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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을 굴복시키다.
하윤이 불쑥 내게 물었다.
“그 양반,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죽일 거지?”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
조카에게 잘못된 것만 가르친 거 같아 누나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꼭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그러면?”
만약 하윤이나 휘니, 둘 중 한 명이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면 생각이 달랐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복수를 결심했을 거다.
하지만 양주르 공작의 술수에 당한 것은 내 분신이었다.
심지어 그 분신 하나 정리하는 것에도 양주르 공작의 사병들은 엄청난 낭패를 겪었다.
분신의 시야로 그 모습을 직접 본 나였기에 복수심보단 같잖음과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양주르 공작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행운 스탯을 깎으면서까지 죽일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다.
행운 스탯 덕에 성좌 룬을 두 개나 뽑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렇게 느꼈다.
‘공작쯤 되니 보물을 많이 가지고 있겠지?’
그렇다고 응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양주르 공작의 목숨을 노리는 대신 그가 가진 금은보화를 노리기로 하였다.
양주르 공작에게 피해도 주면서 금전적으로 이익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참고로 다른 사람의 아이템을 절도할 때 인벤토리 능력을 사용하면 그 아이템의 가치에 따라 행운 스탯이 깎였다.
좋은 아이템이라면 오히려 살인보다 더 깎이기도 했다.
‘인벤토리를 사용할 때 행운 스탯이 깎인다면 인벤토리를 사용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현실에서도 인벤토리 사용하는 도둑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제아무리 도둑이라도 양심 없는 행위.
나 역시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인벤토리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또한 내가 직접 갈 생각도 없었다.
분신이 당한 일이니, 분신이 직접 복수하면 그림이 더 좋지 않겠는가.
‘마침 상처가 다 치료됐군.’
다친 분신을 역소환하면 빠른 속도로 상처가 회복되었다.
엄청난 중상이었는데도 벌써 멀쩡해졌다.
5강까지 강화를 질러서 그런지 다소 더러워진 것 말고는 장비도 멀쩡하였다.
지금 바로 양주르 공작에게 보내도 문제 될 건 없으리라.
“양주르 공작을 응징하는 일은 이 친구에게 맡기자고.”
“분신으로 뭘 하려고?”
“약탈.”
분신은 바로 자리를 떠났다.
휙!
분신이 떠난 자리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얻어올 보물들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영웅급 이상의 아이템이 있다면 양주르 공작뿐만이 아니라, 왕의 보물 창고도 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양주르 공작은 왕의 삼촌이니, 왕에게도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절대 보물이 탐나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
“각하!”
자신의 침실을 지키는 병사의 외침에 양주르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적이 침입한 것이냐!”
“예! 외문 경비가 보고하기를, 창고 방향으로 누군가가 침입하였다고 합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찾을 필요도 없었다.
민건우일 게 뻔했다.
그와 원한을 맺은 게 최근 정도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었다.
‘어지간히 분노했던 모양이군. 바로 쳐들어온 것을 보면 말이야.’
일국의 왕족을 공격하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역시 민건우란 자와는 상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놈은 절대 저희를 뚫을 수 없을 겁니다.”
“내 가족들의 경호도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현재 그의 주변을 지키는 사병의 수는 무려 200명이었다.
이 중에 ‘영웅급’ 특성을 가진 사병도 다섯 명이나 됐다.
‘놈이 아무리 강해도 이 경호를 뚫고 나를 어쩔 순 없을 거다.’
히든 직업을 가졌거나 암살자라면 또 몰랐다.
하지만 민건우의 직업은 검사였다.
암살과는 거리가 먼 직업이었으니 병사들을 믿고 다시 잠을 청해도 될 거 같았다.
그렇게 그가 안심하고 다시 잠을 청할 때, 경호 책임자가 그를 찾았다.
“뭣이? 창고가 털렸다고?”
“······죄송합니다.”
양주르 공작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창고가 털렸다는 것은 그의 보물이 약탈당했다는 의미.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설마 놈이 처음부터 노리던 것은 내 목숨이 아니라, 보물이었던 건 아니겠지?’
잠시 그런 생각이 들자, 괜히 창고를 지키는 인력까지 자신의 경호로 두었나 하는 후회를 느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무엇을 잃었는지 알아야 했다.
양주르 공작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놈이 무엇을 가져간 것이냐? 설마 칼바테인을 빼앗긴 것은 아니겠지?”
칼바테인.
이 아이템은 승리의 검이라 불리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네시아 왕실을 상징하는 검이기도 했으니 이것만큼은 잃어서는 안 됐다.
“귀환석과 룬, 강화석, 포션 등 유저 전용 아이템을 가져갔습니다.”
“가벼운 것들 위주로 챙겼군. 그나마 다행이야.”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손실이 작지는 않았다.
앞으로 유저의 수가 많아질 것이니 특히 더 손실이 크게 느껴졌다.
유저들이 늘수록 가치가 커질 아이템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왕실 소유의 보물을 잃었다면 그는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나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개 왕족의 목숨보다 왕실의 보물이 훨씬 소중했으니까.
“놈이 또 창고를 털었다고? 이 무능한 놈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창고 침입을 허락하다니!”
그는 너무 일찍 안도하였다.
설마 민건우가 다시 찾아올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번엔 기어코 칼바테인을 뺏겼다는 사실이었다.
칼바테인은 절대 잃어서는 안 될 보물 중의 보물.
