녁, 나는 고아원 안을 돌아다니며 탑에서 팔릴 만한 걸 찾았다.
이번에는 탑에 어떤 아이템을 가지고 올라가는 게 좋을까?
그렇게 고아원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저 멀리 원장님이 보였다.
원장님은 나를 보면서, 김이 폴폴 나는 커피포트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정수야, 커피 한 잔 마실래?”
“커피요?”
“아, 잘 시간이 다 돼서 좀 그런가?”
“아니에요. 한 잔 주세요.”
쪼로록.
비닐을 뜯어 종이컵에 부어 넣은 커피 믹스 위로 뜨거운 물이 흘렀다.
나는 원장님이 타 주시는 커피를 받아 들고 호호 불어 한 모금을 넘겼다.
꼴깍.
단맛과 쓴맛이 어우러져 입안을 채우고, 향도 좋다.
거기다 작고 간편하기까지.
언제나 훌륭한 상품이다.
“크─ 역시, 하루를 마친 뒤에는 믹스 커피만한 게 없네요.”
“그럼, 그럼. 요즘 유행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랑은 다른 매력이 있지.”
“그러게요. 사실, 어렸을 때는 이거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원장실에 몰래 들어오곤 했었거든요.”
“하하! 너희들이 계속 눈치 보면서 쭈뼛거리는 걸 내가 몰랐을 것 같아?”
그러던 중,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믹스 커피?”
경비대원들이 야간 순찰을 나설 때, 피곤과 졸음을 호소하던 게 생각났다.
인류의 생산 능력이 폭증한 건, 밤을 지배하고 나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카페인이 포함된 커피도 거기에 톡톡히 한몫했겠지.
달고 쓴 맛의 조화, 풍부한 향, 거기에 밤을 버틸 수 있는 카페인까지!
나는 커피 믹스 봉지를 움켜쥐고 웃었다.
“이걸 팔린다.”
기다려라, 98층!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K-커피 믹스의 맛을 보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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