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워야 할 때(1)
싸워야 할 때(1)
고아원으로 돌아오니 난장판이 벌어져 있었다.
원장님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민희는 머리채를 잡혀있다.
민희가 우는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돈 받으러 오신 거면, 저랑 얘기하시죠.”
이 양아치 새끼들의 정체는 우리 고아원을 후원한다며 접근해, 애들을 탑에 밀어 넣는 악질 길드 소속의 등탑자들.
처음에는 친절한 봉사자이자 후원자인 것처럼 행사했었다.
아이들에게 옷과 책을 사주었고, 경영 압박을 시달리고 있던 원장님에게 먼저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서기도 했었지.
“정수야, 어릴 때 형이 잘 해줬잖아? 피자나 치킨도 사주고.”
하지만 이내 속내를 드러냈다.
“정수도 다 컸으니까 슬슬 그거 갚을 때가 된 것 같은데.”
부모가 등탑자이기에, 각성의 잠재력이 있는 아이들을 선점하여 착취하려는 것.
결국, 나이가 차고 각성한, 내 나잇대 아이들이 저놈들의 꼬임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지금은 생사도 모른다.
그리고 원장님이 쓴 차용증도 교묘한 수작에 말도 안 되는 고리대금으로 바뀌어 있었다.
두들겨 패주고 싶은 마음이 크지마는, 차용증을 쓴 만큼,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는 게 맞겠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미친놈들을 섣불리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탑에서 내려오자마자 마법석 등의 물건을 팔았고, 총 천만 원이 수중에 있다.
원금은 얼마 되지 않을 테니, 갚을 수 있겠지.
“조용한 곳에서 저랑 이야기하시죠.”
“저, 정수야······.”
“원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야, 정수 많이 컸네. 그래, 어디 한 번 싸나이들끼리 이야기해보자!”
민희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놈이자, 세 놈 중 우두머리인 최대수를 선두로, 놈들이 나를 따라왔다.
최대수의 레벨은 27쯤으로, 9층을 공략한 이후로 탑을 오르지 않고 있다고 기억한다.
난이도가 급격히 오르는 10층의 벽에 막힌 거겠지.
다른 놈들도 레벨은 20을 훌쩍 넘겼으니, 한가락씩은 하는 놈들.
나는 녀석들을 데리고, 내가 수련할 때 쓰던 한적한 공터로 향했다.
“이야, 정수. 형들을 이렇게 으슥한 곳까지 데려가는 걸 보니, 우리 오늘 얻어맞는 거 아니냐?”
“하하! 형님, 저 무서워서 다리가 덜덜 떨립니다. 업어주시면 안 됩니까?”
녀석들이 낄낄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설령 싸워서 이긴다고 한들, 녀석들의 뒤에는 길드가 있다.
이 녀석들 말고, 진짜 이런 상황을 유도하고, 이 녀석들보다 강한 등탑자들이 소속된 길드가.
나 혼자서는 다 막을 수 없다.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분노를 눌러 참았다.
하지만 이 양아치들은 오늘 원장실 문까지 부수어 놓았는데, 과연 조용히 돌아갈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나도 보험을 들어두는 게 좋겠지.
나는 그림자 분신을 소환하는 동시에 그림자 은신을 사용해, 녀석들의 그림자로 들어가게 했다.
그런데.
【마나 농도가 희박하여, 스킬에 제약이 생깁니다】
【스킬 제약】
-그림자 분신 : 본신이 가진 80%의 힘을 낼 수 있고, 5분간 유지됩니다.
-그림자 은신 : 10분간 유지됩니다.
응? 마나 농도 부족?
윌리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마나부족증후군이, 마나가 부족한 환경 때문이었다고.
아카식 아머리.
이 정체불명의 스킬도 마나 농도의 영향을 받는 건가?
각각 5분과 10분이라······.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괜찮겠지.
그렇게 시간을 끌 일은 아니니까.
나는 밑동만 남은 나무 앞에 멈춰 서서, 녀석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얼마입니까?”
“우리 정수, 돈 좀 만졌나 본데. 해봐야 1층에 갔을까? 거기에서 버는 돈으로 갚을 수 있겠어? 석 달 밀린 이자만 오백이야.”
