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보고싶었어
{글로리아!}
{일어나, 글로리아!}
{어서 일어나!}
{너무 오래 자면 욕창 생겨!}
익숙한 호들갑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는 무의식중에 눈살을 찌푸리며, 날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저었다.
그런데 내 손을 누군가 덥석 붙잡았다.
‘……?’
위화감과 함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계기로 몽롱하게 잠겨 있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났다.
곧이어 정신이 맑아지고, 나는 번쩍 눈을 떴다.
“……!”
가장 먼저 시야로 들어온 것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은 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레이안.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안나와 로드리. 조금 뒤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르윈의 모습이었다.
“헉……. 나…….”
“부인, 정신이 드십니까?”
“나…… 기절했었어요? 여긴 어디예요?”
여전히 조금 비몽사몽인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묻자, 그레이안이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이곳은 웨일스에 있는 칼윈 가의 타운 하우스입니다. 저는 칼윈 공작의 급한 연락을 받고 사흘 전 이곳으로 왔고요.”
“사흘……? 사흘이라고요?”
“예, 부인께서는…… 사흘이나 잠들어 계셨습니다.”
맙소사. 나는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버렸다. 내가 사흘이나 잠들어 있었다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에이프릴은요? 포식자는……!”
“부인, 진정하십시오. 하나씩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급하게 질문을 쏟아내는 내 어깨에 그레이안이 손을 올리며 차분히 말했다.
그 손의 온기에 나는 점차 진정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포식자는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블레셋의 말에 따르면요.”
“그러고 보니 블레셋은…… 이곳에 없는 건가요?”
방 안을 둘러보았으나 블레셋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레이안의 나직한 음성이 잇따라 들려왔다.
“블레셋은 먼저 히페리온으로 갔습니다. 에이프릴이 깨어나면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에이프릴은 아직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네……? 어, 어째서요? 포식자를 확실히 없앴는데, 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레이안이 대답하려는 찰나에, 아르윈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늘 그렇듯 다소 반항기가 어린 뚱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한결 너그러웠고 얼핏 걱정이 엿보이기도 했다.
“공녀님은 포식자의 저주로 생명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라, 히페리온에서 얼마간 요양이 필요하다는군요. 그래서 잠들어 있는 거고, 저주는 깨끗하게 풀렸다고 합니다.”
“아…….”
다행이다, 작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조만간 에이프릴을 다시 볼 수 있겠구나……. 어서 보고 싶다, 에이프릴.
‘그리고 에이프릴의 저주가 풀렸다면, 솔즈베리 가문도…….’
퍼뜩 떠오른 생각에 그레이안을 홱 돌아보았다. 그는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늑대 모습으로 변신하는 게 아닌가!
“왕!”
늑대 그레이안이 귀여운 목소리로 짖었다. 나는 입을 쩍 벌린 채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팔을 뻗어 커다란 늑대를 꼬옥 끌어안았다.
“이제 저주가 풀린 거…… 맞죠?”
“왉.”
“지금 제정신이고요. 늑대 모습인데도.”
“앍.”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가. 그 모든 시련을 딛고 마침내 그레이안을 자유롭게 해준 것이다.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에 결국 눈물을 글썽였다.
“앞으로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고, 그렇게 믿을래요. ……어서 에이프릴이 보고 싶어요. 당신도 그렇죠?”
“왕!”
해맑게 대답한 늑대 그레이안이 내 얼굴을 날름 핥았다. 축축하고 미끄러웠다…….
.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칼윈 공작과 인사를 나눈 후 떠날 채비를 했다.
칼윈 공작 곁에는 테나 위즈벨 박사가 함께였는데, 포식자가 보여준 미래에서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묘했다.
그 미래에서처럼, 실제로도 그녀와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지금은 그저 어색한 관계인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글로리아 님.”
“네, 덕분에요.”
