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평안과 평화를 위하여 [본편 완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에이프릴을 떨어트려 놓고 장례식에 갈 수는 없었다.
프리무스 모르토는 에이프릴의 친아버지이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에이프릴에게도 이야기를 전했더니…….
“네……. 가야죠. 아버지 떠나시는 길…… 배웅해 드려야 하니까요.”
열세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도록 의젓한 말을 해서, 나는 몹시 슬픈 기분이 들고야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에이프릴을 꼭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가서 힘들면 울어도 돼. 참지 말고. 그 장례식에 넌 솔즈베리 공녀가 아니라 프리무스의 딸 에이프릴로 참석하는 거니까.”
“……네, 감사해요…….”
기운 없이 대답한 에이프릴이 조금 울먹였고, 내 마음은 더욱 가라앉았다.
그러나 시간은 피할 길 없이 흘러, 이틀 후.
우리는 프리무스 모르토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장례식은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 근처에서 열렸는데, 참석한 사람의 수가 의외로 많았다.
그들은 프리무스의 지인들로, 프리무스에게 도움을 받았거나 주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중에는 칼윈 공작도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제이드가 함께였다.
에이프릴을 보자마자 달려올 줄 알았던 제이드는 의외로 이쪽을 향해 고개를 까닥해 보일 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표정이 사뭇 무겁고 진지해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의 바람직한 태도를 연신 보여주고 있었다.
‘저 녀석의 저런…… 의젓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프리무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다음 생에 만나게 되면, 그때도 내 친우가 되어 주겠나? 언젠가 그날이 오길 고대하지.”
한편, 프리무스의 관 앞에서 애도의 말을 읊조린 그레이안이 하얀 꽃 한 송이를 관 위에 올려두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는데……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잘 떠오르지 않아 그저 정석적인 표현만 늘어놓았다.
“에이프릴은 제가 잘 키울 테니 걱정 마시고 편히 잠드시길 바랍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길…….”
그런 뒤 역시나 하얀 꽃을 관 위에 올려놓고 잠시 묵념했다.
한 30초쯤 지났을까. 고개를 숙이며 스르륵 물러나자니, 다음 차례인 에이프릴이 앞으로 나섰다.
아이를 보는 난 그저 걱정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에이프릴이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버지.”
작은 소리로 말한 에이프릴의 말이 속삭임처럼 이어졌다. 너무 작아서 내겐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음……. 아니지, 청력이 뛰어난 늑대나 개 수인은 다르려나?
나는 그레이안을 흘끗 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 내기란 요원해 보였다.
얼마 후 묵념을 마친 에이프릴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섰고, 나는 아이의 어깨를 포옥 감싸 안아 주었다.
모든 장례 절차는 두 시간 후 마무리되었다. 프리무스 모르토의 시신이 안치된 관은 땅속 깊이 묻혔고, 그 앞에 묘비가 세워졌다.
[프리무스 모르토(1×××~1×××)]
[평생 동족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 이곳에 잠들다.]
그 묘비 앞에 에이프릴은 한참이나 서 있었다. 사람들이 한둘씩 떠난 후에도.
근처에서 지켜보던 그레이안과 나는, 잠시 시선을 교환한 후 거의 동시에 걸음을 뗐다.
이제 슬슬 에이프릴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야 할 때였으므로.
“에이…….”
그런데 내가 아이를 채 부르기도 전에, 누군가 먼저 선수를 쳤다.
“에이프릴.”
다름 아닌 제이드였다.
.
그레이안과 나는 근처의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이드도, 에이프릴도 자못 무거운 표정이었다.
한창 걱정 없이 천진난만해야 할 아이들이 저러고 있는 것을 보자니…… 기분이 영 착잡해졌다.
‘친모에 이어 친부까지 눈앞에서 잃은 일은 에이프릴의 마음에 영원히 상처로 남겠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에이프릴을 안아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인내심 있게 참으며 옷자락을 꽉 그러쥘 따름이었다.
잠시 후, 제이드와 대화를 마친 에이프릴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우리를 향해 기운 없이 웃어 보이는 에이프릴의 어깨를 감싸며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이야기 했니?”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요.”
둘만의 비밀인가? 알려줄 마음은 없나 보다. 아니면, 더 말할 기력이 없는지도 모르고.
“그래, 그래. 이제 집에 돌아가서 쉬자.”
어찌 되었든 에이프릴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질 때까지, 푹 쉬게 해야지.
* * *
프리무스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후, 나의 일상은 바쁘게 흘러갔다.
일단, 칼윈 공작과 약조했던 대로 그들의 새로운 체제에 명분을 쥐여주기 위해 잠시 아인스턴을 방문해야 했고.
“저, 글로리아 님……. 혹시, 아인스턴에 더 머물며 시세가 안정될 때까지 저희를 도와주실 순 없으신지…….”
내 역할을 다한 후에는, 테나 위즈벨을 비롯한 이들의 부탁을 애써 거절해야만 했다.
