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은 들수록 좋다(1)
보험은 들수록 좋다(1)
전투가 끝난 후, 난장판이 된 백화점은 정리를 위해 임시 폐쇄되었다.
결국, 빈손으로 나오게 된 민희가 투덜거렸다.
“오늘 꼭 사야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백화점이 폐쇄됐잖아. 밥이나 먹고 들어가자. 너 좋아하는 떡볶이?”
“콜!”
떡볶이 하나에 저렇게 밝아지는 민희도 참 단순하지만, 옆에서 빠르게 관심을 돌리는 지수도 만만치 않다.
난 평생 민희랑 살았어도 쉽지 않은데, 나중에 비법이라도 물어봐야겠어.
“오빠는? 같이 먹을 거지?”
“아니. 난 갈 데 있어.”
다시 탑에 들어가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오늘 외출하는 김에 점심 약속을 잡았다.
“뭐야.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대체 누굴 만나길래?”
“있어. 용돈 줄 테니까 둘이 먹고 들어가. 지수 나중에 보자.”
“네, 오빠. 감사합니다.”
지수는 순식간에 내 손에서 오만 원권을 낚아채며 민희를 끌고 갔다.
“어어? 지수야, 잠깐만! 아 오빠, 누구 보는데!”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웃으며 멀어져가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근처의 프렌차이즈 카페.
딸랑, 딸랑.
“어, 정수 왔냐. 여기.”
“오랜만이다.”
“새끼, 연락 한 번을 안 하길래 죽었나 했는데, 살아는 있었네.”
“쉽게 죽겠냐?”
만나기로 한 사람은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친하게 지내던 친구 박한솔이었다.
탑에 올라가기 전, 이 녀석에게 볼일이 있기에 급하게 만나야만 했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끝내자,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서, 돈미새 김정수 선생이 무슨 일로 밥까지 사주시겠다면서 연락을 하셨습니까?”
“그냥 오랜만에 얼굴도 좀 볼 겸, 그간 얻어먹은 거 갚기도 할 겸.”
“그 말을 믿으라고? 됐다. 네가 주는 밥 먹으러 온 순간부터 부탁 있는 거 아니까, 본론만 말해.”
“새끼. 눈치만 빨라선.”
나는 피식 웃고는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박대수가 빚을 핑계로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고아원에 찾아와 깽판을 놓은 일.
그 때문에 원장님과 민희가 다친 일과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녀석들과 싸웠다는 이야기까지.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팼다고 하지는 않았고, 어느 정도 각색을 섞었다.
“뭐? 무슨 그런 개새끼들이 다 있어!”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서, 돈 필요하냐? 얼마나? 나랑 형 이제 좀 살만한 거 알지? 도와줄 수 있어.”
“아니. 돈은 내가 벌어서 갚으면 돼. 하지만 내가 없을 때가 걱정이지.”
“그래서, 네가 없을 때 고아원을 좀 지켜달라?”
“그래, 맞아.”
이 녀석도 등탑자지만, 지금은 투견이라는 길드의 길드장인 형을 돕기 위해 탑을 오르지 않고 있다.
한솔이 스스로도 나름대로 실력 있는 녀석인데다 길드에서 운영하는 사설경비업체 업무도 총괄하고 있으니, 이런 부탁을 하기엔 딱 맞는 녀석이지.
“당연히 도와야지. 그래서, 방법은 어떻게?”
“민희한테 네 번호 줄 테니까, 연락이 오면 부탁한다. 물론 맨입은 아니고 제대로 비용 줄 거야.”
“됐다, 임마. 너는 우리 형 성격 모르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상황이라는 데 돈 받을까 봐? 걱정하지 마라. 우리도 이제 덩치 좀 커져서 그 정도 해줄 여유는 있어. 예전처럼 어디 빌붙어 다니지 않는다고.”
확실히, 녀석의 말대로 투견 길드는 크게 성장했다.
