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계속 친구일 거야
오랜만에 깨어난 에이프릴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워했다.
“여긴…… 저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나는 아이를 잘 다독이며 그간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포식자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에이프릴은 놀라고 겁먹은 듯 보였지만, 포식자가 완전히 소멸했다고 하자 눈에 띄게 안도했다.
“다행이다……. 그럼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네요?”
그렇지. 먼 훗날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최소 천 년 동안은 안전하지 않을까, 이 세계는.
쓴웃음을 삼킨 나는 에이프릴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
“몸 상태는 좀 어때? 어지럽거나 하진 않고?”
“괜찮아요…….”
괜찮다고는 하지만 다소 기력이 없어 보였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겠지.
눈물을 글썽이던 나는 이내 두 팔로 아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얼른 집에 가자. 집에 가서 네가 좋아하는 거 잔뜩 먹게 해줄게. 당분간은 공부도 수련도 하지 말고 푹 쉬어.”
에이프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아이가 내 품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이렇게 의식을 되찾고 움직이는 에이프릴을 보자니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 에이프릴. 이렇게 무사히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앞으로 더욱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에이프릴에게 잘해 줘야지. 사랑을 가득 주고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아인스턴 왕국 일에는 최소한의 개입만 하고, 손을 놓아야겠어.’
나와 내 가족이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공작님…… 아니, 아버지…….”
“그래, 에이프릴. ……보고 싶었다.”
에이프릴은 그레이안과도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블레셋을 흘끗 훔쳐보았다.
그는 세계수의 기둥에 기대어 서서 우리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여기에 끼지 못하는 그 모습이…… 왠지 좀 외로워 보였다.
“무사히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공녀님.”
“걱정 많이 했습니다, 정말로.”
“로드리, 아르윈…….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한편 에이프릴은 로드리, 아르윈과도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어서 안나도 에이프릴에게 말을 걸었다.
에이프릴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맑은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글로리아, 그동안 고생 많았어.}
{세계의 조율자 역할을 잘 해내 줘서 고마워.}
{이 세상이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네 덕분이야.}
에이프릴을 가만히 지켜보던 내 곁으로,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아와 한두 마디씩 건넸다.
이 녀석들이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건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됐다.
나는 속으로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나비들의 말에 대꾸했다.
‘너희도 고생 많았어. 그리고 블레셋에게도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해줘. 블레셋이 없었더라면 포식자를 물리치지 못했을 거야.’
{으응…….}
{그, 그래야지…….}
{인사는 해야겠지…….}
나비들은 왜인지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으로 힘없이 블레셋을 향해 날아갔고…….
약 3분 뒤 돌아와, 물에 젖은 휴지처럼 축 늘어진 채 기운 없이 팔랑거렸다.
……잘은 몰라도 블레셋에게 독설을 들은 모양이지.
나는 가엾은 나비들을 쓰다듬는 흉내를 냈다. 이 녀석들은 영체라 진짜로 쓰다듬을 수는 없으니까…….
{휴……. 블레셋은 무서워.}
{여전하다니까.}
{저 성격 못 버리지…….}
{아무튼, 이제 너와도 잠시 이별해야 할 때야, 글로리아.}
‘……응?’
나비들의 뒷담을 한 귀로 흘려듣고 있던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별이라니? 이렇게 갑자기?
{세계수가 곧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의 보살핌이 필요해.}
{너와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걱정 마. 가끔 놀러 갈게.}
세계수가…… 그렇구나.
‘그래……. 세계수를 돌봐야 하는 거면, 어쩔 수 없지.’
……생각해 보니 포식자가 보여준 미래에서 나는 아인스턴의 가뭄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지.
나비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았을 텐데도…….
그게 다, 나비들과 이별했기 때문이었구나.
“저, 블레셋…….”
그때 문득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쪽으로 자연히 고개가 돌아갔다.
블레셋이 혼자 있는 게 영 신경 쓰였던지, 에이프릴이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있었다.
‘착하기는…….’
한 폭의 그림처럼 서 있는 둘을 물끄러미 응시하는데, 콧잔등에 웬 눈 조각 같은 게 내려앉았다.
‘……뭐지?’
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손에 묻어난 것은 반짝이는 빛의 조각이었다.
그것은…… 세계수에게서 아주 조금씩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설마……?’
설마가 맞았다.
자세히 보니, 세계수의 다이아몬드 같은 껍데기가 자잘하게 벗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보석 알갱이들이 허공에 반짝이며 흩날렸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나비들의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다이아몬드 같은 껍질은 세계수가 포식자의 부패한 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둘렀던 거야.}
{포식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더는 두르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거지.}
빛나는 알갱이들로 허공이 다채롭게 물들고, 이윽고 세계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났다.
평범한 나무와 같은 갈색 껍데기, 그리고 푸르른 잎.
그러나 아주 빠른 속도로,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하얀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어, 혹시……?’
아니나 다를까.
세계수의 하얀 꽃이 이내 활짝 피어났다.
거대한 나무가 순백색 꽃을 피워 내는 광경은……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다.