최대수가 낄낄거리면서 말했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원금은 천만 원쯤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원장님이 원금을 갚기 시작한 후, 녀석들은 이자율을 말도 안 되게 올려버렸다.
고작 석 달에 500만 원이라는 이자가 붙을 정도로.
원장님은 그 이자를 갚는 것조차 허덕이셨고, 결국, 이 지경이 됐다.
“후. 알겠습니다. 일단 밀린 이자부터 해결하죠. 조만간 원금에 이자까지 다 해결하겠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현금다발을 꺼냈다.
물건을 판매한 뒤, 원장님을 놀라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대금을 전부 현금으로 가져왔으니까.
정확히 500만 원.
돈을 꺼내는 도중에도, 녀석들의 시선은 내 가방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떼 같은 눈빛이었다.
“한동안 찾아오지 마세요. 돈이 준비되면 먼저 연락할 테니.”
“하하! 이것 참. 정수가 많이 컸구나? 진짜 벌이가 괜찮은가 본데? 득템이라도 했어? 근데 말이야······.”
돈을 받아 챙겼음에도, 녀석들의 눈에서는 탐욕이 사라지지 않았다.
박대수가 웃으며,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방금 이자가 올랐어. 천만 원은 받아 가야겠는데?”
이 개 같은 양아치 새끼들.
나는 다시 분노를 꾹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차용증 가지고 제대로 얘기하시죠.”
“차용증? 야, 이 새끼야. 내가 차용증이야. 돈 빌려놓고 달라면 줄 것이지, 말이 많아?”
박대수가 내 가방을 빼앗으려 했으나, 이건 내줄 수 없었다.
애들 맛있는 거 사줄 돈이고, 해나의 치료제까지 들어 있는 소중한 가방이니까.
내가 가방을 확 잡아채자, 박대수의 인상이 구겨졌다.
“오늘은 오백만 가지고 돌아가세요. 앞으로 차용증 없으면 얘기 안 합니다.”
“하, 이 새끼······. 좀 컸다 싶더니, 네가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얘들아. 9층 등탑자의 무서움을 알려줘라.”
박대수의 부하들이 몸을 풀며 앞으로 나오려고 했다.
결국, 이렇게 나오는구나.
후환을 만들지 않기 위해 참아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참기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녀석들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분신에게 썬더 볼트를 사용하게 했다.
파직─!
스파크 튀기는 소리가 울렸다.
“뭐야? 왜 두 놈 다 대답이 없······.”
털썩!
박대수가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두 놈이 쓰러졌다.
몸 이곳저곳에 하얀 연기를 피워올리면서.
레벨 20을 넘긴 등탑자니까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무, 뭐야! 이 새끼들 왜 이래!”
“왜 그러긴. 나쁜 짓 하려다가 천벌이라도 받았나 보지. 벼락을 맞은 것 같기도 하고?”
“이 새끼가!”
내 비웃음에, 박대수가 달려들었다.
나는 잔뜩 긴장하며, 곧 날아들 녀석의 주먹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녀석은 힘이 아니라 빠른 속도를 이용해 싸우는 타입일 터.
그런데, 녀석의 주먹이 너무나도 느리게 보였다.
제임스에 비하면 말이지.
콱!
나는 한 손으로 슬로우 모션처럼 날아오는 녀석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끄윽! 이, 이 새끼 뭐야!”
당황한 박대수가 반대 손을 내지르려고 했다.
나는 녀석이 주먹을 내지르기 전에, 잡은 손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복부를 가격했다.
뻐억─!
“커헉!”
복부를 얻어맞은 녀석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진짜 레벨 27이 맞나?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긴장했던 게 오히려 허탈할 정도였다.
하지만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 새끼들한테 당했던 세월이······ 기억들이······.
나는 쓰러진 박대수의 얼굴 위에, 남은 500만 원을 던졌다.
“자. 이건 치료비.”
퍽!
“끄으······.”
박대수는 아직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지, 얼굴에 날아오는 돈뭉치를 피하지도 못한 채 꺽꺽거렸다.
“아, 맞다. 너네, 원장실 문 부쉈더라? 이건 우리 집 문짝 수리비.”