최근에는 길드 가입 신청 조건이 최소 20층 돌파일 정도니까.
한솔이의 형도 30층 이상, 그러니까 우리 고아원을 괴롭히는 박대수가 소속된 길드의 마스터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알고 있으니 상당한 실력이다.
대형길드라고 하기에는 힘들어도,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면 알 정도는 되겠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도움을 요청하기 민망할 정도로 고된 상황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성장하다니······ 대단하기도 하고, 내가 다 뿌듯하네.
“그걸 공짜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나도 양심은 있다. 아무튼, 부탁할게.”
“알았다. 근데, 민희한테 내 번호를 알려준다고?”
“뭐, 그렇지.”
“그럼 민희 나한테 소개해줬다고 생각해도 되냐?”
한솔이가 씩 웃었고, 나는 얼굴을 확 찌푸렸다.
“뒤진다. 걔 아직 미성년자야. 쇠고랑 차고 싶냐?”
“농담이야, 임마! 반응 한번 살벌하네.”
“질 나쁜 농담은 됐고, 잘 부탁한다.”
“그래. 그보다 너 1층 올라갔다며. 지금 소속된 길드는 있냐?”
“길드? 길드는 왜?”
“우리 형한테 말해서 소속만 시켜놓게. 신분증만 있어도 괜히 시비 거는 놈들은 없을 거야. 형도 자리 잡아서 이름도 꽤 퍼졌고.”
확실히, 고층 공략 전문 길드가 되면서 투견 길드의 이름이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
녀석의 말대로 길드 소속 신분증을 가지고 있으면 마찰이 생길 일이 적겠지.
나도 탑을 1층부터 차근차근 올라갔다면 솔깃했을 제안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98층에서 강해지는 중이다.
미안하지만, 이건 이 녀석에게도 밝힐 수 없지.
“됐다. 그러다 인맥 빨로 들어가는 길드라는 소리 들으면 어떡하게? 민폐 끼치기 싫어.”
“뭐, 그래.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때려죽여도 싫은 건 안 하는 놈이니까. 알았다.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 그래서, 탑에는 언제 다시 들어가냐?”
“내일. 너는 다시 탑을 오를 계획은 있냐?”
“일단 길드 안정되는 거 보고 나서······.”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묻지 못했던 근황을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
탑에 올라가기 전, 이번에 나는 가방을 소스 위주로 챙겼다.
라면 몇 봉과 케첩, 초콜릿 잼, 빨랫비누와 휴대용 가스버너 등등.
가스버너는 한 번 옮길 때 무게를 많이 차지하겠지만, 가져다 두면 두고두고 유용하게 쓸 물건이다.
매번 물을 끓일 때마다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리고 98층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법 같은 물건으로 비치지 않으려나?”
꽤 비싼 값으로 팔릴지도 모른다.
또한, 버너를 하나 팔면······ 계속해서 부탄가스를 팔 수도 있을 테고, 그럼 돈이 대체 얼마야?
“좋아좋아······.”
나는 거상의 꿈을 꾸며, 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새로운 물건을 소개해주기 위해서 경비대를 찾았다.
“다들 잘 지내셨어요?”
“아, 정수.”
“왔구만.”
손을 흔들면서 반갑게 인사했지만, 경비대원들은 손을 흔들어주면서도 어두운 낯빛으로 나를 맞았다.
“분위기가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미안하네, 정수. 우리는 최대한 노력했어.”
“조지, 그놈만 아니었어도!”
조금은 험악하기까지 한 분위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지가 왜요?”
“그게 말이야······ 때는 이틀 전. 조지가 야간 순찰을 나갔을 때였어.”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 바보 같은 놈이 결국 컵라면을 먹어버리고 만 거야······.”
설마, 그 냄새가 퍼져서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받았나?
조지와 함께 순찰을 나갔던 경비대원이 다치기라도 한 걸까?
“그래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있었어요?”
“그보다 더한 습격이 있었지.”
