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미발견 지역에서 꿀 빱니다-10화 (10/69)

보험은 들수록 좋다(2)

보험은 들수록 좋다(2)

“라면을, 드시고 싶다는 말씀이시지요?”

“큼! 염치가 없지만, 그렇다네.”

처음에는 라면을 끓여달라는 다니엘의 부탁을 받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다니엘이 백작이라는 귀족 밑에서 일하는 기사단장이라는 점.

연줄을 대놓으면 이후에 다른 물건들을 팔 수도 있고, 진귀한 아이템을 사거나 정보를 얻기도 쉬워지겠지.

이쪽에서 잘 보여야 하는 상황에, 기사단장의 부탁이라고는 꼴랑 라면 끓이기.

좋아,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 보여주지.

라면 끓이기의 정수를!

무려 10년 넘게 고아원 아이들 십수 명이 먹을 라면을 끓여왔던 실력을 발휘할 때다!

거기다가, 이번에는 퍼포먼스도 준비되어 있단 말씀.

나는 기사단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가스버너를 올렸다.

“음?”

그리고 부탄가스를 몇 번 흔든 뒤, 손바닥에서 한 바퀴 휙! 돌려 장착하고는,

딸깍, 화르륵!

스위치를 돌리자, 가스버너에 불이 올라왔다.

기사단장의 눈이 커졌다.

뒤에 서 있던 클라크를 비롯한 경비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 이 물건은 대체 뭐지? 손가락 하나 까닥하니까 불이 나오는 걸 보니, 아티팩트인가?”

“아, 비슷한 겁니다.”

“신기하군! 신기해! 수도에서나 볼 법한 걸 들고 다니다니! 역시 남다른 음식인 게 분명해!”

이거야 원, 무슨 고급 호텔 파인다이닝에서 퍼포먼스를 펼치는 기분이네.

탁탁탁!

나는 물이 끓는 동안 파와 햄 통조림을 썰어 놓고, 물이 끓자마자 면과 스프를 넣었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면이 살짝 익어 풀리기 시작하는 지금!

십 인분이 넘는 라면을 한 번에 끓여도 절대 불지 않는 정수식 공기접촉!

보글보글.

파는 식감을 위해서 어느 정도 면이 익은 후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햄과 달걀 한 알을 톡 까 넣고, 그 위에는 후추까지 톡톡 넣으면 완성!

거기에, 탑에서 라면을 먹을 때 너무 그리웠던 김치와 햇반까지.

혼신을 모두 쏟아 만든 완벽한 한 상 완성이다.

“오오오!”

“저건 뭐야? 못 봤던 건데, 채소 절임인가?”

“젠장! 냄새가 너무 좋잖아!”

이거, 나중에는 경비대원들이 김치까지 다 뺏어가는 거 아닌가 싶네.

나는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이제는 침까지 흘리려는 다니엘에게 말했다.

“자, 드셔보시죠.”

후후. 한국인의 소울푸드, 라면에 김치 조합 맛 좀 봐라!

다니엘은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고는, 면치기를 시작했다.

저건 대체 누가 알려준 거야?

후루룩!

연달아 넘어가는 면발.

다니엘은 환상의 조합이라도 찾듯이, 신중하게 햄과 면을 같이 먹기도 하고 파나 김치와 함께 먹기도 했다.

이쯤 되면 감탄사가 터져 나올 때가 됐는데······.

왜 조용하지?

그릇이 바닥을 보이면 보일수록, 나는 점점 더 조바심이 났다.

후루룩!

마지막 국물까지 마신 다니엘이 그릇을 내려놓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를 째려보는 건지, 인상 때문에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뭔가 잘못된 건가?

꿀꺽.

“어떻······ 습니까?”

나는 긴장해서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이내─

도르륵.

“어? 기, 기사단장님, 우세요?”

다니엘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정말······. 정말 내 인생을 통틀어 완벽한 식사였네.”

다니엘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콕콕 찍어 눈물을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또 무슨 문제라도 있는 줄 알고 잔뜩 긴장했는데, 설마 울기까지 할 줄이야.

휴, 다행이다.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그래. 이런 훌륭한 음식을 공짜로 받을 수는 없지. 지금은 가진 게 이것뿐이지만, 부디 받아주게.”

