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최후의 시련
‘……나를 먹고 싶어 안달이 났군.’
그래, 그렇겠지. 나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탐식하는 저 괴물에게 아주 맛깔스러운 진미일 테니.
그러나 나는 순순히 먹힐 의향 따위 없었다. 내 영혼과 운명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이 세상과 이곳의 사람들도…… 나의 소중한 이들도. 전부.
“…….”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무어라고 중얼거린 포식자가 마침내 몸을 움직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나에게 접근한 포식자의 손이 내게로 홱 뻗어왔다.
나는 재빨리 파마의 힘을 몸에 둘러 포식자를 막아냈고, 여기저기서 비명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대피하세요! 포식자를 막을 수 있는 건 저와 여기 이 소년뿐입니다!”
“하, 하지만……”
절반은 이때다 싶어 냉큼 도망쳤지만, 절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군인으로서 나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여러분의 힘으로는 이 괴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괴물에게 좋은 먹잇감일 뿐이에요! 어서 도망치세요!”
그제야 남아서 갈등하던 사람들도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개중 정의로운 자들은 나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탄복하는 것 같았다.
“글로리아 님…….”
“정말 감사하고……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꼭 이기세요! 왕녀님!”
그들이 도망치며 한두 마디씩 남긴 말에 어쩐지 힘이 났다. 그 말들에 담긴 선한 마음 덕분일 것이다.
나는 어깨를 펴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솔직히…… 포식자를 상대하는 것은 내게도 두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내가 포식자를 무찌르지 않으면 아무도 할 수 없겠지. 에이프릴도, 영영 깨어날 수 없을 테고.
그러니 나는 맞서 싸울 것이다. 에이프릴과 그레이안,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게다가 블레셋이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블레셋을 흘끗 훔쳐보았다.
극심한 인간 혐오자에, 차갑고 무심한 성격이지만 그래도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블레셋이 함께라 무척이나 든든했다.
“잘 부탁해, 블레셋.”
“…….”
작게 속삭여 말했지만 블레셋은 묵묵부답이었다. 쌀쌀맞은 녀석 같으니라고. 하지만 저 성격에도 이제 슬슬 적응이 되어 가는…….
“……!”
생각할 새도 없이 포식자가 기습해 왔고, 나는 다시 파마의 힘을 둘러 방어해 냈다.
“읏……!”
그리고 연달아 몰아치는 포식자의 공격을 막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이게…… 계속 나만 공격하잖아!’
포식자는 블레셋이나, 이곳에서 도망친 다른 인간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직 나만 노리며 공격을 쏟아부었다. 게다가, 블레셋이…….
‘왜 아까부터 가만히 있지……?’
내가 분투하는데도 지켜보기만 했다. 나를 돕기는커녕…….
‘대체 왜…….’
블레셋을 흘금거리며 입을 달싹이는데, 포식자의 매서운 공격이 다시 날아들었다.
“헉……!”
방금은 정말로 위험했다. 하마터면 배가 뚫릴 뻔했으니까.
나는 온몸에 겹겹이 파마의 힘을 두르며, 어떻게 하면 포식자의 움직임을 둔하게 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움직이는 게 너무 빨라……. 내가 지닌 힘만으론 상대하기 부족하단 것도 문제고.’
포식자를 경계하며 다시 블레셋을 흘끔 곁눈질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를 돕고자 하는 의향은…… 없어 보였다.
‘대체 왜……. 설마 배신한 건가?’
블레셋이라면…… 그러고도 남을지도 모르지. 이 세상 따위 멸망해도 상관없다고 여길지도.
하지만, 에이프릴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처럼 보였는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그때였다. 포식자가 다시 기습해 왔고,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피하는 데 급급해야 했다.
핏―!
포식자의 날카로운 손톱이 뺨을 스치고, 얕고 긴 상처를 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블레셋의 도움을 받거나…… 아니면 다른 방도를 생각해 봐야―.
“……!”
잠시 물러나는가 싶던 포식자가 재차 공격해 왔고, 한순간 방심한 나는 포식자의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았다.
“큭……!”
“…….”
내 목을 단단히 틀어쥔 채로, 포식자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파마의 힘을 퍼부으며 애썼지만, 포식자는 계속 피해를 입으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 거…… 놔!”
“…….”
내 무의미한 저항을 비웃듯 포식자가 설핏 웃음을 흘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놈에게서 흘러나온 검붉은 안개가 나를 덮쳤고, 나는 까무룩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눈을 뜨자 시야로 들어온 광경은…… 명백히 현실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셀로판지를 유리창에 아무렇게나 이어 붙인 듯한…… 이런 풍경이 현실일 리 없으니까.
‘뭐지……?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포식자를 겨냥해 추궁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셀로판지와 같은 얇은 조각 하나가 펄럭이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 조각 안에는…… 세상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이건…….’
