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 등장(3)
구세주 등장(3)
오늘은 투견길드와 약초 독점공급계약을 문서화 하는 날.
나는 투견길드의 응접실에 앉아, 새로운 계약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제공한 해독초 한 뿌리가 한 병 분 정도 된다는 거죠?”
“그래. 하급 해독초를 열 뿌리 가까이 갈아 넣어야 하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효율이지.”
그거야 당연하지. 그게 몇 층의 마나를 먹고 자란 녀석인데.
“좋네요. 만드는 데는 얼마나 걸려요?”
“연금술사들이 가공하면 만드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아. 대신, 지속시간이 두 시간 정도로 짧다는 게 문제지. 알다시피, 탑 등반이라는 게 변수라도 하나 생기는 순간 몇 시간은 가뿐히 지체되니까 말이야.”
확실히, 탑은 위험한 곳이다.
0층만 해도 호기롭게 들어왔다가 송장이 되어 나가는 사람이 태반이니까.
탑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교육 등, 초보 보호 시스템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는데도 말이지.
“33층을 돌파할 때, 보통 필요한 시간이 하루야. 한 파티에 열 명의 인원이 도전하니까 하루에 최소 120병은 필요한 거지.”
거기에, 변수를 가정하면 33층을 한 번 도전하는 데 해독초가 수백 뿌리씩 필요할 거라는 한수 형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확실히 많이 필요하겠네요. 그럼 이제 공급가를 듣고 싶어요.”
“그건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투견길드의 재무담당자가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그 종이에는 최근 해독초 거래 평균과 해독제 가격, 연금술사 길드에 의뢰로 제작할 시의 평균가가 적혀 있었다.
“포션 보관용 특수용기, 연금술사 인건비, 재료 가공비, 그 외에 자잘한 비용으로 해독제의 적정 시중 판매가는 병당 250만 원 정도입니다. 현재는 그 배로 뛴 상황이고요.”
그야말로, 한 번 탑을 오르는 데 들어가는 돈이 억 소리 나는 상황이네.
“대형길드들이 약초 공급을 제한하면서 가격이 많이 뛴 게 원인입니다. 현재 상급 해독초의 현재 평균 거래가가 최소 100만 원 정도까지 올랐으니까요. 그마저도 소량이고요.”
나로서는 약초값이 올랐다는 게 반가운 이야기지만, 한수 형은 골이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돈도 돈이지만, 해독제, 해독초, 어느 쪽도 구할 방법이 없어. 최근에 강원도에 발생한 ‘황충’ 떼가 약초밭을 갉아먹어서 공급할 수가 없다는데, 그건 핑계지. 놈들 창고에는 썩어 넘치는 게 약초인데. 아무튼, 그래서 올라가려는 시도 자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그래서, 투견길드는 독점공급 프리미엄을 붙여 구매하려고 합니다. 10%를 추가로 붙여, 뿌리당 110만 원에 어떠신가요?”
재무담당자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른 시세에서 더 붙여준다는 데, 나야 좋지.
거절할 이유가 없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고맙다, 정수야. 그래서, 한 번에 거래할 수 있는 양은 얼마나 될 것 같니?”
“흠······ 한 번에 백 뿌리 정도는 공급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공급 주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될 것 같고요.”
물론, 경비대원들이 쓸 약초는 제외하고 공급할 수 있는 양이다.
98층에서 약초가 자라는 주기가 한 달 정도라고 했으니, 이 정도면 공급에 문제는 없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계약금 바로 넣어줄게.”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도장을 찍는 순간 계약금이 들어왔다.
계약을 마치고, 한수 형과 악수한 뒤 건물을 나오며 통장을 살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계약금 1억 1,000만 원.
거기에, 처음에 제공했던 해독초 20뿌리에 대한 대금 2,200만 원과 탑에서 가져온 자잘한 것들을 판매한 돈까지.
내 통장에는 지금, 1억 5,000만 원이라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살면서 만져볼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돈.
고아원에 돌아온 나는, 곧바로 원장님을 찾아갔다.
“원장님!”
“어, 정수야. 계약은 잘 마치고 왔니?”
“예! 계약금도 받아왔어요. 일단 빚부터 갚고 시작할까요?”
