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먹구름이 걷히고
포식자는 이해할 수 없어 했다.
표정이랄 게 없는, 기괴하게 뭉개진 얼굴이었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
【왜 여전히 세상을 구하려 하는 거지? 그 미래를 보고도?】
……포식자가 보여준 절망적인 미래를 보고 흔들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정말로, 그런 미래가 닥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포기할 수는 없어.’
에이프릴을 구하는 일을,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를 풀고 그레이안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더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선한 마음으로 노력해온 이들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포식자가 보여준 미래가 정말로 이 세계의 결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내가 그렇게 절망 속에서 죽는다 해도, 사람들의 선한 마음이 이어진다면…….’
세상을 하루아침에 180도 바꾸긴 어렵더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으리라. 틀림없이.
【……됐어. 어차피 희망이니 뭐니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늘어놓겠지.】
포식자는 그리 중얼거리더니, 붉은 두 눈을 번득이며 내게로 손을 뻗었다.
검붉은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날 향해 쇄도했고, 나는 재빨리 파마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나 스스로 방어하기도 전에―.
푸르스름한 색을 띤 빛이 눈앞에서 폭발하듯 번쩍였다.
“……!”
그 빛은― 나와 같지만 좀 더 강력한…….
블레셋이 지닌 파마의 힘이었다.
“블레셋……. 너…….”
“…….”
멍하니 중얼거리는 나를 보는 블레셋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오묘했다.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는데, 일견 놀라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방금 내가 겪은 ‘시련’을 블레셋도 겪었을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물론 400년 전은 포식자가 완전히 각성하기 전이니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겠지만…….
……어쩌면 블레셋은…… 포식자가 보여준 미래에 절망한 것 이상으로…….
그런 미래를, 직접 겪어봤던 건지도 모른다.
‘그 탓에 지독한 인간 혐오자가 되었는지도…….’
처음으로 블레셋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블레셋과 나의 시선이 조용히 교차했다.
묘한 동질감이 오고 간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리라.
“……헉, 조심해!”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포식자가 이번엔 블레셋을 노려 기습했다.
난 재빨리 손을 뻗었다. 손끝에 몰아치는 새하얀 빛이 블레셋의 푸른 빛과 섞여 시릴 만큼 창백한 색을 자아냈다.
그 빛에 직격한 포식자가 눈에 띄게 움찔하더니, 바로 물러나며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효과가 있어……!’
나 혼자 힘으로 싸웠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이래서 세계수가 블레셋이라는 보험을 들어 두었던 거로구나…….
나는 블레셋을 흘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입에 올렸다. 아까는 답을 듣지 못했던 말을.
“잘 부탁해.”
“……네.”
아주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블레셋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다시 포식자를 주시하며 힘을 끌어올렸다.
나를 보는 포식자의 붉은 눈이 섬뜩하리만치 번뜩였다.
명백히 살기를 띤 눈빛이었다.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아니, 죽는 것보다도 끔찍한 일을…… 너희에게 안겨주도록 하지.】
……죽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란…… 포식자에게 영혼을 먹히는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나비들의 말에 따르면, 포식자에게 먹힌 영혼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
환생할 기회조차 없이, 허무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에반젤린이나, 포식자에게 먹힌 몇몇 이들이 비록 악인이기는 했지만…….’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그런 형벌은 과한 것이었다.
‘참회할 기회도 얻지 못했구나, 그 사람들은.’
나는 손끝에 다시 빛을 모았다. 그리고 블레셋의 힘과 합쳐 포식자를 향해 쏘아 보냈다.
포식자에게 직격한 창백한 빛이 사방으로 환하게 터져나갔다.
이내 빛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포식자는…… 아까보다 훨씬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렇구나. 생각보다 내구성이 약해.’
저 몸은 에반젤린의 것을 기반으로 한 평범한 그릇.
포식자의 힘에 물들어 계속 변모하고 있었으나, 베이스가 인간의 연약한 육체라는 점은 변함없었다.
‘포식자가 고른 게 단단한 마물의 몸이었다면 상대하기 곤란했겠지만…….’
쉽게 허물어지는 인간의 몸을 고른 덕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앞으로 다섯 번 정도면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겠군요.”
“다섯 번……?”
블레셋의 말에 되묻자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아까처럼 저와 힘을 합쳐 다섯 번의 타격을 준 후, 최후로 단 한 번, 온 힘을 쏟아부어서 포식자를 완전히 소멸시켜야 합니다.”
다섯 번…… 그리고 그 후에 최후의 일격이라.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았다.
게임으로 치면 보스 레이드 때 궁극기를 아껴뒀다가 마지막에 퍼붓는 거려나.
“온 힘을 다한다는 건, 말 그대로 당신과 제가 지닌 모든 힘을 쥐어짜낸다는 말입니다. 바닥을 드러내 사라질 정도로요.”“뭐……? 그럼…….”
“그렇게 하면, 최후의 일격을 가한 뒤로는 더 이상 파마의 힘을 쓸 수 없겠죠.”
“그건 도박이잖아……?”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니 블레셋은 덤덤하게 “그렇죠.” 하고 대꾸했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도박이지만, 이 방법뿐입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그래요. 어중간한 타격을 주는 걸로는 저 괴물을 완전히 없애기란 불가능합니다.”
“…….”