경비대장 클라크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백작가의 기사단장께 걸리고 말았네.”
“네?”
백작가의 기사단장?
그게 대체 누구지?
“이 영지의 주인, 백작님의 산하에 있는 모든 기사의 대장이신 기사단장. 그분께서 불시 검문을 나오셨고, 하필이면 조지와 마주쳐버린 거야.”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니까, 야간 순찰 중에 라면 끓여 먹다 걸렸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 탓에 난리가 났었어.”
비유하자면, 야간 근무 중에 라면 먹다 사단장한테 걸렸다는 거네.
등골에 소름이 돋은 나머지 뻣뻣하게 굳어 있자, 클라크가 말을 이었다.
“한참이나 욕을 먹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다음일세.”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클라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사단장님께서······ 자네를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시는데······.”
“어? 예? 저를요?”
갑자기 뭐야?
“가능하겠나? 부담을 줘서 미안하네. 위험하진 않을 거야. 그건 내가 보장하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얼굴로 사정하는 클라크의 얼굴에, 나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알았어요. 대체 날 왜 보려고 하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한 번 만나보죠.”
“고맙네! 안내하지.”
나는 클라크의 안내를 받아 경비대의 소초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자로 된 소초의 복도 가장 끝자락, 클라크의 집무실 앞에 서자, 클라크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단장님, 클라크입니다. 말씀하신 그 청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오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젊었다.
“후우. 들어가지.”
클라크는 숨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무려 레벨 130의 경비대장, 클라크가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덩달아 나도 잔뜩 긴장하며, 손에 힘이 들어갔다.
끼이익.
마침내 문이 열리고, 흰 피부에 금발, 휘황찬란한 갑옷을 차려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거물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지만─
【Lv.118 기사단장 다니엘 블랑카】
어라?
레벨 118이면? 클라크보다 낮잖아?
아니, 웬만한 경비대원들보다도 낮다.
엄청나게 강자일 줄 알았는데, 허수아비 같은 사람인 건가?
내가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다니엘의 입이 열렸다.
“그대가 정수인가?”
“아, 예. 맞습니다. 김정수라고 합니다.”
“남부 사람이라더니, 특이한 이름이군. 뭐, 좋아. 오늘 자네를 부른 건 부탁이 있어서야.”
“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 대체 저 같은 사람에게 무슨 부탁을······.”
경비대장인 클라크도 아니고, 백작가 기사단장의 부탁.
이런 사람이 나에게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부탁을 하려는 걸까?
다니엘은 살갗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맡아버리고 말았네.”
“예? 어떤 걸 말입니까?”
다니엘의 얼굴에 한순간 황홀함이 맴돌았고, 마치 무언가를 찬양이라도 하듯 두 손을 높게 들어 올리며 외쳤다.
“컵라면 말이야! 아니, 맡는 걸 넘어서 맛보고 말았지! 만물을 유혹하는 향, 정열적인 색! 환상적인 맛! 거기에 정신이 팔려 나는, 경비대를 꾸짖는 것조차 잊어버렸지.”
“저기······.”
다니엘은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홀로 심취한 듯 말을 늘어놓았다.
“그것만이었다면 할 일을 마치고 떠났겠지만, 경비대원들에게 들어버리고 말았네. 자네의 특제 라면은 컵라면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말이야!”
다니엘은 양손을 불끈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 생각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 시간이 더 걸리면 백작님이 나를 무능하다고 생각하실 텐데도. 부탁이네. 자네의 특제 라면을 맛볼 수 있겠나?”
“아······.”
“그게 엄청나게 귀한 음식이라는 건 이미 익히 들었네! 그래서 약속하겠네! 사례는 두둑하게 하고 절대로, 외부에 소문내지 않기로 약조하지!”
나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한 줄로 요약하면, 특제라면 얘기를 듣고 너무 먹고 싶어서 돌아가지 못했다 이거잖아.
“하, 하하······.”
이딴 게, 기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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