나는 던져놓은 500만 원 중에서, 100만 원을 집어 다시 가방에 넣었다.
“다시 고아원 찾아오면 뒤진다, 진짜.”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려다가 좋은 생각이 났기에, 나는 다시 박대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방금 이자가 올랐어. 무슨 말인지 알지?”
나는 남은 400만 원을 마저 가방에 넣으며 씩 웃어주었다.
얼굴이 구겨지는 꼴이 꽤 볼만하네.
그렇게 고아원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박대수의 고함이 들려왔다.
“김정수 이 개새끼! 탑에서 좀 빠르게 컸나 본데, 감당할 수 있겠어? 우리 형님이 몇 층 등탑자이신데! 형님이 돌아오시면 넌 뒤졌어!”
이 깡패 새끼들의 보스 놈은 레벨 50이 넘는다고 들었다.
랭킹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지만,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레벨.
그 정도라면, 전격 마법이 통하지 않을 테고, 당연히 기습도 통하지 않겠지.
솔직히 두려웠다.
내가 맞는 것보다도, 고아원이 잘못될까 봐.
그래서 그간, 놈들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걸 정상으로 돌리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이를 악물고 탑을 올랐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을 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방법을 안다.
나는 박대수의 복부를 가볍게 한 대 더 걷어찼다.
“─꺽!”
“병신. 감당은 네 형님이 해야 할 거야. 경고했다. 다시 찾아오면 그땐 뒤지는 거야.”
나와 눈이 마주친 박대수는 이를 악물고 있다가 픽 쓰러졌다.
일을 쳐놨으니, 이제 나는 98층에서 더 노력하고, 더 많은 걸 배워서, 빠르게 강해져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게.
*
집으로 돌아오자, 민희가 입구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민희는 화들짝 놀라며 어색하게 물었다.
“와, 왔어? 그 새끼들은?”
“돈 주고 조용히 보냈어. 마침 탑에서 가져온 돈이 있어서.”
“······거짓말.”
“무슨 소리야?”
민희는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다 봤어.”
“뭘 봐?”
“그 새끼들 때려눕히는 거.”
녀석들에게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탓에, 민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되도록 애들에게는 그런 폭력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내가 빚쟁이들을 두들겨 패놨다는 걸 알게 되면 아이들과 원장님이 불안해할지도 모르지.
그러니 이 일은 아무도 몰라야만 한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내 경고에 민희는 웬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더니, 조건을 제시했다.
“조건이 있어.”
“조건?”
나는 섬뜩함을 느끼며 민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내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싸우는 법을 알려줘. 나도 탑에 올라갈 거야.”
“뭐? 갑자기?”
“갑자기 결정한 건 아니야. 몇 달 전부터, 탑에서 계속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
등을 타고 솟아오르는 소름.
그건, 내가 겪은 것과 같은 증상이었다.
탑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마력이 있다.
누군가는 도시 괴담 같은 거라고 하지만, 아직 설명되지 못했을 뿐 실존하는 현상이다.
나도 겪었던 일이고, 특히 가족이 탑에서 사망한 우리 같은 고아들에게 더 자주 발현되는 증상이다.
동생들은 이 증상을 겪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미 민희도 탑의 마력에 홀리고 있을 줄이야.
“그것뿐만이 아니라, 나도 고아원을 지킬 힘이 있어야 할 것 같아. 오빠가 없을 때, 녀석들이 다시 오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최근에는 균열도 많이 일어나고 있고.”
확실히, 언제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법은 우리 같은 고아까지 보호하지 못했고, 탑 밖에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빈도도 늘어나고 있으니까.
“하지만, 네 생각보다 등탑은 위험한 일이야.”
여전히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다.
내 동생을 사지에 밀어 넣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를 설득하는 민희의 눈에 굳은 의지가 보였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민희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네.
“오빠가 없을 때는, 내가 동생들을 지켜야지. 내 위로는 다 고아원을 떠났으니까, 오빠를 빼면 내가 장녀잖아?”
민희는 나만큼이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어떨 때는 나보다도 더 사명감에 불타는 녀석이다.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강해질 방법을 찾아내겠지.
