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외전 : 가족이란(1) (142/144)


142화. 외전 : 가족이란(1)
2023.04.12.



 
때는 1월.

에이프릴의 14세 생일을 축하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흐아아악……. 피곤해…….”

일 때문에 수도에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온 나는, 목욕을 마치자마자 머리도 안 말리고 침대 위에 뻗어 버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조율자의 일……. 너무 힘들어…….’

그렇다. 내 일이라 함은, 세계의 조율자로서 지닌 책무였다.

‘정치에는 최소한의 간섭만’ 한다는 다짐은 꿋꿋하게 지키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세계의 조율자’란 그런 위치였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따르고 우러러보며, 그에 따른 책임도 어깨에 짊어지게 되는 것.

그런 연유로 이번에도 수도로 가서 아인스턴 측 사절단과 엘로윈의 대표들과의 협상을 중재하고 왔다.

뭐, 대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어렵진 않았지만…….


‘아인스턴에서 너무 욕심을 부렸어.’

아인스턴의 진보된 마도 공학을 엘로윈과 향후 50년간 공유하는 대신, 그 50년 동안 엘로윈에 있는 거대 마정석 광산 중 한 곳의 채굴권을 요구한 게 문제였다.


‘말도 안 되지.’

마정석 채굴권은 확실히 이득을 보는 것이지만, 마도 공학의 연구 성과를 공유받는 것은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다.


‘엘로윈에서 마도 공학 연구를 아예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모로 보나 아인스턴이 더 이득인 제안이었기 때문에, 사절단 대표가 그 얘기를 꺼낸 순간 협상 테이블의 분위기가 싸늘해졌었다.


‘그 분위기를 수습하느라 골치 아팠지.’

결국 어떻게 조율했냐면, 아인스턴에서 그 해의 연구 성과를 들고 오면 엘로윈의 학자들이 그것을 검토한 후, 유의미하다 판단되면 그 해만 광산 채굴권을 넘겨주기로 결정되었다.


‘엘로윈이 더 이득인 방식이지.’

연구 성과를 건네받기만 하고 광산 채굴권을 안 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양아치 같은 짓을 할 엘로윈 왕국이 아니었다. 나 역시 엘로윈의 결정이 합당한지 앞으로 해마다 지켜볼 거라고 했고.

아무튼 그래서 아인스턴 측 사절단이 협상 내용을 아인스턴의 새 국왕에게 전달했고, 국왕이 의회를 소집해 회의를 거친 후 엘로윈 측 제안을 승낙하기로 최종 결정이 났다.

아인스턴 측은 엘로윈보다는 내 존재를 더 믿는 것 같았다. 엘로윈에서 사기를 치더라도, 내가 저지해 줄 거라는 믿음이 깔려 있어 보였달까…….


‘영 부담스럽군…….’

참고로 아인스턴의 새 국왕은 투표로 뽑힌 사람이다. 아인스턴도 엘로윈처럼 국왕 선출 제도를 도입했으니까.

종신직이지만 세습은 금지되었으니 새 국왕의 자녀가 왕위를 이을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명목상 ‘왕자’나 ‘왕녀’로 불리는 것은 사실.


‘……제이드가…….’

왕자라니!

으아악! 너무 안 어울려!

그렇다. 아인스턴의 새 국왕은 칼윈 공작이 되었다. 이제 그의 이름은 루벨라이트 칼윈 아인스턴이다.

그리고 제이드는, 제이다이트 칼윈 아인스턴 ‘왕자’ 전하이고…….


‘진짜 안 어울려…….’

물론 제이드는 요새 왕자라는 칭호보다는 ‘칼윈 소공작’이라 불리긴 했다.

왕위가 세습되지 않기에 제이드의 후계 자리는 칼윈 가에 있었고, 루벨라이트 칼윈이 국왕의 책무를 다하느라 공작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 제이드는 그 대리나 다름없었다.


‘조만간 정식으로 공작위를 받을 것 같기도 하고.’

제이드는 지금 15세니까…… 파격적으로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는 셈이다.

역시 그 녀석도 여러모로 규격 외라니까. 비범해도 너무 비범해. 더 크면 뭐가 될지 두렵다…….


‘하여튼…… 난 피곤하니 이만 자야겠어.’

