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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외전 : 한여름의 공포 특집(4) (141/144)


141화. 외전 : 한여름의 공포 특집(4)
2023.04.08.



 
토끼 녀석……. 요즘 어리광도, 질투도 부쩍 늘었단 말이지.

하지만 그래서 더 귀엽다.

토끼는 성질을 부릴수록 더 귀엽다!

조그만 주제에 ‘캬악!’ 하며 성질을 부려대니까 너무 귀엽다!


‘아, 너무 좋아!’

나는 넘치는 감정을 주체 못 하고 토끼를 꼬오옥 끌어안았다.

갑자기 왜 숨 막히게 끌어안는 거냐며, 토끼가 또 화를 내면서 앞발을 무자비하게 휘둘렀지만…….

토끼 앞발에 맞는 것은 기분이 좋으니까 괜찮다!


‘……그나저나, 저 늙다리 유령은 도대체 언제쯤 포기하고 비켜 주려는 거야.’

참고로 목동의 유령은 과거 자신을 죽인 상대를 보자 겁에 질려서는 줄곧 내 뒤에 숨어 있기만 했다.

머리가 없는 유령이 내 등 뒤에 숨어 있으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어르신,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즘은 신분과 재산을 따져 결혼하기보단…….”

{떼끼! 젊은 놈이 뭘 안다고!}

“……목동 청년은 그저 따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어 할 뿐입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눈에 흙이 들어가다’란 죽어서 묻힌다는 뜻이다. 즉, 죽어도 안 된다는 소리인데…….


‘어르신, 이미 죽으셨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레이안도 참 대단하다. 벽과 대화하는 기분일 텐데, 지친 기색 없이 30분 넘게 설득하는 중이라니…….

그때였다. 비앙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꺼낸 것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요? 그렇지만, 조상님께서는 이미 죽어 묻히셨잖아요?”

역시 비앙카는 최강이다.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지.


{뭐, 뭐라고……?}

영주의 유령은 비앙카의 순진무구한 돌직구에 당황한 듯 어버버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다 괘씸하다는 듯 도끼눈을 뜨더니, 비앙카를 삿대질하며 버럭 호통치는 게 아닌가.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을 보았나! 심지어 근본 없는 뱁새이기까지 하다니! 너 같은 게 피오렌 가의 안주인이라니, 가문의 수치다!}

바로 울상이 된 비앙카가 피오렌 공작의 팔을 꼬옥 껴안고 매달렸다.

피오렌 공작…… 간단히 이름으로 트로이라고 하자. 트로이는 누구 하나 물어뜯을 듯 사나운 눈빛으로 영주의 유령을 노려보았다.

바보 같은 영주의 유령. 후손이 (미친) 애처가인 것도 모르고.


“어디서 잡귀가…… 주제도 모르고…….”

{뭐, 뭐라고? 잡귀?}

트로이가 유령보다 스산하게 중얼거린 말에 유령이 기가 막혀 했다.

……잡귀라니…… 그래도 조상의 유령인데…… 하기야 여긴 유교 국가도 아닌 데다, 제사도 안 지내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잡귀가 맞긴 하지, 으응.


{크아악! 후손이 나를 무시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영주의 잡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싸매고 포효했다.

그러고는 눈을 희번덕 뜨더니, 별안간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순간 심장 떨어질 뻔했으나…… 영주의 유령이 죽일 듯 노려보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뒤의 목동…….’

그러하다.


{이게 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만 아니었어도……! 내 딸이 탑에서 투신한 것도, 내가 병에 걸려 죽은 것도 다 네놈 탓이다!}

와, 최강 남 탓. 갈채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나는 흐린 눈으로 가방을 뒤적였다. 슬슬 이 지겨운 실랑이를 끝낼 때가 됐군…….


{영주님……. 전 그저 아가씨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을 뿐입니다…….}

{웃기지 마라! 이 여우 같은 놈! 내가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오늘에야말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놓겠다!}

영주의 유령은 안광을 붉게 빛내더니 음산한 검은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저 정도면 이미 악귀라 봐도 무방하지 않나? 뭐, 몇 초 후면 악귀로 전직할 기세이긴 하다.


{크아아악! 이놈―!}

두 손의 손톱을 세운 영주의 유령이 내 뒤에 있는 목동에게 달려들려던 찰나,

촤악―!

마침 내가 가방에서 꺼내서 뿌린 소금이 영주의 유령에게 직격했다.

100% 천일염이다.


{크, 크악……! 따, 따가워!}

소금이 효과가 있었는지 영주의 유령이 살충제에 담가진 벌레처럼 몸부림쳤다.

나는 남은 소금도 모조리 영주의 유령에게 퍼부었다.


{크아아악……!}

하지만 이 정도론 소멸하지 않나 보다. 다음으론 가방에서 팥을 꺼내 뿌렸다.

영주의 유령이 따갑다며 펄쩍펄쩍 날뛰었다.


‘소금도, 팥도 혹시나 싶어서 가져온 거였는데…… 가져오길 잘했군.’

