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 등장(1)
구세주 등장(1)
양아치들 사이를 지나치며, 양해를 구하듯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이는 한슬기.
그녀를 보며 양아치들이 웅성거렸다.
“저 사람, 한슬기 아니야?”
“와, 씨. 맞네! 서리 길드 팀장 한슬기!”
“근데 저 사람, 지금 김정수한테 아는 척 한 거야?”
한슬기는 녀석들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유유히 내 앞까지 다가와 물었다.
“저번에 제 제안은 생각해보셨어요?”
“아직 생각 중입니다. 아직 길드에 소속될 생각이 없어서.”
“아······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당장 필요한 게 있다면 그런 것도 좋고요. 서리 길드, 생각보다 지원이 빵빵한 편이랍니다?”
자꾸 길드를 어필하는 게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한슬기는 훌륭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듯 험악했던 분위기가 한슬기 덕분에 풀렸으니까.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양아치들이 이번에는 한슬기에게 다가갔다.
“서리 길드 한슬기님 맞죠? 팬입니다!”
“실물로 보니 더 예쁘세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강해지셨나요?”
녀석들은 한슬기를 에워싼 채 말을 걸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한슬기는 침착하게 질문에 하나씩 대답해 주었다.
너무 친절한데? 대처법도 그렇고, 비주얼까지 아주 연예인 같단 말이지.
하긴, 길드의 얼굴 중 하나인 만큼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 뭐.
그러던 그녀도 한 질문을 듣고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저 친구랑 혹시 아는 사이세요? 아까 들어보니까 길드 가입 제안하시는 것 같아서요.”
“네. 맞아요.”
“아······ 혹시나 했는데, 저 자식 얼마 전에 1층 올라간 거 아세요? 서리 길드에서 스카우트라니, 무슨 사기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별 볼 일 없는 놈인데 잘 모르고 당하실까 걱정돼서요.”
녀석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종종 이런 식으로 모욕을 주곤 했다.
이렇게까지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것도 참 어마어마한 정성과 관심이네.
우리 고아원을 뒤집어놓은 박대수 때 느꼈다.
언제나 조용히 넘어가려는 태도가 정답은 아니라는 걸.
내가 녀석들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 마치 서리라도 앉을 것처럼 차가운 한슬기의 목소리가 울렸다.
“주제넘으시네요.”
“······네?”
“우리는 가능성에 투자합니다. 1층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된 게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별 볼 일 없다는 건 그쪽이 잘못 알고 계신 것 같네요. 서리 길드가 여러분보다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건······.”
“충고하려던 게 고작 그거라면, 갈 길 가세요.”
꿀꺽.
급변한 한슬기의 태도에 양아치들이 긴장하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한슬기는 언제 냉랭한 목소리를 냈냐는 듯,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정수씨, 그사이에 더 강해지셨네요? 제 생각에는 이미 10층을 돌파하신 것 같은데······ 뭐, 구체적인 층수를 묻지는 않을게요.”
저번에 했던 실수를 의식하는 듯, 한슬기는 나에게 윙크하고는 말을 이었다.
“엄청난 속도인 건 알겠지만. 확실한 지원을 받으면 더 빠르게 탑을 오를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저랑 같은 팀을 이룰 수도 있겠죠. 잘 생각해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한슬기는 유유히 탑을 향해 사라져버렸다.
양아치들 멍하니 사라져가는 한슬기의 뒤를 바라보다가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대체 뭐지? 가능성에 투자한다고?”
“10층을 돌파한 것 같다는 말은 도대체 뭐야?”
“저 김정수가 서리 길드에서 스카우트할 정도로 재능이 있다고?”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의 눈에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녀석들을 지나쳤다.
“웬만하면, 마주치지 말고 살자.”
녀석들은 우리 고아원을 괴롭히던 박대수보다 약하다.
어느 정도 강해진 지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때는 이 양아치들을 향해 복수심을 가졌던 적도 있었지만, 나는 녀석들과 다르게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는 없다.
그러니, 진심으로 다시 마주치는 일이 없으면 좋겠네.
*
양아치들을 지나쳐 지하철을 타면서 고아원의 안전을 부탁했던 친구 한솔이에게 연락해보았다.
다행히도 내가 탑에 오른 사이 박대수 무리가 다시 고아원을 찾진 않은 모양.
나는 여유롭게 양손 가득 아이들이 좋아할 음식을 싸 들고 고아원에 돌아왔다.
“형 왔다!”
“우와! 형이다!”
“이번에는 뭐 사 왔어?”