나는 그간 쌓인 빚을 해결했다.
지긋지긋하게 고아원을 괴롭히던 박대수가 소속된 길드에서 빌린 돈.
나는 치밀하게 계약서에 적힌 대로 돈을 계산했다.
원장님이 꾸준히 갚았음에도 이자가 쌓여 5,000만 원에 가까운 돈이 되어버렸지만, 이걸로 털어버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송금을 마치자, 원장님은 나를 끌어안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다 보니······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고맙다, 정수야. 정말 고마워.”
하지만, 원장님과 오래 함께한 나는 알 수 있었다.
원장님의 떨리는 등과, 사이사이 묻어나오는 축축한 목소리.
나는 괜히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원장님을 안아드렸다.
“이제 고생 끝났어요. 그리고, 차 사러 가요.”
“차? 차는 갑자기 왜······.”
고립된 곳에 있는 고아원의 특성상,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아이들은 원장님이 학교까지 트럭으로 바래다주시는데, 중고로 산 데다 낡아서 그런지 먼지가 폴폴 날렸다.
원장님과 아이들 건강에 좋지 않아 보이는 게 항상 마음에 걸린 데다, 원장님도 그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해하셨지.
“원장님이 항상 바꾸고 싶어 하셨잖아요.”
나는 그 길로 원장님을 모시고 아이들을 태울 수 있는 승합차를 계약했다.
차까지 바꾸고 나니 순식간에 잔액이 훅 줄어버렸지만,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여기까지 왔으니 아쉽지 않다.
지금 쓴 돈보다, 앞으로 벌게 될 돈이 몇 배는 많으니까.
*
김민희는 고아원 언덕 아래, 황무지에 덩그러니 놓인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온다.”
부릉, 끼익!
마침내 버스가 도착했고, 아홉 명의 아이들이 우르르 내렸다.
“애들아, 왔구나!”
김민희는 반갑게 아이들을 맞이하고, 고아원으로 안내했다.
“5분만 걸어 올라가면 돼. 저기야.”
아이들이 처음 와보는 김민희의 집에 신기해하고 있을 때, 황인철이 투덜거렸다.
“오느라 죽는 줄 알았네. 여긴 왜 이렇게 버스도 안 다니냐? 대체 학교는 어떻게 다니는 거야?”
그 모습에, 김지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식은 출발할 때부터 그러더니, 뭐 오자마자 불평이야?”
“내가 뭘 틀린 말 했어?”
“인철이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실제로 오래 걸렸잖아.”
“야! 너희가 그렇게 얘기하면 초대해준 민희가 민망하잖아! 좀 생각하고 말해라.”
아이들이 둘로 나뉘어 싸우려고 하자, 김민희가 다급히 끼어들어 아이들을 말렸다.
“괜찮으니까 싸우지 마. 오빠는 아침에 계약 때문에 잠시 나갔으니까, 우리끼리 몸 좀 풀고 있자.”
“알았어.”
“여기 제대로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이나 있을지 모르겠네.”
김지수가 째려보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황인철은 투덜거리며 고아원을 향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고아원 뒤편에서도 꽤 안쪽, 김정수가 훈련용으로 쓰던 나무를 부순 곳에 도착했다.
넓은 공터에서 몸을 풀던 중, 황인철이 외쳤다.
“몸을 확실하게 풀려면, 역시 가벼운 스파링이 최고지. 딱 열 명이니까, 반반 나눠서 스파링하는 건 어때?”
“좋은 생각이네. 팀은 어떻게 가를 건데?”
김민희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황인철이 씩 웃으면서 답했다.
“그래도 스파링 경험이 좀 많은 사람과 경험이 없는 사람이 붙어야 안 다치지 않겠어? 경험 없는 애들은 배운다고 생각하고 해보자.”
황인철은 평소 자신을 따라다니던 다섯 명을 자신의 팀으로 두었다.
그 모습을 본 김지수가 김민희에게 속삭였다.
“저 새끼들, 평소에 황인철이랑 스파링하던 애들이야. 누가 봐도 먼저 짜고 왔어. 진짜 이렇게 할 거야?”