빈 종이봉투를 영주의 유령 쪽으로 던져 버린 나는 두 손을 마찰해 탁탁 털며 쯧, 혀를 찼다.

나름 오래된 유령이라고…… 이 정도론 퇴마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럼 하는 수 없지. 이 힘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힘숨찐처럼 비장하게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이윽고 하얀 빛이 손끝에 모여들었다. 파마의 힘이었다.


{이…… 이 악독한 인간 같으니! 당장 네 나라로 꺼지지 못할ㄲ……!}

영주의 유령이 뭐라고 지껄이든 내 관심 밖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가차 없이 파마의 힘을 쏘아 보냈다.


{으아아아악!!}

일순간 폭죽처럼 터진 새하얀 빛이 서서히 점멸하고, 영주의 유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퇴마 성공이었다☆


“꺄아앙!”

토끼가 멋지다며 앞발을 척 치켜세웠다. 훗 웃은 나는 귀여운 우리 토끼를 안아 들고 둥기둥기를 해 주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뽀뽀도 하려고 했지만……! 토끼의 재빠른 앞발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쳇, 실패로군.


“캬앙.”

“아, 알았어. 안 할게.”

……라고 말하며 방심하게 한 뒤에 재빨리 코에 뽀뽀하기!

쪽!


“……!”

기습당한 에이프릴이 얼음 토끼가 됐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


“캬아앙……!”

폴짝 뛰어오른 토끼가 내 뺨에 뒷발차기를 날렸다.

분노의 뒷발차기였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타격감 제로였다. 하지만 나는 아픈 체를 했다.


“아얏……!”

“캬웅!”

“아이고, 토끼가 사람 잡네! 사람 살려!”

“캬우웅!”

그렇게 신나게 토끼를 놀려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앙카였다.


“정말 굉장해요, 글로리아! 역시 세계의 조율자네요! 너무너무 멋졌어요!”

그리고 그 옆의 트로이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면서도, 질투심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뭐…….


‘비앙카가 나를 칭찬 한번 해줬다고 그거까지 질투하는 거냐고!’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젓는데, 그레이안과 목동의 유령이 곁으로 스윽 다가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레이안이었다.


“역시 부인은 대단하십니다.”

그리 말하는 그는 나에게 또 한 번 더 반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훗…….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레이안에게도 뽀뽀를 해 주었다.

쪽!


“부, 부인…….”

대번 얼굴을 화악 붉힌 그레이안이 큰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그레이안을 보며 나는 내심 입맛을 다셨다.

이따 밤을 기약해야겠군.


{감사합니다, 세계의 조율자 님…….}

이어서 목동의 유령이 나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러나 감사를 받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직, 본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뭘요, 악령 하나 퇴치하는 것쯤이야 내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어서 묘지로 진입하죠. 아가씨의 무덤가에 가야 하잖아요?”

{네, 그래야죠……. 정말 감사합니다.}

이 목동의 유령은 아주 순한 성격이었다. 고귀한 아가씨가 그의 어떤 면을 보고 반했는지 알 것 같다고나 할까.

여하튼, 우리는 목동의 유령과 함께 묘지에 진입했다.

아까처럼 또 다른 유령이 튀어나오거나 하는 일 없이, 우리는 무사히 아가씨의 무덤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예요. 바로 여기가, 아가씨의…… 어……?}

그런데.

뜻밖에도,


{아, 아가씨?}

아가씨의 유령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빌……. 참 오랜만이네요. 그렇죠?}

싱긋 미소를 지은 아가씨의 유령이 목동, 빌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가씨의 유령은 생전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아, 아가씨…….}

목동이 감격에 차 울먹였고, 아가씨는 그런 그를 달래 주며 말을 이었다.


{빌, 당신의 머리와 심장은 내게 있어요. 이제 돌려줄게요.}

다음 순간, 아가씨의 두 손바닥 위로 웬 머리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제법 준수하게 생긴 청년의 얼굴.

저게 바로…… 목동이 잃어버린 머리였다!


{자, 받아요…….}

아가씨는 목동의 잘린 목 위에 머리를 손수 얹어 주었다.

머리를 되찾은 목동의 얼굴 위로 서서히 표정이 살아났다.

그는 명백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무슨 소리예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당신 없이 살아갈 바엔 나 역시 죽고자 했을 뿐이니까.}

목동은 눈물을 줄줄 흘렸고 아가씨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와 일행은 숨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 받아요. 당신의 심장이에요.}

곧이어 아가씨는 목동에게 심장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목동은…….


{…….}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심장을 받아들지 않았다.

아가씨가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목동이 심장을 그녀의 품으로 돌려주며 말했다.


{이건…… 아가씨께서 지니고 계세요.}

{네? 하지만…….}

{제 심장은 언제나 아가씨의 것이니까요.}

‘오오……!’

감동적인 대사였다!