“와! 과자다! 고기도 있어!”
아이들이 내가 들고 있던 봉투를 가지고 부엌으로 뛰어갔다.
어째, 나보다 먹을 걸 더 반기는 것 같아서 조금 서운한데?
그래도 아이들이 기뻐해 주니 그걸로 됐지.
그게 내가 일하는 이유니까.
기뻐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으려니, 해나가 다가왔다.
약효가 슬슬 사라지기 시작하는 듯, 조금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오빠, 나 몸이 이상해.”
“뭐? 어디가 어떻게?”
간담이 서늘해진다.
혹시, 해주 물약에 부작용이라도 있는 건가?
해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곳, 고아원 뒷마당까지 이끌었다.
“말해 봐. 대체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야?”
“쉿! 보여줄게.”
해나는 주위를 살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왜? 아무것도 없는······ 어?”
까드득!
해나가 내민 손바닥 위에서, 주위의 수분이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얼음덩어리는 천천히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송곳 모양을 만들어냈다.
“너······! 언제부터?”
“며칠 전부터. 나 괜찮을까?”
해나가 불안한 눈으로 나와 손에 쥔 얼음덩어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 괜찮을 거야. 이거, 들어본 적 있는 증상이야. 악화한 건 아니니까 안심해.”
“정말?”
내 말에 해나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안심시키기 위해서 둘러댄 게 아니라, 정말 들어본 적이 있다.
해나처럼 저주를 오래 앓다가 극복하면, 단순히 저주를 치료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 힘은 통상적인 등탑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강력하다는 것을.
그런 이들은 일명 ‘저주 포식자’라고 불이며, 길드들이 앞다투어 스카우트하곤 한다.
“다행이다. 난 심해진 줄 알았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
우우웅.
주위의 마나가 요동치며, 해나의 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여든 마나의 중심에 있던 얼음덩어리가 천천히 부유했다.
“처음엔 들어 올리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젠 움직일 수도 있어.”
피잉!
송곳 모양 얼음덩어리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우리 근처를 비행했다.
다른 등탑자들보다 강력한 능력을 손에 넣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능력을 이 정도로 다루다니.
길드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재능이다.
피잉, 핑!
“대단하네.”
우리 주위를 몇 바퀴나 회전하는 얼음덩어리를 보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나 그 감탄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음덩어리와 함께, 해나의 몸이 휘청거렸으니까.
“해나야!”
“하아, 하아.”
나는 쓰러지려는 해나를 붙잡아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혀 주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해나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입김이 흘러나왔다.
나는 빠르게 가방 깊숙한 곳에서 해주 물약을 꺼내 해나에게 건넸다.
“마셔.”
“응.”
해나는 여전히 약물이 쓴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번에도 남김없이 다 마셨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해나의 안색이 돌아왔다.
“포션이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 저주가 완벽하게 풀린 게 아니니까, 능력은 사용하지 마. 알겠지?”
“으응. 알겠어. 약속할게.”
나는 해나를 부축해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다행히 잠시 저주의 영향으로 힘이 빠졌을 뿐인지, 물약을 마시고 혈색이 돌아온 후에는 다시 기운을 차렸다.
해나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방에서 나오자, 아이들은 그새 내가 가져온 식재료들을 이용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빠! 어디가!”
민희가 소리쳤다.
“잠깐 텃밭에.”
“알았어! 밥 다 되면 부를게!”
나는 탑에서 가지고 내려온 가방을 그대로 들고 뒷산 텃밭에 올랐다.
여기에 감자와 고구마를 심으면 신기할 정도로 큰 작물이 주렁주렁 열렸는데 말이지.
어쩌면 그게 높은 마나 농도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은 기대를 하며, 나는 가방에서 기계 하나를 꺼냈다.
부스럭.
“자, 가을만 되면 팔뚝만 한 고구마를 쏟아내던 축복받은 땅의 힘 좀 보자고.”
탑에서 내려온 뒤, 연금술 길드에서 약초 일부를 매각하고 구매한 마나 측정 장치.
마치 요리용 온도계처럼 수치를 보여주는 부분과 꽂아 넣을 수 있는 침이 있는 도구다.
용도는 말 그대로 근처의 마나 농도를 측정하는 것.
나처럼 탑에서 가져온 작물을 새로 심거나, 아니면 탑에서 구하기 힘든 재료를 지구의 것으로 대체할 때 이 기계를 이용해 마나 농도를 측정한다.
우우웅.
측정기 끝에 붙어 있는 침을 땅에 박아 넣고, 마나를 살짝 흘렸다.
