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외전 : 가족이란(2) (143/144)


143화. 외전 : 가족이란(2)
2023.04.15.


1초, 2초, 3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에이프릴이 입을 연 것은, 내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즈음이었다.


“와……. 축하드려요!”

방긋 웃는 에이프릴의 얼굴은 아무런 부정적인 감정 없이 마냥 환해 보이기만 했다.

괜찮은…… 거겠지?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아 조금 머뭇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


“고마워. 우리도 너무 뜻밖이라…….”

“저도 놀랐지만 기쁜 일이잖아요? 축하해야죠! 연회를 열어요, 어머니, 아버지!”

에이프릴은 무척 신이 난 듯한 기색으로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언뜻 과장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에이프릴을 면밀히 살펴보았으나 어떤 그늘이나 침울한 기색은 엿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 기우였던 듯싶다. 걱정이 너무 많아도 탈이라니까…….


“아기 이름은 정하셨어요? 아, 태명부터 지어야 하죠?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역시 좋은 뜻을 지닌 이름으로…….”

연신 해맑게 웃는 낯으로 재잘재잘 떠드는 에이프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작게 한숨을 쉰 나는 설핏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에이프릴이 소외감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서…….

* * *



“…….”

달칵,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프릴은 참았던 한숨을 크게 내쉬며 침대로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작년 여름, 아란사의 인형 가게에서 글로리아가 사 주었던 하얀 토끼 인형이 에이프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그 토끼 인형을 품으로 가져와 꼬옥 끌어안았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두 분에게…… 아기가 생겼구나……. 결국…….’

두 사람 앞에서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에이프릴의 마음은 못내 심란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이 좀 더 단단해졌을 때쯤…… 자신이 어른에 가까워졌을 때쯤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동생이 생기는 건…… 기쁜 일이지. 축하해야 할 일이고. 두 분들 닮은 아기는 정말 천사 같고 귀여울 거야.’

하지만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니까.

어쩌면, 더는 예전처럼 사랑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친자식이 생기면, 부모님의 관심이 그쪽으로 더 쏠리는 건 당연할 테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이미 분에 넘치게 사랑받았노라고, 애써 마음을 달래 보려 해도…….


“흑…….”

자꾸만 슬퍼졌다.

에이프릴은 토끼 인형을 꼭 끌어안고 조용히 울었다.

의젓해져야지, 몇 년 후면 성년이 되니까. 두 분에게 부끄러운 딸이 되면 안 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 * *

요즈음 에이프릴이 영 이상하다…….


‘자꾸 나를 피하는 것 같단 말이지.’

아니, 나뿐만이 아니다.

그레이안도 피하는 것 같다.

기분 탓이면 좋겠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에이프릴의 행동은 우릴 피하는 게 분명하단 말이지.


‘예전 같았으면 토끼 모습으로 방에 쳐들어 와서 같이 자자고 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고…….’

가족끼리 오붓하게 모이는 저녁 식사나 다과회, 나들이도 거르기 일쑤.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있기는 하지만, 에이프릴답지 않았다.


‘이대론 안 되겠어. 에이프릴과 진지하게 대화해 보자.’

그전에 일단, 그레이안과 긴히 상의해야겠지.


“안나, 그레이안을 보러 가야겠어. 준비해 줘.”

“네, 마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부탁하자, 안나가 어깨에 두르는 두툼한 숄과 장갑을 들고 왔다.

그것들을 차례로 착용하고서, 모자를 쓴 다음 실내 슬리퍼를 부츠로 갈아신었다.

오늘은 눈이 잔뜩 왔기 때문에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를 신어야 했다.


“좋아, 가자.”

“네……. 그런데 어디로……?”

“연무장!”

군인처럼 각 잡힌 자세로 앞장서자, 안나가 허둥지둥 따라왔다. 나를 말려야 하는지 살짝 고민인 듯한 얼굴로.

.

연무장에 도착해 보니 기사들의 수련이 한창이었다.

그레이안은 날카로운 눈으로 기사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쫓고 있었다.

저런 눈빛을 받으면 저절로 군기가 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솔즈베리 가문의 기사들은 쉬운 동작 하나를 수련하는 것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합!”