다니엘은 품에서 마법석을 하나 꺼내 건넸다.

“감사합니다.”

먼 미래를 보고 라면을 끓인 거지만, 바로 보상을 받게 되니 괜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헉, 저건!”

“세상에, 저런 걸 내주신다고? 돈이 얼마야!”

“하긴, 우리 때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라면이었으니.”

500만 원이나 나갔던 마법석을 보고도 놀려댔던 경비대원들.

그런 경비대원들조차 놀랄 정도로 귀한 마법석의 정체는 뭘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니엘이 내미는 바법석을 받았다.

그런데 문득,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경비대장은 경비대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귀한 마법석을 가지고 있으니, 다른 아이템 귀한 아이템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잠깐만. 이거, 잘하면 아이템을 더 털어낼 수 있겠는데?

“저 기사단장님······ 후식도 준비되었는데, 드시겠습니까?”

“후식이라? 라면만큼 특별한 것인가?”

“예, 물론입니다.”

“오오! 감사할 따름이지!”

이에 경비병들은 자기들은 이미 경험했다고 생각하는지, 킥킥 웃으면서 “초콜릿 차례다!”라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이번에는 더 특별한 거라고!

내가 꺼낸 것은 작은 스티로폼 상자였다.

드라이아이스를 채워 넣고, 테이프를 붙여 꽁꽁 싸맨.

혹시 몰라서 필살기로 하나 준비했는데, 여기에서 써야겠다.

기왕 퍼포먼스까지 하기로 한 거, 제대로 보여줘야지.

나는 포장을 뜯고, 스티로폼 상자를 열었다.

화악!

상자를 열자 드라이아이스 때문에 생긴 연기가 밖으로 넘쳐흘렀다.

그 모습이 생소했는지, 깜짝 놀란 경비대원들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허억! 세상에······ 저건 대체 뭐지?”

“불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연기가 흐르고 있어!”

술렁거리는 경비대원들 사이에서, 나는 막대 아이스크림을 꺼내 봉지를 뜯어 기사단장에게 건넸다.

기사단장은 아이스크림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손가락을 대 보고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것은, 무엇이지? 맙소사, 차갑잖아? 얼음인가? 이 날씨에 어떻게 이토록 차가운 음식이 존재할 수 있지? 이 역시도 마법인가?”

기사단장이 진심으로 놀랐는지, 온갖 추론을 쏟아냈다.

나는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서, 나도 모르게 주저리주저리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음식들을 섞은 뒤, 마치 만년설처럼 차갑게 얼린 음식입니다.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녹는 게 특징이지요. 하지만 실온에서도 금방 녹아버려서 특별한 마법으로만 유지되는, 저희 고향에서는 가히 최고의 디저트입니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멍한 표정으로 나와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보았다.

몇 번이나 침을 삼킨 기사단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정말로, 이걸 먹어도 되겠나?”

“물론이죠. 빨리 녹으니 얼른 드셔보세요.”

빨리 녹는다는 말에, 기사단장은 서둘러 막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아삭!

살짝 사각거리는 식감이면서도 부드럽게 잘린 아이스크림이 기사단장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이, 이건!”

아삭, 아삭!

기사단장은 홀린 듯이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기 시작했다.

마치 감전된 듯 몸을 떨기도 하고, 관절도 이리저리 뒤트는 게······ 괜찮은 거 맞나?

“세상에, 그 피도 눈물도 없던 기사단장님이 저렇게까지 반응하시다니.”

“라면을 먹을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이야. 대체 얼마나 맛있으면 저러시는 거지?”

경비대원들이 웅성거리는 걸 듣고 있으려니 조금 걱정됐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기사단장의 움직임이 멎었다.

고개를 숙인 채 나무막대를 물고 있던 기사단장은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기, 기사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당황한 나와 경비대원들이 우르르 몰려가 기사단장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손을 내밀어 우리를 저지하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아아. 미안하네.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말이야.”

기사단장은 나무막대마저 씹어 삼킬 것처럼 우물거리며,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다가 물었다.

“이 음식의 이름이 뭔가?”

“아이스크림이라고 합니다.”

“아이스크림이라······ 훌륭한 울림이야.”