땅속을 흐르는 마나가 측정기에서 흐른 마나와 반응하며, 액정에 이내 텃밭의 마나 농도가 측정되었다.
삐빅!
“어디 보자······ 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런 수치가 나오냐. 황무지도 이렇게는 안 나오겠다.”
그래도 큼직한 작물을 뽑아내던 우리 고아원 뒷산은 뭔가 특이한 게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기기에 표기된 마나 농도는 약초 농사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낮았다.
―2%.
연금술사들은 지구 토양의 마나 농도가 10%만 되어도 약초를 기르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하급 약초를 기준으로 측정한 것이고 그 10%라는 수치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거니까 약초값이 비싼 거겠지.
“하아. 어쩔 수 없지. 여기까진 예상했으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약초 지식이 뛰어난 윌리엄과 상의하고, 내가 아는 것을 토대로 챙겨온 물건들이 있으니까.
우선 마력토.
나는 밭으로 쓰던 곳의 흙을 고르고, 마력토를 부어 섞었다.
사르륵!
흙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섞였고, 나는 다시 마력 농도를 측정해보았다.
―37%.
“헉! 이렇게나?”
고작 한 줌을 부어서 섞었을 뿐인데, 마력 농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연금술사들의 예상으로는, 상급 회복초를 기르는 데 필요한 마나 농도가 50% 정도.
꽤 많이 부족한 수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마력토가 섞인 땅을 조금 파고, 가방에서 상급 회복초 씨앗을 꺼내 심었다.
다음엔, 수통을 꺼낸다.
퐁! 꼴꼴꼴······.
나는 98층에서 퍼온 물을 부었다.
단순한 물이 아니라, 98층의 약초밭을 관리하는 윌리엄의 조언에 따라 마을 근처에서도 마나 농도가 가장 짙은 물을 퍼왔다.
씨앗을 품은 마력토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조금 더 짙은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다시 마력 농도를 측정했다.
─62%
“됐어!”
간신히 50%를 넘기는 게 아니라, 한참이나 여유로운 수치.
이 정도라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흩어지는 마나를 생각해도 주기적으로 마력토와 물을 보충해준다면 약초가 안정적으로 싹을 틔울 것이다.
역시, 마나 농도가 높은 98층의 흙과 물은 이곳에서 마나 농도를 높이는 데 사기적인 성능일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았다.
“잘 자라기만 해라. 자라기만.”
약초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약초가 스스로 주위의 마나를 끌어모아 이곳의 토양 자체를 마력토로 바꿔놓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는 마력토나 98층의 물을 보급하지 않아도 되겠지.
연금술 길드나 대형 길드도 상급 약초 재배를 위한 환경을 만드는 데 자주 실패할 만큼 어려울 뿐, 한 번 성공하면 그 이후는 안정적으로 재배할 수 있는 게 약초니까.
한 번만 성공하면, 고아원 뒷산에서도 98층에서 본 것과 같은 넓은 약초밭을 볼 수 있을 거다.
빠르면 한 달 내로 성과를 볼 수 있겠지.
“윌리엄이 가르쳐준 샘물을 떠 오길 잘했어.”
허접한 썬더볼트 같은 마법을 가르치는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해나의 저주 문제도 그렇고, 약초를 심는 법도 그렇고, 역시 아는 게 많다.
역시 98층의 사람들은 누가 됐건 연줄을 대놓아서 나쁠 게 없어.
나는 남은 마력토를 섞고, 약초 씨앗들을 심은 뒤 물을 뿌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무럭무럭 자라서 빨리 돈다발이 되어주렴.”
*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형이 맛있는 거 해줄 테니까.”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향하려던 때.
고아원 앞으로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또 박대수 패거리가 돈 달라고 온 건가?
나는 잔뜩 긴장하며 고아원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부르릉, 끼익!
“오, 정수! 마중까지 나왔네!”
멈춘 차에서 내린 건, 친구 한솔이었다.
“뭐야, 네가 여긴 웬일이냐? 그건 다 뭐고?”
“저번에 얘기했던 것도 있고 해서 한 번 들렀지. 오랜만에 원장님도 뵐 겸. 아, 원장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그래. 한솔이 너도 잘 지냈니? 그 천방지축 고등학생이 이제는 듬직해졌네.”
“하하! 저도 철들어야죠. 정수야, 이것 좀 같이 옮기자. 애들 주려고 사 왔어.”
녀석은 넉살 좋게 원장님과 인사를 마치고는 차에서 피자와 치킨 같은 걸 잔뜩 꺼냈다.