“이얍!”

구석에 가만히 서서 기사들의 수련을 지켜보는 것이 지겨워질 때쯤,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그레이안은 기사들에게 충고와 격려 몇 마디를 건네고는 등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공교롭게도 그와 나의 눈이 딱 마주쳤다.


“부인……!”

당황해 입을 달싹이는 그를 향해 나는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레이안은 냉큼 이쪽으로 달려오더니, 내 주변을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했다.


“부인, 이 추운 날에 어째서 밖에 나와 계십니까. 조심하셔야 하는데…….”

“상의할 게 있어서요.”

나는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꼬옥 껴안았다. 늑대 수인의 따뜻한 체온 덕분에 추위로 얼어붙은 몸이 사르륵 녹는 것 같았다.

기분 좋은 온기에 나도 모르게 너른 가슴팍에 뺨을 비비며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깜빡한 채로.


“부, 부인…….”

그레이안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올 즈음에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후다닥 몸을 떨어트리며 머쓱하게 딴청을 피우자, 그레이안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그의 커다란 두 손이 뻗어와 내 양 뺨을 포옥 감쌌다. 손바닥의 열기가 따끈따끈했다.


“여기 말고, 편히 앉아서 대화할 수 있는 곳으로 가시지요. 밖이 추우니 오래 나와 계시면 안 됩니다…….”

“응, 알았어요.”

실없게 웃자, 잠시 멈칫한 그가 이내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그레이안이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이렇게 안기는 것도 이젠 익숙해져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이쪽을 힐끔거리는 기사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미 오래전에 해탈해서인지 부끄러움은 아주 조금밖에 들지 않았다.

.

그레이안과 나는 본채의 1층 거실로 와서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따뜻한 홍차와 초콜릿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초콜릿 케이크는 요즈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아직 입덧을 심하게 하진 않았지만 입맛에 다소 변화가 생겼는데, 초콜릿 케이크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맛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과 부드러운 시폰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맛있는 걸 먹으니 기분이 한결 좋아져서, 나는 좀 더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에이프릴이 걱정되는 건 여전했지만.


“다른 게 아니라, 에이프릴이 요새…….”

―우리를 피하는 것 같다는,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전하자니 그레이안의 표정이 대번 심각해졌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얼마 후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안도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그레이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만 느끼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그레이안이 느끼기에도 요새 에이프릴이 우릴 피하는 것 같다면 확실했다. 에이프릴은…… 정말로 우리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왜?


‘……설마 우리 사이에 아기가 생겨서인가?’

마침 고개를 든 그레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이심전심이었다.

나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에이프릴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죠?”

“불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한 그레이안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답답한 듯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에이프릴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는 편이 좋겠어요.”

“네, 찬성입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되도록 빨리 얘기했으면 하는데…….”

“이따 저녁 식사 끝나고 말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요즈음 들어 은근히 저녁 식사 자리를 피하는 에이프릴을 낚아채(?)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에이프릴이 배부를 때 살살 달래면서 얘기해 보자는 계획이었다.

좋은 생각이었다. 우리 토끼는 배부를 때 특히 무방비해지니까…….


“좋아요. 주방장한테 가서 에이프릴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 차려 달라고 해야겠어요!”

“그리고 선물을 준비하면 어떨까 하는데…….”

“선물? 어떤 선물이요?”

“에이프릴이 요새 미술에 관심이 많으니…….”

그렇게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계략을 세웠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해 질 무렵.

철저하게(?) 준비한 계획을 실행할 때가 왔다.

.

에이프릴은 깊이 잠들면 토끼 모습으로 변하곤 했다.

그리고 늘 오후 4~5시 사이에 30분쯤 낮잠을 잤다.

현재 시각은 오후 5시 8분.

나는 지금 서재에 와 있다.

에이프릴이 이곳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후후후, 바보 같은 토끼……. 세상모르고 자고 있군.’

토끼는 휴식용 소파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토끼를 포획했다.

능숙하게 품에 안자, 토끼는 몸을 살짝 뒤척이다가 편한 자세를 잡고 계속 잠을 청했다.