고아원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마트에 장을 보러 갔을 때도 탑에 대해 캐묻는 것을 보고 설마 했는데, 진짜 탑에 들어가고 싶어 할 줄이야······.
등탑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 최고겠지만, 민희의 말에도 설득력은 있으니 당장은 민희의 등탑 준비를 막을 방법도 없다.
“내가 말려봐야 몰래 할 거지?”
민희는 내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이건 하겠다는 거네.
등탑의 기본은 전투.
전문가가 붙어 있지 않으면 언제든 크게 다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숨어서 몰래몰래 등탑을 준비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내가 가르치는 편이 낫겠지.
또, 민희의 말대로 내가 없을 때 또 박대수 같은 놈들이 찾아오면 호신 정도는 할 줄 알아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하아. 알았어. 대신, 나는 탑에 오르는 걸 우선으로 하고, 남는 시간에 널 가르칠 거야.”
민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진짜? 약속한 거야!”
“나중에 시작할 테니까, 지금은 가서 원장님 도와드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민희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괜히 두통이 밀려온다.
다른 애들은 탑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이제 집으로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이 늘었다.
장을 보는 것 외에도 민희를 가르치는 것, 그리고 해나의 몸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
나는 곧바로 해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다행히 해나는 깨어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몸을 살짝 움츠리게 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아, 오빠 왔구나.”
“응. 몸은 좀 어때?”
“그냥······ 평소랑 같지 뭐.”
애써 웃는 해나의 얼굴은 마트에 나가기 전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겨울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여전히 두꺼운 이불을 덮고, 실내인데도 목도리까지 두른 녀석.
나는 가방 깊은 곳에 고이 보관해두었던 물약을 꺼냈다.
“이거 마셔봐.”
“이게 뭔데?”
“탑에서 아는 마법사에게 받아온 거야.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더라. 믿을만한 분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셔.”
“응.”
해나는 해주 물약을 받아들었다.
약이 쓴지 입에 닿자 인상을 조금 구기긴 했지만, 대견하게도 한 병을 다 비웠다.
“하아······.”
나는 굳이 효과가 있는지 묻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얼음덩어리라도 된 것처럼, 항상 해나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한기가 멎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십여 분 뒤, 해나의 안색이 한층 나아졌고,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오빠······ 이거 진짜 효과가 있나 봐.”
나는 조심스럽게 해나의 손을 쥐었다.
손조차 잡기 힘들었던 그 잔혹한 한기 대신, 온기가 느껴졌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직 저주가 다 풀린 건 아니라 계속 약을 먹어야겠지만, 계속 구해다 줄 수 있어. 이제 아프지 않아도 돼.”
“고마워, 오빠. 고마워.”
감정이 복받쳤는지, 해나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연신 고맙다고 말하는 해나의 목소리가 축축했다.
여기서 만족하진 않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저주를 완벽하게 끝내는 그 순간까지, 방법을 찾아내야지.
방을 나오자, 민희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었다.
“여기서 뭐 해? 원장님은 괜찮으시고?”
“괜찮으셔. 그보다, 해나에게 걸린 저주······ 정말 풀린 거야?”
“완벽한 건 아니야. 하지만 꾸준히 약을 먹으면 일상생활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민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서없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나, 탑 등반 연습용 장비 사줘.”
“뭐?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해나 저주를 풀 방법이 탑에 있다며? 아픈 가족을 낫게 할 방법이 있다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성미에 안 맞아. 빨리 탑에 오르고 싶어.”
“야······.”
“그리고 나도 돈을 벌어서 고아원 운영에 보태고 싶고.”
역시, 가족이 걸린 문제에서 민희를 말릴 방법은 없었다.
민희의 결단력과 실행력이 좋은 게 이렇게 난감해질 줄이야.
해나의 저주를 완화한 게 98층에서 구해온 물약이라는 건 밝힐 수 없는 상황.
나는 어쩔 수 없이 민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아─ 그래. 장비를 사주는 대신, 나도 조건을 걸 거야.”
“뭔데?”
민희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너무 엄격한 조건을 걸면 반발만 심해질 테니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조건을 걸어야지.