귀신같이 음식 냄새를 맡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바람에, 내가 옮길 필요는 없었지만.
아이들에게 치킨과 피자를 나누어주는 한솔이를 보면서, 나는 원장님께 투견 길드에 보안 의뢰를 넣은 사실을 알렸다.
“원장님 한솔이네 형이 탑에서도 꽤 높은 곳을 공략 중인 길드의 마스터예요. 얘기해 놨으니까, 그 양아치들 찾아오면 전화하시면 돼요.”
“그래?”
원장님은 잠시 나와 한솔이를 번갈아 보다가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정수 너 탑에 올라갈 때 조마조마했는데, 한솔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잘하고 있나보구나. 내가 신경 못 쓴 부분까지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별말씀을요. 여태까지 키워주셨잖아요. 이 정도는 당연하죠.”
내 마음을 아시는지, 원장님은 그저 푸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밥 먹어 밥! 먹기 전에 손 잘 씻고!”
아이들을 불러 모아 밥을 먹이던 중.
띠리리─
한솔이가 전화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한솔이는 전화를 받은 뒤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미안하다.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왜? 갑자기 무슨 일인데?”
“······형을 포함한 등탑 팀이 탑에서 내려왔는데, 심각하게 당한 것 같아.”
“무슨 일인데?”
“33층에 맹독 지대가 있는 거 알지?”
내가 아는 게 맞다면, 독거미 소굴인 33층은 숨만 쉬어도 중독 상태에 걸릴 정도로 강한 독이 흐르는 곳.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알지. 독거미 소굴. 혹시 독에 당하기라도 한 거야?”
“어. 원래 해독제가 다량 필요한 구간인데, 최근 갑자기 시장에 해독제 유통이 끊겼어. 아무래도 누군가가 조작하고 있는 거겠지.”
“그럼 해독제도 없이 거길 들어간 거야?”
“아예 없진 않았어. 그런데, 유통을 맡은 대형 길드들이 평소의 몇 배나 되는 가격을 부르더라고.”
“그래서?”
“시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보려고 했는데, 형이 더 기다렸다간 일정에 지장이 생긴다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최소치만 들고 갔다가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거야.”
한솔이는 분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해독제에 여유가 조금만 더 있었어도 문제 될 구간은 아니었는데, 젠장······.”
갑질에 당하는 게 나뿐만이 아니다.
언제나 덩치 큰 양아치들은 존재하고, 투견 같은 성장한 길드도 더 큰 세력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그 갑질의 대가는 약자의 목숨이라는 점이 문제지.
“그래서, 한수 형은 괜찮으셔?”
“어. 형은 전문 프리스트에게 해독 받은 것 같은데, 알다시피 프리스트의 스킬은 고용인밖에 받을 수 없어.”
해독제 유통을 제한하는 세력부터, 이번에는 프리스트다.
프리스트들은 길드에 소속되는 것보다 프리스트 조합에 소속되어 파견되는 편이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길드 단위가 아닌 고용인 개인에게만 치료 혜택을 제공하는 계약 형태로, 추가 치료를 요구할 시 어마어마한 금액이 청구된다.
이런 경우, 길드 마스터인 한수 형을 제외하고는 치료해주지 않겠다고 배짱을 부렸겠지.
길드원 모두에게 프리스트를 붙여줄 수 없으니, 다른 사람들은 중독된 상태로 사경을 헤매는 중일 거다.
새로운 프리스트를 고용하기 위해서 한솔이가 발로 뛰어야 하는 상황이겠지.
“아무튼, 상황이 그래. 미안하다.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한솔이가 차에 타려는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아이템이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한솔아.”
“뭐? 왜?”
“잠깐만! 줄 게 있어!”
나는 빠르게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가, 탑을 오고 갈 때 쓰는 가방을 열었다.
“조금 남겨놓길 잘했어.”
탑에서 내려오면서 혹시 몰라 약초를 전부 매각하지 않고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나는 여러 종류의 약초 무더기 중, 한 더미를 가져다 한솔이에게 내밀었다.
“이거면 해결할 수 있을까?”
내 손에 스무 뿌리는 넘게 잡혀있는 굵은 해독초를 본 한솔이가 기겁했다.
“뭐야, 너! 이거 대체 어디서 났어! 품질도 이 정도면 상급이고, 장난 아니게 비쌀 텐데!”
어디서 났냐고?
내 머릿속으로, 98층의 약초밭에서 마치 잡초처럼 수북이 자라난 이 보라색 풀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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