아가씨도 감동한 듯 물기가 차오른 눈으로 목동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빌 당신을 지켜주지 못했는데…….}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저에게 존재만으로도 크나큰 선물이시며 축복이십니다.}

{빌…….}

{아가씨…….}

오오…….

이쯤 되니 3D 안경을 끼고 팝콘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이름으로 불러줘요, 빌.}

{……캐, 캐서린…….}

{후훗…….}

그렇게 캐서린과 빌은 한참이나 세상을 따돌린 채 둘이서만 꽁냥거렸다.

얼마 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정말로, 진심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나란히 선 빌과 캐서린이 우리에게 감사를 전했다.

두 사람은 곧 서로를 마주 보고 두 손을 맞잡더니…….


{한이 풀렸으니…… 이제 그만 이승을 떠나야 할 때로군요.}

{네, 캐서린 아가씨.}

{우리가 죽음을 함께하진 못했지만…… 이렇게 영혼으로나마 다시 만나, 함께 성불할 수 있어 무척 기뻐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내세에 다시 만나요, 빌.}

{다시 태어나도 전 아가씨만을 사랑할 겁니다.}

{응, 나도 그럴 거예요. 약속해요. 꼭…….}

거의 동시에 스러지며 하늘로 날아갔다.

성불한 것이다.


‘……정말…… 세기의 로맨스였다…….’

내 품 안의 토끼는 이미 한참 전부터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끼얏웅……!”

뭐라고 하는진 모르겠으나 대충 감탄사 비슷한 것일 터다.

감수성 풍부한 토끼를 나는 쓱쓱 쓰다듬어 달래 주었다.

목동과 아가씨, 두 사람이 사라진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다음 생에 둘이 만나 사랑을 이룰 수 있길.’

 

* * *

유령 소동이 일단락된 후, 휴가 일정은 계획했던 대로 평범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휴가 마지막 날.

우리는 돌고래를 보러 왔다!


“와……!”

바다를 가로지르는 유람선 위.

갑판의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에이프릴이 감탄을 터뜨렸다.


“돌고래! 너무 귀엽고 예뻐요!”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니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행복이지, 후훗……. 역시 가정의 평안은 곧 나라의 평화고 나아가 세계의 평화…….


“꺄웅~!”

“……?”

갑작스럽게 들려온 토끼 SOUND에 화들짝 놀라 옆을 살펴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내 곁에 서 있던 에이프릴이 온데간데없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끼얏꺄웅~!”

다시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난간 아래.

돌고래가 헤엄치는…… 바다였다.


‘서, 설마!’

그리고 설마가 맞았다.


“꺄항!”

어느 틈엔가 토끼 모습으로 변한 에이프릴이 돌고래의 등에 올라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미쳐!’

나는 재빨리 난간을 붙잡고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에이프릴을 향해 소리쳤다.


“토끼야아악! 위험하니까 당장 이리 오지 못해?!”

“끼웅잇!”

“너어……!”

마침 마실 것과 간식거리를 가지러 갔던 그레이안과 로드리가 이 개판, 아니, 토끼판을 보게 됐다.

두 사람 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토끼는 돌고래 등에 올라탄 채 서핑을 즐겼다.


“끼얏웅~!”

“에이프릴! 엄마 말 좀 들어!”

사고뭉치 토끼 때문에 수명이 반으로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



“이 사고뭉치를 어쩌면 좋을까.”

내 말에 토끼가 모른 척 뒷발로 귀를 후볐다.

유람선에서 내려, 솔즈베리 공작령으로 향하는 마차 안.

다들 휴가가 끝나는 게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다. 물론 나도.

그리고 토끼는 늘 그렇듯 안하무인이었다.


“돌고래 서핑이 그리 재밌더냐……?”

“꺄웅~.”

어유, 저 말꼬리 늘려 대답하는 것 좀 봐. 얄미워 죽겠다.

나는 토끼에게 복수할 겸(?) 토끼를 뒤집고 보송보송한 배에 마구 뽀뽀를 했다.

그러다 털을 먹어야 했지만…….


“털 뿜는 토끼…….”

“캬앙.”

토끼가 마지막까지 사고를 치긴 했지만, 어쨌든 즐거운 휴가였다.

아가씨와 목동 유령의 감동적인 사연도 알게 되었고.

그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좋은 일도 했지.


‘비앙카와도 자주 만나서 놀았고…….’

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투명한 유리창 위로 비치는 내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음 여름에도 놀러 오면 좋을 거 같아. 아니지, 겨울도 괜찮으려나? 흐음…….’

그때였다. 창유리에 비친 무언가가 스윽 움직인 것은.


“……?”

놀라 움찔한 나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저거…….

토끼 인형……. 움직이지 않았나?

그러나 토끼 인형은 에이프릴의 옆자리에 가만히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내가 잘못 본 거겠지.’

문득, 저 인형을 산 가게의 경고 문구가…….

[주의! 우리 가게에서 만든 인형은 스스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떠올랐지만.

기우일 것이다. ……아마도.

스윽―.

―‘외전 : 한여름의 공포 특집’ 마침. 다음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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