만일 내가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미래는 포식자가 보여준 것처럼 흘러가게 될까?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그 미래처럼 되는 것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좀 더 머물다 가셨으면 좋았을 테지만…… 엘로윈에도 바쁜 일이 있으실 테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살펴 가십시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칼윈 공작.”
그렇게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깔끔하게 아인스턴을 떠났다.
나를 붙잡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곳에 더는 머무를 수 없다는 내 의지를 꿋꿋이 지켜냈다.
‘깊이 개입하고 싶지 않아. 아인스턴의 정치에는 그만 손을 떼자.’
나와 내 가족의 평안을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미래를 방지하기 위해…… 이게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
“꺄웅!”
일주일 후.
아침부터 내 방에 쳐들어온 토끼가 아직 수면 중인 내 얼굴에 웬 종이를 냅다 던졌다.
“으……. 이게 뭔데…….”
집어 들고 확인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신문지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헤드라인은…… 아인스턴의 국정 개혁에 관한 것.
‘아……. 드디어…….’
칼윈 공작과 그 세력이 자신들의 뜻을 본격적으로 펼치려는 모양이었다.
내 옆에 바짝 다가온 토끼가 앞발로 신문을 툭툭 치며 물었다.
“꺄잉잇?”
“어……. 응, 여기 적힌 대로야. 아인스턴도 이제 엘로윈처럼 국왕 선출 제도를 도입한대. 그리고 국왕의 권한이 크게 축소된다나 봐. 대신 귀족 회의와…… 새로 출범하는 민선 의회의 힘이 커지고.”
라니에로 왕 치하의 아인스턴은 국왕과 왕가의 힘이 지나칠 정도로 컸다.
다신 그런 폭군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왕권을 대폭 축소하려는 모양이었다.
‘엘로윈처럼…… 왕권은 더 이상 세습되지 않으며 왕가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되겠군.’
그리고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수인 노예 제도 폐지.
수인 혐오 및 차별 방지법 제정 추진.
반대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올 테지만…… 칼윈 공작과 다른 권세가들의 뜻이 완고하니 결국 추진되겠지.
게다가 듣기론 민선 의회는 테나 위즈벨을 비롯해 친-수인 성향의 인사가 많다고 했다.
앞으로 아인스턴의 정치·사회가 크게 바뀔 조짐이었다.
‘수인 학대를 일삼았던 아인스턴 왕족들과 그 측근들은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군…….’
예상했던 대로라 놀랍지 않았다. 왕족들을 수사하자 그들과 연관된 노예상, 인신매매범들이 줄줄이 달려 나왔고…….
‘그놈들 전부 교수형에 처하거나 종신 노역을 하게 됐군. 그래, 잘된 일이지.’
어느새 다 읽은 신문을 접어 옆으로 치우자, 내 무릎 위로 깡충 뛰어오른 토끼가 앞니를 드러내며 캬악 성질을 부렸다.
뭐야, 왜 화를 내는데.
황당함에 흘겨보자니 토끼도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눈치인데. 뭘 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아님 내가 어제 뭘 잘못했나?
“에이프릴…….”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아무 말이나 했다.
“불만 있으면 랩으로 해.”
그게 뭐냐는 듯, 토끼가 물음표를 띄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토끼의 옆구리를 양손으로 냉큼 붙잡아 배가 보이는 자세로 토끼를 눕혔다.
그러고는 토끼의 보송보송 말랑말랑한 뱃살을 마구 만졌다.
“끼앵!”
“아유 귀여워, 우리 토끼. 성질부려도 귀여워.”
“끄애웅!”
“잠은 잘 잤어? 어젠 일찍 잠든 모양이던데.”
“캬아앙!”
“배고프다고? 알았어, 밥 먹자.”
토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성질을 부렸지만 맛있는 식사를 마다하진 않았다. 역시 먹보 토끼였다.
.
대부분의 일이 마무리되었지만, 나에겐 아직 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여기, 이쪽으로 옮겨 주게. 그렇지, 나란히…….”
다름 아니라, 솔즈베리 공작성의 묘지에 에티엔과 벨루인의 묘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시신은 수습할 방도가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애도를 표하고 싶었다.
‘내가 무사히 살아 있는 건 전부 두 사람 덕분이에요.’
벨루인이 죽은 후에도 히페리온에 남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나에게 진실을 전해 줄 사람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에티엔.’
그녀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언서를 쓰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계속 김지현인 줄로만 알고 살아갔을 거야. 그러다 김지현의 수명이 다했을 때…….’
내가 누구인지 자각했을 테지만, 그땐…… 너무 늦어버린 뒤였겠지.
‘고마워요……. 엄마, 그리고 유모. 다시 한번 더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비석 앞에 꽃을 놓으며, 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행복하게 잘 살게요, 꼭.’
그렇게 애도를 마친 후, 본관으로 돌아가는 길…….
“공작 부인!”
“왕!”
왜인지 다급한 기색으로 뛰어오며 로드리가 나를 불렀다.
게다가 옆엔 늑대 모습의 그레이안도 함께였다.