잠결이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레이안과 내가 저녁을 먹자고 하기도 전에, 혼자서 식사를 해치운 후 ‘이미 먹었다’는 핑계로 도망쳤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평소보다 일찍 만찬을 준비했으니까.


‘오늘 저녁은 기필코 배불리 먹이고 말겠어.’

서재를 빠져나온 나는 토끼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만찬실로 향했다.

얼마 후 만찬실에 도착해 보니, 테이블 위에는 이미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고 그레이안이 창가를 서성이며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 부인!”

“쉿.”

마침 나를 발견한 그레이안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토끼가 아직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듯 멈칫한 그레이안이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하게 시선을 주고받은 우리 둘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여기까진 전부 계획대로.

이제 토끼가 잠에서 깨기만 하면 된다.

혹시 도망치려 한대도, 사용인들이 문을 지키고 있기에 금세 붙잡힐 것이었다.


‘자, 어서 일어나라, 토끼……!’

내 텔레파시가 통한 것인지(?) 눈꺼풀을 부르르 떤 토끼가 이내 천천히 눈을 떴다.

까만색 콩알 같은 두 눈에, 토끼를 내려다보는 내 얼굴이 가득 비쳤다.


“……!”

화들짝 놀란 토끼가 바로 뻣뻣이 굳더니 눈알만 도로록도로록 움직였다.

잠시 후 상황을 파악한 듯, 나를 경계하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 토끼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퇴로를 찾는 게 확실해 보였다.


‘이 녀석이 어딜.’

나는 토끼가 도망치지 못하게 꽈아악 끌어안았다. 그러자 바로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캬앙!”

역시 사나운 토끼답게 앙칼진 반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토끼의 주둥이에 쪽 뽀뽀를 하며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 우리 귀여운 토끼.”

“……!”

“봐,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턱짓으로 식탁을 가리키자 토끼가 나를 한 번 노려보고는 쓱 고개를 돌려 식탁 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앙증맞은 앞니가 다 보이도록 주둥이를 쩍 벌렸다. 마구 깜박거리는 두 눈은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에이프릴을 낚는 덴 맛있는 음식만 한 게 없다.’

토끼가 음식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레이안과 나는 은밀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공범끼리의 유대감이었다.


‘자, 그럼…….’

일단 먹이자.

배불리 먹이고 보자!

나는 토끼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재빨리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었다.

먹기 좋게 잘린 조각을 토끼 주둥이에 들이밀자, 토끼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자, 어서 먹어. 주방장의 특제 소스를 곁들인 송아지 스테이크야.”

“……컁!”

토끼는 그런 걸로 자신을 낚으려 하다니 어림도 없다는 듯이 앞발을 꽉 쥐었지만…….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였다.


“오구오구, 맛있어요?”

결국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한 토끼가 주둥이를 오물거리며 나를 째려보았다.

그 모습도 너무 귀여워서 꼭 껴안고 싶었지만, 밥 먹을 땐 건드리면 안 되니 꾹 참았다.

그렇게 식사를 시작한 토끼는 스테이크 한 덩이를 다 먹고 다른 음식들도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령 튀긴 닭 요리는 토끼가 스테이크 다음으로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앞발과 주둥이, 가슴 털에 기름을 다 묻히며 닭다리를 뜯는 토끼의 모습은 매우 야만스러웠다.

이따 목욕하자고 해야지.


“맛있어?”

“웅꺗.”

“많이 먹어.”

토끼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어쨌든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기쁘고 흐뭇했다.

.

저녁 만찬을 끝낸 후, 토끼를 깨끗하게 씻겨 주었다.

임신한 몸이라 조심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토끼 목욕을 도와주는 것쯤이야 힘들지 않았다.

물론 토끼가 도망치거나 장난을 치면 힘들지만, 오늘따라 토끼는 요조숙녀처럼 얌전했다. 내가 힘들지 않게 배려해 주기라도 하듯.


“착하네, 우리 토끼.”

“…….”

분홍색 수건이 돌돌 감싸인 토끼가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토끼 이마에 쪽 뽀뽀해 준 후, 물기에 젖은 털을 성심껏 말려 주었다.

얼마 후 뽀송뽀송해진 토끼가 내 옷자락을 앞발로 꼬옥 쥐며, 내 품에 살며시 안겨 왔다……. 으아악 너무 귀여워!