“위험하게 친구들끼리 연습하지 말 것. 고아원에 있는 다른 애들 앞에서 연습하지 말 것. 등탑은 성인이 된 이후에, 나와 상의하고 나서.”
“뭐야, 별거 아니네! 아예 막지는 않는다는 거잖아? 그치?”
민희는 나중에 적당히 핑계를 만들어서 등탑을 막으려던 내 속셈을 눈치챈 건지, 핵심을 찔렀다.
“어? 그, 그치.”
“그럼 됐어. 그럼 간다고 해둘게.”
왠지 말리는 기분인데······.
그래도 각성의 전조가 보인다면, 무기 쓰는 법을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꼭 탑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지역 경비대에 취직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장비도 없이 친구랑 몸 쓰는 법을 익혀보겠다고 푸닥거리라도 하면 다치기 딱 좋다.
다치기 전에 장비라도 사주는 편이 마음이 놓이겠지.
“언제 갈 건데?”
“내일 가자! 내 친구 중에서도 재능있는 친구가 간대서 같이 가자고 했어. 같이 가서 사줘.”
“······알았어. 가자.”
완전 말렸네.
*
다음 날, 나는 민희를 따라나섰다.
아침 일찍부터 나가자고 보채는 바람에, 졸린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하음, 여유롭게 나와서 사 오면 되지, 뭐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나와?”
“가서 이거저거 따져보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잖아. 아, 저기 있다! 지수야!”
“민희야! 아, 오빠 안녕하세요.”
“응. 안녕.”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열심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연예인 얘기, 디저트 얘기, 학교 얘기······.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장비를 구경하면서도 수다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거 봐. 문양 진짜 예쁘다.”
“이것도 디자인이 진짜 예쁜 것 같아.”
얇은 갑옷에 들어간 문양과 갑옷의 디자인.
사실, 저런 것들은 탑에 들어가면 쓸모없는 것들이다.
가볍고, 튼튼하며,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탑에서는 오로지 그것만이 내 목숨을 지킬 수 있으니까.
“그거 말고, 저거 사. 그건 움직일 때 다리가 걸리적거릴 거야.”
“세상에. 오빠, 진심이세요?
“저건 너무 못생겼는데.”
“디자인이 전부가 아니야. 장비는 실용적인 걸 사야지.”
“맞는 얘기지만, 판매처에서는 그런 걸 다 고려해서 나온 디자인이라고 하더라. 기왕 쓰는 거, 예쁜 거로 사면 좋잖아.”
민희는 내가 고른 장비 쪽으로 움직이면서도, 홀린 듯이 처음에 봐둔 장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많이 알아봤다고는 해도, 역시 초짜는 초짜네.
정보는 언제나 100% 진실이 아니다.
아이템 판매자들은 아이템을 판매하면 그만이니, ‘실전을 고려한 디자인’ 같은 가짜 정보를 퍼트린다.
디자인만 보고 샀다가 실전에서 다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에, 어떻게든 말려야 한다.
나는 황급히 민희와 지수의 관심을 돌렸다.
“자, 자. 갑옷은 미뤄놓고, 일단 무기 먼저 보자. 손에 맞는 무기를 찾는 게 진짜 오래 걸리거든.”
두 아이는 얼떨결에 끌려가면서도 무기를 구경하자는 말에 혹했는지, 다행히 잠자코 따라왔다.
“와! 무기도 종류가 진짜 많다.”
“민희 너는 무슨 무기가 좋아?”
“나? 나는······.”
그때였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외부에서 균열 발생, 몬스터가 침입을 시도하고 있으니, 손님분들은 침착하게 대피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모, 몬스터?”
“오빠, 이게 진짜 상황이야?”
“······일단 나가자.”
그러나 이내, 어디에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와 섬뜩한 파열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는 건물 안까지 들려왔다.
쾅!
무언가가 통유리로 되어있는 창문을 부수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녹색 피부의 근육질 거구.
도끼나 망치 따위의 거친 무기를 든 야만 전사들.
“크아아아!”
“세상에, 몬스터다! 오크야!”
“꺄아악!”
“경비! 경비 불러, 빨리!”
건물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나는 덜덜 떨고 있는 민희와 지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내 뒤에 붙어서 절대 떨어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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