칼윈 공작이 물었고, 난 어제 일이 떠올라 창피한 마음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어제…… 난 당장 에이프릴을 보러 히페리온으로 가겠다며 조금 난동을 피웠더랬다.
그레이안과 다른 사람들은 내가 최소 하루 정도는 휴식이 필요하다며 결사반대했고…….
결국 모두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지만, 그 과정에 남의 집에서 소란을 피운 꼴이니 부끄러웠다.
“충분히 휴식하셔야 할 텐데 바로 여행길에 오르신다니 걱정이로군요. 모쪼록 무탈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덕분에 잘 쉬다 갑니다.”
“……글로리아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현재 아인스턴 왕국의 상황이 여러모로 복잡합니다. 아인스턴 왕가가 완전히 무너졌으니 어쩌면 국호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지요. 완전히 새 출발을 한다는 의미에서요.”
“으음, 네…….”
칼윈 공작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나 길게 운을 떼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이야기를 그가 입에 담았다.
“당장은 글로리아 님도 힘드시겠지만, 조만간 이쪽에 도움을 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아인스턴에는 아직도 왕족을 신의 핏줄처럼 떠받드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글로리아 님께서 그들을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체제를 세우기 위한 명분을 달라는 것이었다.
더해서 ‘아무리 그래도 아인스턴 왕국은 아인스턴 왕족이 다스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을 사람들을 회유해 달라는 것이겠지.
라니에로 왕과 에반젤린은 죽었고…… 왕의 다른 자식들도 민심을 잃은 지 오래인 데다, 이런저런 이유로 처형될 가능성이 크니…… 아인스턴 왕족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
게다가 난 세계의 조율자이기까지 하니, 나를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그리고 칼윈 공작은…… 그걸 원하지 않겠지.
그가 바라는 건 분명, 아인스턴 왕가의 세습이 끊기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는 것일 테니.
‘결국 내 역할은 정치적으로 전면에 나서기보단 허수아비 왕족 역할을 하는 것…….’
새 시대를 ‘보증’하는 구체제의 상징으로서, 일종의 마스코트가 되는 셈이다.
‘뭐, 어려운 역할은 아닌데…….’
……포식자가 보여줬던 미래가 아른거렸다. 아무래도, 줄다리기를 잘해야 할 듯싶다.
‘그 미래에서 난 아인스턴 왕국의 정치에 깊이 개입한 것처럼 보였지.’
그래서 그레이안, 에이프릴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고, 예상보다 오랜 시간을 아인스턴 왕국에서 허비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절망적이었지…….
‘……내가 깊게 개입한 게,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어.’
‘아인스턴 왕족’이자 세계의 조율자인 내 포지션은 여러모로 아슬아슬하다.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면 안 되니까.
그 위태로운 줄타기를 실패한 미래를…… 포식자는 내게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지.
“……생각해 볼게요. 그렇지만, 내가 아인스턴 왕국의 정치에 깊이 개입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비록 아인스턴의 왕족이기는 하나 난 명실상부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니까요. 내가 엘로윈의 국민이기도 하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이것으로 ‘당신들의 신체제를 지지한다는 표명만 하고 적당히 물러나겠다’라는 내 뜻은 확실히 전해졌을 터.
눈치 빠른 사람답게, 칼윈 공작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도움을 주시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글로리아 님께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부디 편하게 생각해 주시지요.”
“……네, 알겠어요.”
그렇게 대화를 마친 후, 나와 일행은 드디어 웨일스를 떠나 히페리온으로 향할 수 있었다.
얼마 후면 에이프릴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 * *
‘포식자는 완전히 사라진 게 맞지?’
히페리온으로 향하는 마차 안.
나비들에게 속마음으로 넌지시 묻자니 곧 답이 돌아왔다.
{응, 깨끗하게 소멸했어.}
{걱정 안 해도 돼. 이 세계는.}
{하지만 어디선가 새로운 포식자가 태어나…… 다른 세상을 집어삼키려 할지도 모르지.}
‘새로운 포식자라고?’