양주르 공작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승리의 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찾아야 한다!”
“예!”
양주르 공작은 칼바테인을 되찾기 위해 민건우의 범행을 공론화하려고 하였다.
일개 유저의 도둑질을 막지 못한 건 실로 굴욕적이었으나, 칼바테인은 굴욕을 감수해서라도 되찾아야 했다.
“놈이 그 시간에 신전에 있었다고?”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민건우에게는 알리바이란 것이 있었다.
범행이 벌어지던 그 시간에 신전에 있었다고 밝혀진 것이다.
“빌어먹을!”
억지를 부려 증거를 무효화하고 싶었으나, 상대는 신전이었다.
그가 수를 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자와 협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협상?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하멜의 조언에 그는 노여움을 참지 못하였다.
사실 그도 민건우와 협상하려는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측근의 입에서 협상하자는 말이 흘러나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치 민건우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각하! 피하십시오!”
-키아아아아!
갑자기 하늘에서 무언가가 괴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양주르 공작 바로 근처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 무언가는 바위였다.
“···저건 공중 몬스터인데, 공중 몬스터가 어찌 네시아 왕국에 출현했다는 말이냐?”
양주르 공작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금 죽을 뻔하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에 맞고 영문도 모른 채 비명횡사할 뻔했던 것.
“아무래도 그 민건우라는 자의 소환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소, 소환수라고?”
믿을 수 없었다.
민건우의 레벨은 10대 후반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겨우 10대 후반의 레벨인 유저가 공중 몬스터를 소환수로 둔다니?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신의 노여움을 산 게 아니라면 뜬금없이 공중 몬스터가 그를 노릴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
이제는 나의 영토나 다를 게 없는 모험가 거리.
그 모험가 거리의 중심에 있는 여관에서 나는 전리품을 확인하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리품이란 양주르 공작의 창고를 털고 얻어온 아이템들을 말하였다.
“귀환석은 왜 이렇게 많이 챙겼어?”
하윤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참고로 귀환석이란 해당하는 층으로 다시 이동시켜주는 돌을 말하였다.
즉, 11층을 공략하다가 죽을 위기에 처했거나 재정비가 필요하다면 10층 귀환석을 이용하여 되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필요 없어도 유저들에게는 필요할 테니까.”
“아하. 그러고 보니 다른 파티에는 전이술사가 없지?”
귀환석은 우리 파티에는 그리 필요한 아이템은 아니었다.
정하윤이라는 전이술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우리 파티만 그런 거고 다른 파티에서 이 귀환석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11층부터 18층까지.
단 한 층도 재정비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아마 19층도 그럴 것이다.
원작에서도 딱히 언급이 안 됐던 곳이니까.
심지어 위험하기는 또 얼마나 위험하던가.
우리여서 쉽게 돌파했던 거지, 다른 파티에게는 11층부터 난관이었다.
미로보다 길 찾기 까다로운 정글 맵에 각종 디버프를 일으킬 정글의 해충들, 리자드맨이라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몬스터까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사망률을 기록할 수도 있었다.
“근데 정작 우리 파티에 쓸모 있는 아이템은 별로 없네?”
하윤의 말에 나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칼바테인이란 검을 바라보았다.
보물 창고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에 숨겨져 있기에 최소 영웅급 검일 줄 알았다.
지키는 병사도 네 명이나 됐다.
죽음(어차피 역소환될 뿐이니.)도 불사하며 약탈한 전리품이었다.
그런데 정작 귀환석보다 훨씬 가치가 낮은 희귀급 아이템이었다.
룬이나 다른 아이템들도 우리 파티가 쓸 것은 없었다.
포션 정도만 조금 쓸 만할까?
“그나마 이 망토는 쓸 만할 거다.”
“우리 파티는 웬만해선 노숙은 안 할 거 같은데···.”
하산의 망토라는 아이템도 얻었다.
추위, 더위를 막고 방어력도 꽤 출중한 영웅급 아이템이었다.
사막이나 설원에서 노숙한다고 해도 이 망토만 있으면 걱정할 게 없으리라.
똑똑!
“사장님, 엄청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지미라는 이름의 사내가 우리의 숙소로 올라왔다.
그는 빈민가에서 깡패 노릇 하던 사내였는데, 지금은 마치 내 부하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엄청난 손님? 누가 왔는데?”
“공작입니다! 무려 양주르 공작이 찾아왔다는 말입니다!”
호들갑 떠는 지미와 다르게 나는 무덤덤하였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네. 오틴이 무섭긴 무서웠나 보지?’
30 레벨 이상으로 이루어진 파티도 상대하기 까다로웠을 몬스터가 외뿔 독수리였다.
겨우 10층에서 거주하는 탑의 주민이라면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라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사냥꾼 관련 특성으로 무장한 휘니조차 외뿔 독수리를 단독으로 사냥할 수 없을 정도니까.
“안으로 모셔라.”
원래 같았으면 우리가 나가서 마중해야 했지만 굳이 예의를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다.
양주르 공작은 여전히 우리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뭐 심적으로는 고마운 마음이 더 크지만 말이야.’
잃은 건 없고 얻은 건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 협상한다면 더 많은 걸 얻게 되겠지.
그래서일까?
나는 양주르 공작을 원망하는 마음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다.’
얻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얻어낼 생각이다.
그가 가진 땅, 그리고 사병들까지.
만약 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목숨을 가져가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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