……저 남자, 요새 늑대 모습 하는 데 맛 들였어!
“왜 그래? 무슨 일이니?”
늑대는 무시하고 로드리에게 물었다. 로드리는 숨을 조금 몰아쉬며 대답했다.
“공녀님이…… 가출을…….”
“…….”
“왕!”
돌겠네.
어쩐지 아침부터 낌새가 심상치 않더라. 이 토끼가 또.
아니, 대체 뭐에 화가 난 건데?!
“그, 공녀님이, 공작 부인께서 요새 공작님의 늑대 모습을 자신보다 더 귀여워하시는 것 같아 불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그 무슨 초등학생 같은 발상……은, 에이프릴은 열세 살이지. 바로 납득했다.
“왕!”
“늑대는 조용히 해요. 로드리, 에이프릴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아니?”
“아마 인근의 작은 농촌 마을에…… 그곳에서 만들어 파는 잼 파이가 한창 맛있을 때라…….”
“가출이 아니라 그냥 먹으러 간 거잖아. 가출은 이용당했어.”
“왕!”
계속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는 개…… 아니, 늑대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내 키의 반만 한 거대한 늑대의 멱살을 잡으며 나무랐다.
“귀여운 척 그만하고 사람 모습으로 돌아와요! 에이프릴 찾으러 가야죠!”
그러자 늑대, 그레이안은 곧바로 순순히 사람 모습을 했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되레 불쌍한 척을 했다.
“어제는 분명 귀엽다고 하셨으면서…….”
“아니, 귀엽……긴 한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시무룩한 그레이안을 질질 끌고 예의 농촌 마을로 향했다. 토끼는 마을 중앙의 정자에서 주민들에게 잼 파이를 공짜로 얻어먹고 있었다.
야…….
나는 그레이안을 재빨리 늑대로 변신하게 해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한 후, 나도 변장 마도구로 외모를 위장했다. 그런 다음 토끼를 잡으러 갔다.
“죄송합니다, 저희 토끼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허허, 아닐세. 어린 녀석이 어찌나 귀여운지.”
“우리 손주 생각도 나고…….”
껄껄껄.
마을 어르신들은 정체불명의 토끼에게 잼 파이를 20개나 털리고도 인심 좋게 웃기만 했다.
너무나 미안해진 나는 그들에게 은화 다섯 개를 건네주고서(금화를 주면 수상해 보일 게 분명했기에) 토끼를 붙잡아 솔즈베리 성으로 귀환했다.
남의 집 식량을 거덜 내고 온 주제에 토끼는 누가 안하무인 아니랄까 봐 매우 뻔뻔했다.
“끼애웅~.”
“너…… 또 그러기만 해.”
“꺄웅~.”
“다음부턴 돈 내고 먹어!”
“왕!”
늑대가 짖자 토끼가 불만스럽게 눈을 뜨고선, 늑대에게 뒷발차기를 날렸다.
늑대는 과장되게 비틀거리며 풀썩 쓰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난 그저 해탈한 웃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난 분명 슬프고 그리운 기분으로 엄마와 유모를 애도하고…… 내 삶의 방향을 다잡는…… 그런 진지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캬웅!”
“깨갱.”
이 토끼×개판은 뭐지?
내 감동 돌려줘…….
“두 사람 다…… 그만 좀 해! 사람 모습 하라고!”
참다못한 내가 냅다 소리쳤고 토끼와 늑대는 냉큼 꽁무니를 뺐다.
저래 놓고 몇 분 뒤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나 날 귀찮게 할 거다. 뻔하지.
어쩐지…… 이런 일상이 꽤 오래 계속되리란 직감이 들었다…….
“하, 참…….”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몇 분 후. 예상대로 토끼와 늑대가 슬그머니 내 곁에 돌아와 눈치를 살폈다.
이 바보들. 둘이 똑같았다.
“뭐 해요? 소파 자리 남는데. 얼른 앉아요. 에이프릴, 너도.”
그러자 둘은 내 양옆을 얼른 차지하고 앉았다.
부드러운 털 뭉치들이 나에게 마구 치대 왔다.
나는 어이없어하는 한편,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저녁은 사람 모습으로 먹어요. 그럴 수 있죠?”
“왕!”
“웅꺗.”
“그리고 에이프릴, 네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우니까 그레이안 그만 좀 괴롭히고.”
“캬웅.”
“그레이안은…… 아니다, 이건 이따 얘기해요.”
토끼 어린이가 들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날은 휴일이나 다름없었고, 우리는 느긋하게 함께 시간을 보냈다.
평안하고 또 평화로웠다.
그리고 난 이런 일상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며,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값어치 있는 것이란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세상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중이었고, 그 온도는 봄기운처럼 따스했다.
오래도록 겨울이었던, 그 겨울 속에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만큼.
나는 믿을 것이다. 세상은 분명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분명 선함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이다.
{응, 다 잘 될 거야.}
나비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파란 하늘을 내다보며,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본편 완결. 외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