{꽃을 피워 내는 동안, 세계수는 이 세상을 지키는 힘을 보완하고 강화해.}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지. 어림잡아 50년 정도…….}
‘50년……?!’
그럼…… 그사이에 난 할머니가 되어 있거나 죽었을 수도 있겠군.
그렇게나 오래 나비들과 이별해야 한다니……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정이 든 것인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림잡아 50년이라는 거고, 빠르면 10년 안팎일 수도 있어!}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세계수를 돌봐야 해서…… 글로리아와는 자주 볼 수 없어.}
{하지만 가끔 놀러 갈게! 가면 환영해 줘야 해?}
가끔 놀러 온다면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늘 곁에서 조잘조잘 떠들던 너희가 안 보이게 된다니, 좀 아쉽네.’
{사실 조잘조잘 떠드는 건 곁에 없어도 할 수 있어.}
{우린 이어져 있거든. 글로리아가 우리의 계약자인 건 언제까지고 변함없을 테니까.}
{즉, 멀리 떨어져서도 원격으로 떠들 수 있다는 말씀!}
……어이가 없었다. 황당함에 눈썹을 쓱 치켜세우자니, 나비들이 나를 약 올리듯 내 앞을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너와 함께해서 무척이나 즐겁고 기뻤어, 글로리아.}
{우린 계속 네 친구일 거야. 너도 그렇지?}
나비들의 눈을 볼 순 없지만, 초롱초롱 빛내고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설핏 웃으며 나비들이 원하는 답을, 그리고 나 역시 진심인 답을 꺼내놓았다.
‘그래, 우린 계속 친구일 거야.’
그러자 나비들은 무척 기뻐하며 나에게 따개비처럼 달라붙었다.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
우리는 나비들의 배웅을 받으며 히페리온을 떠났다.
하얀 꽃이 가득 핀 세계수의 모습은 멀리서 봐도 장관이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지금 실컷 봐 둬야지.
“끼우웅…….”
한편 에이프릴은 토끼 모습으로 변해 내 품에 쏙 안겨 있었다.
잘은 몰라도, 거대한 호수를 건너는 게 조금 무서운 모양이었다.
머지않아 나룻배가 기슭에 도착했고, 우리는 근처에 세워 두었던 마차를 타고 솔즈베리 공작령으로 이동했다.
물론 아르윈의 이동 마법이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시간을 단축해 주었다.
그렇게 예상보다 빨리 솔즈베리 공작성에 도착한 후, 나는 가장 먼저 사람을 시켜 블레셋을 손님방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그런 뒤 에이프릴을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려 했는데…….
“끼애앵!”
내 껌딱지 토끼가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토끼를 어깨에 얹고 그레이안과 함께 성의 지하로 내려갔다.
얼마 전 저주에서 풀려났을 늑대 수인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분들은…… 아마 저주에 풀린 직후 얼마간 의식이 있다가…… 바로 돌아가셨을 겁니다.”
“네……? 그, 그게 정말이에요?”
“애초에 저주가 억지로 수명을 늘리고 있었던 것이니까요.”
“…….”
말인즉, 지하의 늑대 수인들은 이미 운명이 다한 사람들이고…….
저주가 그들의 명줄을 늘려 제때 세상을 떠날 수 없게 붙잡고 있었지만…….
‘그 족쇄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것이로구나.’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마지막은 평안했을까?
한참을 내려가 우리는 지하에 도착했다. 지하의 전경은 전에 보았던 바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어두컴컴한 장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 모여 손을 잡고 누워 있었다.
그들이 이미 숨을 거둔 뒤란 걸……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편안한 얼굴들이네.’
고통스럽게 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레이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인간의 이성을 되찾은 순간은 고작 2~3분 정도였을 거라고 한다.
그 후 바로 숨을 거뒀을 거라고…….
한편으론 슬프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일이었지만…… 마침내 저주에서 해방되어 안식을 찾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봐야 할까.
‘포식자는 정말로, 많은 이의 삶을 난도질해 놓았구나.’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묵념했다. 그리고 이 가엾은 늑대 수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오래도록 시달렸을 그들의 영혼이, 마침내 안식을 찾았기를.
* * *
‘그러고 보니, 결국 블레셋의 피는 필요 없었네.’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는 포식자가 사라지자 저절로 풀렸으니 말이다. 결국 블레셋 녀석은 나에게 사기를 친 건가…….
‘……처음부터 나를 떠보려던 거였어. 내가 인류의 이기심에 절망하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구하려 할지를…….’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시련을 극복해 냈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는 게 어지간히도 불편했던 것일까.
블레셋은 고작 이틀 솔즈베리 성에 머물다가 훌쩍 떠나 버렸다. 또다시 깊은 산골짜기 마을에 은둔하려는 모양이지.
‘어쩔 수 없지 뭐. 본인이 그게 편하다면야.’
그렇게 블레셋이 떠난 후 사흘이 지난 어느 날.
“부인, 토끼 수인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
“프리무스의 장례식을…… 이틀 뒤 치른다는군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잠시 입을 달싹이던 나는, 푹신한 쿠션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는 에이프릴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에이프릴이 프리무스 모르토의 장례식에 가도,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