기사단장은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되뇌더니 번개같이 내 손을 잡아 흔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려고 했으나 어마어마한 레벨 차이 때문인지 손이 빠지지 않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악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기사단장은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어정쩡한 내 자세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연신 손을 흔들며 말했다.

“고맙네, 정수. 정말 고마워. 사십 평생 가장 훌륭한 날이야.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슬슬 식욕이 떨어져 식사를 거르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던 차였는데, 다시 입맛이 돋는군.”

“하, 하하······ 만족하셨다면 다행입니다.”

“라면도 충분히 귀한 음식이라는 건 알겠지만, 귀한 재료에 특별한 보관까지 필요한 음식이라니, 이건 정말······ 맨입으로는 받을 수 없군. 말해보게. 필요한 게 있으면 최대한 구해주지.”

나는 눈을 빛냈다.

그래! 이 순간을 위해서 비장의 무기를 꺼낸 거지.

경비대원들도 아니고, 무려 백작가 기사단장이 내민 백지수표다.

뭘 달라고 해야 가장 만족스러울까?

짧은 고민 끝에, 나는 보상을 정했다.

“그러면, 혹시 무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기 말인가?”

“예. 저는 약합니다. 제 몸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만큼. 그래서 경비대원들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지만, 마땅히 사용할 무기가 없습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건 다른 무엇도 아닌 장비다.

0층에서 사용하던 브로드 소드는 이곳의 나뭇가지 하나 베는 일도 쉽지 않았으니까.

또, 탑에 올라오기 전, 고아원에 찾아와 깽판을 놓던 박대수와 오크들의 습격을 통해 제대로 된 장비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지금은 빠르게 레벨업을 하고 있기야 하지만, 수련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언젠가 나도 벽에 부딪힐 거다.

그때는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데, 지금 가진 아이템이나 스킬로 98층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을까?

정체불명의 스킬 ‘아카식 아머리’를 통해 단검을 받긴 했지만, 비장의 한수로 숨겨놓은 데다가 검의 길이가 너무 짧아 나와 맞지 않는다.

그러니, 무기부터 바꿔야겠지.

게다가, 탑을 올라갈수록 더 뛰어난 품질의 장비가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98층의 무기는 얼마나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승천하려고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내 부탁에,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훌륭한 이유군.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좋은 도구는 장인을 더욱 빛나게 하는 법이지. 좋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내어주겠네.”

“감사합니다, 기사단장님!”

“감사하긴. 오히려 해줄 게 더 없어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야. 좋아, 이제 기운이 나는 것 같으니 돌아가 보지.”

“아, 가시기 전에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말해보게.”

“라면과 아이스크림 같은 것에 대해서는 꼭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워낙 귀한 물건들이라 원래 구하기가 힘든데, 높은 분들이 찾기 시작하면 경비대원들은 물론이고 기사단장님께도 드리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한순간 경비대원들과 기사단장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라면과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더는 먹지 못하게 되는 미래를 상상이라도 한 거겠지.

기사단장은 특제 라면을 먹을 때보다도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 비밀은 내 무덤까지 가지고 가지. 기사단장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네.”

“하, 하하······ 그렇게까지는······ 아무튼, 믿겠습니다.”

기사단장은 나에게 씩 웃어주고는 돌아갔다.

“이야, 정수. 아이스크림이라고 했나? 그걸 못 먹게 된 건 아쉽지만, 덕분에 기사단장님이 별말 없이 돌아가셨어.”

“그래. 평소에 이런 일이 있었으면, 아마 사흘 내내 욕을 먹었을 텐데 말이지. 이번에는 두 시간으로 끝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다니엘, 과묵하고 근엄하게 생긴 것 치고는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사흘이나 욕을 하다니······.

그래도 별일 없이 끝났다니 다행이다.

그렇게 탑에 올라와 마법을 연습하고, 검술을 익히며 이틀이 지났다.

기사단장 다니엘은 약속한 대로 무기를 보내주었는데, 문제는······.

히히힝─!

“워, 워. 기사단장님께서 원하는 무기를 꺼내 가라고 하십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무기를 마차 단위로 보내버렸다.

“맙소사······.”

여기서는 평범한 무기들이라지만.

무려 98층의 아이템.

지구로 가지고 내려가면 최상품.

라면과 아이스크림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