“경험이 있는 애들이 살살해주겠지. 조금 있으면 오빠도 올 거고, 별일 없을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김지수의 불안과 함께, 황인철 쪽에서 한 명, 그리고 김민희 쪽에서 한 명이 나왔다.
비슷한 덩치의 남자아이들.
“민희 쪽에서 의진이, 우리 쪽에서는 남준이. 자, 준비!”
김민희 쪽에서 나온 의진은 한쪽 다리를 앞으로 살짝 두고 검을 양손으로 꽉 쥐어 내민 정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황인철 쪽의 남자아이 남준은 짝다리를 짚고 무기를 어깨에 걸친 껄렁한 자세로 씩 웃고 있었다.
“시작!”
황인철의 신호와 함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렸다.
남준이 달려 나가던 자세 그대로 자세를 낮추며, 의진의 발목을 걷어찼다.
마치, 발목을 부러트리려는 듯이 강하게.
빠악!
둔탁한 소음과 함께, 달려 나가던 의진이 고꾸라지며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컥!”
촤아악!
넘어진 충격과 얼굴을 군데군데 긁혀 피가 흐르는 데다, 퉁퉁 부어버린 발목을 붙잡고 신음하는 의진을 향해, 황인철 패거리가 낄낄거렸다.
“푸하하! 방금 넘어지는 거 봤냐?”
“어떻게 이렇게 기본적인 노림수도 생각 못 하지?”
“너희 그런 실력으로 탑에 올라가면, 고블린한테도 죽어.”
그 비아냥에, 김민희가 터졌다.
“야! 너희,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다치지 않고 가볍게 한다고 팀 나눠놓고, 이 정도로 다쳤으면 걱정하는 티라도 내는 게 맞지 않아?”
김민희는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퉁퉁 부은 발목을 붙잡고 신음하는 의진을 부축했다.
그러나 황인철 패거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비아냥거렸다.
“우리가 틀린 말 했나?”
“진짜 걱정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조언도 해주는 거지.”
김민희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가라앉히며, 무기를 쥐었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그럼 나랑도 스파링해.”
“오, 김민희. 좀 무섭네.”
의진의 발목을 걷어찼던 남준이,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김민희는 굳은 얼굴로 검을 들며 생각했다.
‘오빠가 빚쟁이들을 상대할 때의 움직임. 오크들을 상대할 때 보여주었던 움직임.’
김정수의 움직임.
화려한 듯 간결하고,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공격한다.
김민희는 머릿속으로 끝없이 김정수의 움직임을 되새겼다.
“시작!”
다시 황인철이 신호를 보냈고, 마찬가지로 김민희가 달려들었다.
“보고 배우는 게 있어야지!”
남준은 자세를 낮추며, 의진의 발목을 걷어찬 것과 같이 김민희의 발목을 차려고 했다.
김민희는 속도를 늦춰 발목을 노리는 남준의 발을 피하며 발등을 밟으려 했으나, 발차기는 미끼였다.
팍!
남준의 발이 빠르게 물렀고, 김민희가 휘청한 사이.
남준이 씩 웃으며, 김민희의 옆구리를 노려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따악!
검과 검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중심이 흔들렸는데, 어, 어떻게!”
남준이 당황한 사이, 검을 비스듬히 들어 공격을 막아낸 김민희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남준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커헉!”
남준은 잠시 허공에 붕 떴다가, 바닥을 굴렀다.
기절하지는 않았는지 머리를 털고 일어나려 바동거렸지만, 턱을 맞은 충격이 강했는지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훈수를 두더니, 너희도 별거 아니네.”
김민희는 무기를 어깨에 걸치고 덤덤하게 말하면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두근, 두근.
‘진짜 됐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오빠를 따라 했어.’
물론, 김정수가 더 빠르고, 노련했다.
하지만 그 일부라도 따라 하는 데 성공했다는 고양감이 올라왔다.
김민희가 호흡을 다듬으며 진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감돌던 침묵을 깨며, 황인철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이번에는 나랑 한번 스파링해보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야, 황인철! 너는 이미 등탑자인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 지금 민희한테 화풀이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황인철은 그냥 등탑자도 아닌 유망주다.
실력 면에서는 웬만한 성인 등탑자들을 찍어 누르기로 유명했다.