놀라 되묻자니 나비들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야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이 있는 한, 운명을 포식하는 자는 언제든 새로이 태어날 수 있어. 우리가 없앤 그 포식자와는 아무런 연속성이 없겠지만.}
‘……그렇구나…….’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지켜냈지만…… 새로운 포식자에 의해 다른 세상이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다는 얘긴가…….
‘어쩐지 마음이 착잡해지네…….’
하지만 다른 세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 그저 기도하는 것밖에는…….
‘나와 같은 사명을 지닌 이름 모를 누군가가…… 부디 시련을 이겨내기를.’
그리하여, 운명을 삼키는 자로부터 소중한 것들을 지켜낼 수 있기를.
.
머지않아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고, 우리는 지난번처럼 거대한 호수의 기슭에서 나룻배를 타고 섬까지 이동했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히페리온과 세계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나는 다시금 에티엔과 벨루인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영혼도 환생하여 새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부디 평탄하고 유복한 삶이기를.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엄마. 그리고 유모.’
.
에이프릴이 잠들어 있는 세계수 근처에 도착하자, 익숙한 이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블레셋……. 계속 여기 있었던 건가?’
블레셋은 에이프릴 곁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잠든 에이프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쯤 되니 블레셋의 집념이 좀 무서워지려 하는데…….’
그러고 보니 제이드도 에이프릴을 보러 오고 싶어 했는데. 그 녀석, 요즘 매우 바쁜 모양이었다.
뜻밖에도 칼윈 가의 후계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이드의 생각과는 다르게 칼윈 공작은 오래전부터 제이드를 후계자로 점찍어 뒀던 모양이고…….
‘그럼 차기 공작은 제이드가 되는 건가…….’
그 녀석이 미래의 칼윈 공작이라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안 어울린다.
나중에 커서 에이프릴에게 청혼하러 오는 거 아니야? 제이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그리고 그 녀석 성격상, 에이프릴이 토끼 수인이라서 겪게 될 모든 불쾌한 일의 가능성을 전부 제거하고 에이프릴을 데려가려 할 거 같아.’
계략 집착 남주는 정말 무섭다니까!
“……오셨군요.”
마침 나를 발견한 블레셋이 이쪽을 흘긋 보며 인사 비슷한 것을 건넸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쪽으로 좀 더 다가갔다.
왠지 모르게, 블레셋에게 동질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그가 불편해진 듯한 느낌이다.
아마 너무 깊이 서로를 파악해 버렸기 때문이겠지.
블레셋도 나와 마찬가지인지, 답지 않게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에이프릴은 곧 깨어날 겁니다. 먼저 이야기 나누시지요. 전 근처에 있겠습니다.”
“어…… 그래, 고마워.”
고개를 까닥해 보인 블레셋이 자리를 피해 주었고, 나는 에이프릴 곁에 살며시 앉았다.
그런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오며 그레이안이 내 옆을 차지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언제쯤 깨어날 거니? 에이프릴.’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내 귀여운 토끼, 우리 소중한 딸.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는 비교적 혈색이 돌아온 에이프릴의 뺨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봐 주었으면 했다. 그리하여 너무나 보고 싶었다고,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길.
‘얼른 일어나, 에이프릴.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아.’
뺨을 쓰다듬던 손을 내려 에이프릴의 조그만 손을 꼬옥 그러잡은 순간이었다.
“……!”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얇고 하얀 커튼 같은 속눈썹 아래 투명한 분홍빛 눈이 드러났다.
“에, 에이프릴……!”
마침내 깨어난 에이프릴의 이름을 나는 애타게 불러보았다. 내 옆의 그레이안도 긴장하고 있었다.
에이프릴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우리에게로 초점을 잡으며 입을 달싹였다.
이윽고,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가 그 작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