“토끼야!”

“끄앵!”

‘너무 귀여워서 견딜 수 없는 기분’에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토끼를 꽉 껴안고 여기저기 마구 뽀뽀를 남발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쓰다듬었다……. 다소 광기였던 듯싶다.


“캬우웅……!”

“하하……. 미안.”

극대노한 토끼를 열심히 달래 준 후에야, 원래 계획대로 ‘진지한 대화’ 단계에 착수할 수 있었다.

물론 선물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준비한 거란다.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그레이안의 인자한 말에 토끼가 귀를 살짝 쫑긋거리더니, 떨리는 앞발로 선물을 받아들었다.

선물을 받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하긴, 좀 뜬금없긴 하지.’

토끼는 짧은 앞발로 주섬주섬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이어서 상자를 열고 선물의 정체를 확인한 토끼가 까만 눈을 동그랗게 떴다.

토끼의 수염이 사정없이 떨렸다.


“끼앙……!”

“어때? 좋아?”

“…….”

토끼는 대답 없이 선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급 화구 세트와 희귀한 색의 물감들.

특히 청금석을 갈아서 만든 아주 선명한 파란색 물감은 구하기 까다로운 물건이었다.

토끼는 감동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눈물을 또르륵 흘렸…….


‘……?!’

아, 아니, 왜 울어?!


 
토끼가 울어서 나도, 그레이안도 당황했다. 우리 둘이 허둥지둥하는데, 토끼의 형체가 일렁이더니 곧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하얀 머리와 분홍 눈의 소녀, 에이프릴이 선물을 꼭 껴안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감사해요……. 어머니, 아버, 지……. 흑…….”

흐아앙―.

기어코 목놓아 우는 에이프릴을, 우리는 10분 넘게 달래 주어야 했다.

.



“……다 울었니?”

묻는 말에 에이프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훌쩍이고 있었지만, 어쨌든 울음은 그친 상태.

나는 에이프릴의 얼굴을 부드러운 손수건으로 닦아 준 후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왜 울었니?’라거나, ‘왜 요새 우리를 피해 다녔니?’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굳이 에이프릴의 입으로 듣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에이프릴, 엄마가 많이 사랑해.”

“……!”

그리고 에이프릴을 꼬옥 안아 주었다.

그레이안도 냉큼 곁으로 다가와 우리를 한꺼번에 감싸 안으며 말을 보탰다.


“아빠도, 많이 사랑한다.”

“넌 언제까지고 우리의 소중한 딸이야. 그 사실은 영원히 변함없어.”

“…….”

에이프릴은 한동안 조용히 있더니, 내 품에서 조금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 두 분의 친자식이 아니잖아요.”

에이프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을 하며 스스로 상처받기라도 한 듯이.


“심지어 저는…… 아버지 같은 늑대 수인도 아니고…….”

에이프릴이 또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팔을 풀고 두 손으로 에이프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에이프릴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에이프릴. 잘 생각해 봐.”

“……?”

“난 내 아버지의 친자식이었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였잖아. 완전히 콩가루 집안이었다고!”

“…….”

“가족이 되려면 꼭 혈연이어야만 하는 거 아니잖아.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고, 피가 섞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족을 이룰 수 있어. 친자식이라고 무조건 사랑하는 부모도, 친부모라고 무조건 사랑하는 자식도 없어. 가족이란 건…….”

“…….”

“가족이 되기로 약속한 사이면 충분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해.”

어느새 에이프릴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도 울어서 눈이 붉게 충혈된 데다 눈가가 퉁퉁 부었는데, 또 울려나 보다. 울보 토끼 같으니라고.

나는 에이프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가족이고, 넌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이야. 그리고 얼마 후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언니나 누나가 되겠지. 에이프릴, 네가 소외되는 게 아니야. 우리에게 새 가족이 생길 뿐이지.”

“……흑…… 흐엉…… 흐어엉……!”

에이프릴은 또 크게 울기 시작했지만, 마음이 풀릴 때까지 다 울고 나서는 우리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 뒤로 에이프릴이 우리를 피하는 일은 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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