아이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황인철과 김민희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황인철이 무기를 들고 김민희를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민희야! 친구들 왔어? 늦어서 미안! 밥 먹고 하자!”
저 멀리서, 김정수가 피자를 잔뜩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
자동차 계약을 끝내고 아이들이 먹을 피자를 잔뜩 사 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아이와 치료받는 아이, 그리고 무기를 쥔 채 서로를 노려보는 민희와 남자아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상황을 파악하려는데, 민희와 대치하던 남자아이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황인철이라고 합니다. 정수 형 맞으세요? 등탑하신다던.”
“어. 내가 김정수야. 반갑다.”
황인철이라면, 이미 길드에 소속되어 탑을 오르고 있는 아이라고 했지.
황인철은 민희와 지수를 돌아보고는 웃음기를 담아 물었다.
“오늘 가르쳐주신다길래 왔는데 안 계시길래 스파링 좀 하고 있었어요. 근데 형, 혹시 지금 몇 층이세요?”
이 녀석은 등탑자라면서,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 못 들은 건가?
“너 등탑자라면서. 등탑자에게 층수를 물어보는 건 실레인 거 모르니?”
“뭐, 그게 매너인 건 알지만, 애들 가르치려면 그 정도는 밝히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배우러 왔는데, 1층에 계시면 좀 그렇잖아요. 그리고 막상 보니, 형 행색이 영······ 좀 실력이 의심된다고 해야 하나?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시고요.”
확실히 98층에 간 이후로, 장비라고는 무기만 바뀐 데다, 내가 메고 다니는 백작가의 보급형 양손 검은 장식 없이 투박한 모양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갓 1층에 들어간 등탑자와 별다를 게 없겠지.
그것도, 길드의 지원을 받지 못한 그저 그런 등탑자 말이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실실 웃으면서 사람을 도발하는 황인철의 태도는 충분히 기분 나빴다.
나한테 배우러 온 줄 알았는데, 채팅방에서 한 말처럼 진짜 내 수준을 보러 왔나?
이 자식이 사람을 살살 긁네?
하지만 상대는 민희의 친구이자 나보다 어린 등탑자다.
어른인 내가 참는 수밖에.
나는 최대한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너도 이미 등탑자라고 들었는데, 1, 2층 정도 오른 등탑자보단 훨씬 높은 층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배워도 돼.”
“사실 저는 오늘 배우러 온 게 아니라, 친구들 잘못된 습관 들까 봐 걱정돼서 온 거예요. 전 ‘금강송곳’ 길드 소속으로, 10층에 닿은 등탑자 밑에서 등탑을 배우고 있거든요. 탑은 10층부터 시작이라는데, 10층은 찍으셨나?”
황인철이 팔 쪽에 붙어 있는 길드 마크를 자랑스럽게 내밀며 말했다.
이른 나이에 등탑자가 되면 어린 나이에 성공한 래퍼나 연예인처럼 스타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애가 콧대가 높네.
이런 자신감을 보이던 화재의 신인 중, 꾸준히 살아남아 진짜 스타가 된 등탑자는 별로 없다.
비대해진 자신감이 스스로 좀먹어 파멸로 이끌기 마련이니까.
내가 보기에는 황인철도 딱 그 꼴이었다.
이쯤 되니 화가 난다기보다는 딱하다.
본인이 속한 우물이 세상에서 가장 넓다고 생각하고 생각하는 개구리 꼴이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뭐, 어린 나이에 길드에 소속된 게 자랑스러울 수 있겠지만, 세상은 넓어. 사람을 행색으로 판단하면 안 되지. 나도 10층 정도는 돌파하고 남을 실력이란다.”
“하. 끝까지 허세 부리시네······ 민희한테 미안해서 이런 말씀 안 드리려고 했는데, 길드 선배 중에 김기태라는 분이 계시거든요? 고등학교 동창이니까 아시겠죠?”
김기태.
이번에 탑에서 내려오면서 마주쳤고, 한슬기가 쫓아낸 양아치 무리를 이끄는 놈.
되짚어보니, 얼핏 본 그놈들의 팔에 붙어 있던 길드 마크가, 황인철의 것과 같았다.
“1층에 올라가신 지 얼마 안 되셨다면서요? 10층 돌파에 오크는 무슨······ 허세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실력이야 안 봐도 뻔하겠죠. 괜히 제 친구들 망치지 마세요.”