“이번에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으면, 다시 세상에 나타나 힘을 키우겠죠. 당신의 경우처럼, 누군가의 삶을 빼앗으면서 말입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 잊었던 사실을 떠올리자 마음속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 그랬지. 저 괴물 때문에…… 나는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겨야 했다.
생각할수록 괘씸하지 않은가. 덕분에 난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악녀가 되어 있었으니.
‘남의 인생을 잘도 망쳐 놓았겠다.’
나는 이를 악물며 포식자를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노릇인 그 괴물은, 형형한 붉은 눈으로 고요히 이쪽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좋아, 해 보자. 네 작전에 따를게, 블레셋.”
“네, 그럼…… 제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마다 저와 힘을 합쳐 포식자를 공격해 주십시오.”
“알았어.”
나는 아까보다 훨씬 의욕적인 자세로 전투에 임했다.
블레셋이 먼저 움직였고, 그 뒤를 따르며 보조하다가 그가 신호를 보낼 때면 힘을 합쳐 포식자에게 직격타를 날렸다.
그렇게 다섯 번.
눈에 띄게 약해진 포식자가 몸의 부산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워낙에 속도가 느려져서인지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승리일 것이 확실한 상황.
“방심하지 마십시오.”
블레셋이 나직이 경고를 주었다. 지금 같은 상황을, 전에도 겪어봤던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헉, 조심해!”
포식자를 이루고 있던 살덩이가 갑자기 폭죽처럼 터지며, 그 안에서 검붉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형태 없는 안개가 그것의 실체라는 사실을, 나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지금입니다!”
검붉은 연기가 뱀처럼 재빨리 움직여 블레셋에게 달려들었고, 그가 파마의 힘을 펼쳐 방어해냈다.
나는 서둘러 블레셋의 곁으로 달려가며 그에게 힘을 보탰다.
하얗고 푸르스름한 빛이 서로 섞여 들며 겨울의 별빛보다도 시린 광휘를 뿜어냈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힘을 전부 쏟아부으십시오!”
“알았어!”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렸다. 바닥을 드러낼 만큼, 쥐어짜내듯이.
“윽…….”
그 반작용인 듯, 명치가 쿡쿡 쑤시는 통증이 찾아왔고 머리가 핑 돌았다.
하지만 버텨야 했다.
이게 최후의 일격이었으니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블레셋은…… 그리고 나는…….’
내가 지키려는 세상과 소중한 사람들은…….
‘전부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겠지…….’
그리고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모든 우주에서, 존재 자체가.
‘……그건 안 돼. 절대로…….’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이 몸이 부서지더라도,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큭……!”
입에서 울컥 피가 터져 나왔다. 막대한 힘을 갑작스럽게 운용한 탓에 장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이번에 승리하더라도, 어쩌면 한동안은 앓아눕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에이프릴을…… 그리고 그레이안을, 소중한 전부를 지킬 수 있다면야, 앓아눕는 것 정도는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버텨야 해, 버틸 수 있어.’
손과 발이, 팔과 다리가,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하려 애썼다.
시리고 청명한 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눈이 멀 것만 같아 실눈을 뜨고 이를 악물었다.
검붉은 안개는 그 빛에 점점 삼켜지고 있었다.
【어리석어……. 이번에 ‘나’를 없앤다 해도, 훗날…….】
포식자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아득히 들려왔다.
머지않아 파마의 빛에 완전히 삼켜진 포식자는, 곧이어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키더니 산산이 조각나 바스스 흩어졌다.
마치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봐……. 네 선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허공에 떠다니던 포식자의 조각 하나가 내게로 다가왔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파마의 힘을 완전히 소진한 내 몸에 그것이 스며들었다.
“읏……!”
바늘에 찔리듯 따끔한 통증과 함께,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그게 포식자의 기억이란 것을, 나는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작은 조각에 담긴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무척이나 방대한 기억이었다.
‘아……. 이건…….’
그중엔 김지현이 살던 곳과 비슷한 세상도 있었다.
그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멸망했는지를…… 나는 포식자의 기억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세계가 비슷한 이유로 멸망을 맞이했다.
전쟁, 빈곤, 식량 부족, 환경 오염, 기후 위기…….
마법이 크게 발달한 세계는, 그 마법의 과용이 멸망을 초래하곤 했다.
수도 없이 많은 세계가 그토록 확실한 문제들을 떠안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최후까지 욕망을 좇았다.
그 어리석음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는 채로.
‘……그래서 내게 이런 기억을 보여주는 거야? 어느 세상이든, 결국엔 사람이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는 걸 알려주려고…….’
그렇기에 모든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
‘……안 됐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원래 꽃은 한철 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던가?
어느 세상이든 다 똑같을 것이다. 피어나고, 시들고, 사라지고…….
‘다 그렇게 순환하는 거라고…… 나는 믿어. 네가 보여주었듯, 결국 역사가 되풀이될 뿐이라 해도.’
그리 말하는 동시에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더해서 확신했다. 포식자가 보여준 미래에, 절망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과거’나 ‘미래’가 어떻든 간에, 우리가 사는 ‘현재’는 소중하다.
그렇기에 온 힘을 다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네 시도는 또다시 실패했어. ……이제 정말로 작별이네. 안녕, 영원히.’
포식자의 마지막 조각이 내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모든 힘을 잃고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렇게, 운명을 포식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하늘에 가득하던 먹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빛이 지상을 비추었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올려다보였다.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