옆에서 안나가 머리를 말리고 주무셔야 한다며 잔소리했지만…… 밀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흐아암…….”

일어나 보니 오전 7시였다.

어제 저녁에 너무 피곤해서 식사도 안 하고 잤더니 배가 몹시 고팠다.


“배고파…….”

“조금만 기다리셔요.”

안나가 친언니처럼 나를 달래며 머리를 빗겨주었다.

거의 10시간쯤 잤나……? 정말 오래 잤는데도 여전히 피곤했다. 어째 이상한데…….


‘만성 피로인가…….’

건조하고 뻑뻑한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사용인들이 트롤리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치고는 양이 많은, 온갖 음식의 향연에 나는 얕고 긴 탄식을 흘렸다. 이걸 어떻게 다 먹지……. 그런데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든다…….


“천천히 드세요.”

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스푼을 집어 들었다. 따뜻한 클램차우더를 한 입 먹고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크루아상에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발라 먹었다.


‘흐아악, 맛있어…….’

그 외에도 여러 음식을 하나씩 맛보며 행복한 식사 시간을 가졌다.

얼마 후.

배부르다는 생각이 들어 포크를 슬그머니 내려놓자, 거의 다 텅 비어 있는 그릇들이 그제야 시야로 들어왔다.


‘아니, 나 혼자 이 많은 걸 다 먹은 거……?’

내가 원래…… 이렇게 잘 먹었던가?


“요즈음 부쩍 식사량이 느셨네요. 정말 보기 좋아요.”

안나가 후후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 역시 어색하게 따라 웃었지만, 마음속 의문은 가시지 않은 채였다.

나 요새 왜 이렇게 많이 먹지……?

.

그 이유는 뜻밖에도, 매달 하는 정기 검진에서 알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4주차이십니다!”

“네……?”

어안이 벙벙한 채 있자니 주치의가 뭐라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내 귀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4주면…… 어, 언제지? 깜빡하고 피임 안 한 날에 된 건가?’

그레이안도 나도, 아직 젊은데다 에이프릴이 있으니 당장은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늘 철저하게 피임해 왔는데…… 한 번 깜빡한 날에 덜컥 아기가 들어설 줄이야.


‘어…… 어떡하지? 낳아야겠지? 당연히?’

혼란스럽지만 어쨌든 그레이안과 나의 아이였다. 낳는다는 선택지 외엔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혼란스러웠다!


‘아니 내가 임산부가 되다니……? 아기가 생기다니? 어떡해? 무서워!’

“……유산이 많은 시기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 약이나 드시면 안 되고, 음식도 조심하시고, 입덧이 심해질 텐데 태아에 충분한 영양이 공급되려면…….”

“흐앙…….”

“……고, 공작 부인?”

“그레이안 좀 불러줘요…….”

그리하여 안나가 그레이안을 불러왔고, 기사 연무장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그레이안이 주치의에게 긴히 설명을 들었다는 이야기.

그레이안의 반응을 간단히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충격, 놀람 → 기쁨 → 걱정 → 기쁨 → 걱정 → 기쁨(무한 반복…….)

+미안함


“4주차라면, 대체 언제…….”

“우리 그…… 그날이요……. 피임 안 한…….”

“아……? 아……. 헉…….”

차마 입에 담기 낯부끄러운 일화라서 작게 속삭여 뭉뚱그렸다. 당사자인 그레이안은 바로 알아들었지만.

늘 철저히 해 왔던 피임을 왜 그때만 못했겠는가. 그게 다, 장소가……!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이 늑대!”

원인 제공자를 마구 때리자 그가 어깨를 움츠린 채 얻어맞으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찰싹찰싹! 내 손바닥이 그의 등에 마찰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부, 부인……. 일단 진정하시고…….”

“흐아앙, 나 어떡하냐고요……!”

“제가 잘하겠습니다……!”

“뭘 어떻게 잘할 건데? 낳는 건 내가 하는데! 네가 낳냐?! 내가 낳지!!”

낳을 때 엄청 아플 거 같아서 무서웠다. 왜 나만 낳냐. 남편도 같이 낳아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제가 이런 몸이라서…… 임신이 안 되는 쓸모없는 신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부인…….”

“흐아앙……! 미워!”