그 말에 발끈한 건, 민희와 지수였다.
“진짜라니까! 우리가 봤다고! 서리 길드 한슬기 팀장이 스카우트까지 했다고! 오빠! 명함 있지!”
“황인철 쟤 아직도 저러네? 너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두 아이의 고함에 황인철이 인상을 구겼다.
금방이라도 무기를 들어 올릴 듯 흉흉한 분위기에, 나는 민희와 지수의 앞을 막았다.
“이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좀 민망하네. 그래, 인철이 네 말대로 실력을 증명할 필요가 있겠다. 그럼 네가 내 실력 좀 확인해볼래?”
“좋아요. 가볍게 스파링 한번 하죠.”
“민희야. 신호.”
“어? 어······ 준비!”
민희는 잠시 당황하다가도, 내 눈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호를 주었다.
민희의 신호에 따라 황인철이 씩 웃으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나는 가볍게 몸을 풀 뿐,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무기 안 들고.”
“아아, 나는 맨손으로 상대해줄게.”
“뭐라고요?”
“내가 나보다 약한 상대를 상대로 싸워본 적이 없어서 힘 조절이 서툴러. 이제 막 탑을 오르기 시작한 사람 상대로 무기를 쓰면 크게 다칠 수도 있으니까.”
제임스의 허술한 검술은 숙련도가 10% 정도일 때 고작 한 손으로 사용하는 브로드 소드로도 나무를 박살 내버렸다.
살살한다고 해도, 양손 검으로 고작 1층을 공략한 어린아이를 상대하다간 큰일이 나겠지.
하지만 그걸 도발이라고 생각했는지, 황인철은 이를 악물었다.
“안 봐 드립니다. 후회하셔도 소용없어요.”
귀여운 도발이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답해주었다.
“금강송곳 길드는 원래 입으로 싸우니? 네 선배 김기태 걔도 그러더라?”
“그래요. 말로 하지 말고, 어디 한 번 붙어보죠.”
황인철은 말을 멈추고, 무기를 들어 올렸다.
녀석, 98층에서 물건 팔던 내 말빨을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몸을 적당히 풀고 민희를 보며 준비가 끝났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황인철과 내가 준비가 끝났는지 살피던 민희는 올렸던 손을 내리며 외쳤다.
“시작!”
신호와 함께 먼저 달려든 건, 황인철이었다.
“그렇게 잘난 실력 한 번 보죠!”
타다닥!
예상보다 빠른 속도.
황인철이 순식간에 나와 가까워지자, 민희와 지수가 숨을 들이켰다.
“헉!”
“안 돼!”
내가 당하리라 생각한 건지, 눈을 질끈 감는 아이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캉!
나는 손바닥으로 황인철의 검날을 강하게 쳤고, 그 탓에 황인철의 손에서 튕겨 나간 검이 허공을 날았다.
후우웅─
콱!
날아간 검이 바닥에 박혔다.
황인철은 덜덜 떨리는 손바닥을 잡은 채, 바닥에 박힌 검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대, 대체 어떻게······.”
나도 이 정도로 허무하게 끝날 줄은 몰랐기에 당황한 건 마찬가지.
물론, 황인철보다 레벨이 높은 박대수 패거리를 상대해본 적이 있긴 하지만, 녀석들은 방심했기 때문에 나한테 당했다.
하지만, 이번 상대는 싸울 준비를 마친 한 길드의 유망주.
한 마디로, 몸 쓰는 재주 하나는 특출난 놈이라는 거지.
근데, 왜 이렇게 움직임이 느리게 보이는 거지?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나는 검술에 재능이 없는······ 잠깐만.
생각해보면, 제임스의 레벨은 123이다.
그런 괴물 같은 인간이 보기에 재능이 없을 뿐이지, 평범한 등탑자의 눈으로 볼 때는 어떨까?
제대로 등탑을 시작한 지 고작 한 달이 조금 넘은 지금, 레벨 40을 바라보는 내가 재능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 사실 제법 재능 있는 걸지도?
나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검을 고쳐 쥐는 황인철을 향해 물었다.
“유망주라면서, 이게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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