왜 이렇게 그레이안이 얄밉고 미워 보이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다가, 제풀에 지쳐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다닥 내 곁으로 다가온 그레이안이 안절부절못하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이 용서해 주길 기다리는 개 같았다.


“……그레이안, 늑대로 좀 변해 봐요.”

“……? 네? 아, 알겠습니다.”

내 요구에 그레이안은 순간 당황한 듯 보였으나 얼른 늑대로 변했다.

내가 손으로 소파 옆자리를 탁탁 두드리자 늑대가 냉큼 올라왔다. 나는 두 팔을 뻗어 늑대를 꼭 끌어안고 보송보송한 촉감을 만끽했다.

애니멀 테라피였다.


“이 바보 같은 늑대…….”

“깽…….”

“날 고생하게 만들다니……! 용서 못 해!”

“웕……!”

늑대를 뒤집어 배를 간지럽히는 등, 잔뜩 괴롭히고 났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차츰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아기를 가졌으며, 약 10개월간 고생해야 하며, 끔찍한 고통을 견디고 출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시 용서 못 해.’

분이 안 풀려서 늑대를 한 차례 더 괴롭혔다. 아예 죽은 척하고 있는 늑대를 보자 어이가 없었다.

.

혼란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나는 한결 침착해졌다. 그리고 내 안에 자리한 생명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자애일까, 여자애일까?’

아직은 알 수 없겠지? 뭐, 남자애여도 좋고 여자애여도 좋지만…….


‘나를 닮았을까, 그레이안을 닮았을까? 아니면 우리를 반반 섞은 모습일까?’

주치의 말로는 이 아기도 늑대 수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일 수도 있고.

수인 아기는 모체의 자궁에 있을 때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안전히 자라기 위해, 출산 때까지 쭉 인간 모습으로 지낸다고 한다.

그러다 생후 3개월쯤 됐을 때 처음으로 동물 모습으로 변하는데, 본능적으로 하는 일이라 통제가 안 된다나…….


“어릴 때는 정말 뜬금없이 변신하기 때문에, 돌보는 사람이 여러모로 애를 먹지요. 하지만 세 살쯤 되면 동물로 변하는 빈도수가 줄어들어 비교적 편하게 돌볼 수 있다고 합니다.”

말인즉 세 살 때까지는 지옥이란 얘기로군……. 그래, 좋아. 유모를 구해야겠어. 나 혼자서는 절대 못 돌봐.


“여하튼, 아이가 수인인지 아닌지는 태어나기 전까진 알 수 없습니다. 태어나고 나서는 제가 알아볼 수 있지요. 같은 늑대 수인일 테니까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다른 데 흘렸다.

아기의 태명은 뭐로 하는 게 좋을까?

이름은? 이름도 잘 지어야겠지?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서…….


“태명은 에이프릴에게 지어달라고 할까요?”

“……!”

그제야,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에이프릴에게도 말해야 하잖아……!


‘동생이 생겼다고…….’

불현듯 걱정이 들었다. 에이프릴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혼란스러워하는 건 아닐까?

나는 내 등 뒤에 앉아 나를 끌어안고 있던 그레이안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으며 걱정을 담아 물었다.


“에이프릴이 이상한 생각 하면 어떡하죠?”

“예? ……아.”

거기까진 생각 못 해봤는지, 그레이안은 뒤늦게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이 바보. 나는 그의 가슴팍을 찰싹 때렸다.


“그렇다고 에이프릴에게 숨길 순 없는 노릇이지요…….”

“그건 그래요…….”

그랬다간 오히려 에이프릴로 하여금 소외감이 들게 할 수도 있으니까.

결국,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비장하게 에이프릴의 화실로 쳐들어갔다.

물감 묻은 앞치마를 두른 채 캔버스 앞에 앉아 있던 에이프릴이 우릴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는지 방금까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프릴이 이쪽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어머니, 아버지? 무슨 일로…….”

“…….”

서로에게 할 말을 미루듯 눈치만 보던 나와 그레이안은, 결국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게, 있지…….”

“에이프릴, 놀라지 말고 들으렴…….”

“……?”

이어서 폭탄처럼 던져진 한마디에,


“너에게 동생이 생겼단다.”

에이프릴은 삽시간에 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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