나의…… 글로리아 아인스턴의 세상이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그 얇은 조각 안에서 사람들이 저절로 움직이고 말했으며 나는 그 바깥의 관중이 되어 지켜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수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
―올해 가뭄이 든 것은 전부 수인들 때문이다!
그들은 수인을 멸절해야 한다고 믿는 과격주의자들이었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시위를 일삼았으며 수상한 전단을 뿌리곤 했다.
―당장 그만두세요!
시위가 한창이던 때, 누군가 나타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에 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나잖아……?!’
과격주의자들 앞을 막아선 이가, 다름 아닌 나였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수인은 동물로 변하는 능력이 있을 뿐,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요!
과격주의자들을 꾸짖는 영상 속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모습이었으며 몹시 피곤해 보였다.
―당신이 나라를 수인들에게 팔아먹었지! 이 매국노 왕녀!
―맞아! 아인스턴이 가난해진 건 다 당신 탓이야!
―엘로윈으로 꺼져! 이 배신자!
과격주의자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내며 나를 나무랐고, 심지어는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이 무슨 무례입니까! 다들 그만두지 못해요?! 멈추지 않는다면 전원 연행하겠습니다!
크게 호통치며 앞으로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테나 위즈벨이었다.
그녀 역시 지금보다 나이 든 모습이었는데, 마치 왕족의 수행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주, 주군?’
영상 속 위즈벨 박사가 나를 부르는 호칭에 난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주군이라니…… 도대체 저 영상 속 세상은…….
그때였다. 머릿속에 쇳조각으로 바위를 긁는 것 같은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미래.】
【나를 무찌르고 나서도, 언젠가 네가 겪게 될 미래야.】
잠시 멈칫한 나는 당혹스러움을 애써 갈무리하며 질문을 꺼냈다.
‘넌…… 설마 포식자인가?’
아무런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그 목소리의 주인이 포식자라는 것을…….
‘그리고 이건…… 네가 보여주는 환영인가…….’
이번에도 포식자는 답이 없었다. 대신 무수히 많은 환영이 시야로 들이닥쳤다.
―수인들을 모조리 죽이자!
―엘로윈 놈들에게 복수해야 해……!
―수인들이 저주를 걸어서 아인스턴 왕국이 이렇게 된 거야!
영상 속 아인스턴 왕국은 사정이 매우 나빠 보였다.
극심한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식량난을 겪고 있었으며, 강과 호수, 지하수와 샘물이 모조리 메말라 식수마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다수의 국민이 그 원인을 수인들에게서 찾았다.
수인들을 탓하며 미워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억울하지 않다는 듯이.
―너희 엄마 수인이라며? 그럼 너도 괴물의 자식이겠네.
―우리 아빠가 나라 사정이 이렇게 다 나빠진 건 다 수인들 탓이랬어. 난 수인이 진짜 싫어.
―나도. 수인들은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증오는 어른에게서 아이에게로 대물림되었다. 그렇게 증오의 연쇄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수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꾸준히 늘어났으며, 아인스턴과 엘로윈의 국교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난…… 이런 결과를 바라고 세상을 구한 게 아니었어.
―…….
―아인스턴 왕가를 몰아내고 새로운 체제를 세웠는데, 왜 세상은 더 나빠지기만 하는 거지? 사람들은 어째서 계속 수인을 미워하는 걸까?
그리고 환영 속 나는,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점점 피폐해져 갔다.
간혹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에게서 편지가 왔지만, 그조차 읽기 힘들 정도로 정신적으로 내몰린 상태였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 난 정말 노력했어. 할 만큼 했어…….
―주군…….
그다음 장면에서, 나는 위즈벨 박사와 함께 아인스턴을 떠났다.
그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인스턴에는 과거와 같은 수인 대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충격에 앓아눕고, 며칠 밤낮을 고열에 시달리다가…….
―부인……!
―아, 안 돼요, 어머니……! 이렇게 떠나 버리면……!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
【이게 너의 미래. 네 노력은 전부 부질없어. 인간들은 결국 또다시 수인을 혐오하게 될 테고, 세상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포식자의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환영을 바라보았다.
‘이게 이 세상의…… 그리고 나의 미래라고……? 아니야, 믿을 수 없어.’
포식자가 나를 절망시키기 위해 보여준 거짓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충분히 찾아올 법한 미래라는 것을…….
그렇기에, 저 목소리에 속절없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겠지.
【어차피 넌 절망 속에서 죽게 돼.】
【그러니 이만 포기해. 지금 여기서 전부 포기하고 끝내 버리면 차라리 마음이 편할 테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어차피 불행하게 죽을 거라면 차라리 금방 끝내 버리자는…… 쉽게 혹할 만한 이야기였다.
‘……아니야, 그래도 나는…….’
【그래도? 저 미래에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모든 이를 설득할 순 없어. 세상을 구하는 건,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야. 인간의 역사는 욕망을 따라 흐르게 되어 있으니까.】
……그 또한 옳은 말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운명을 포식해온 이 괴물은, 인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조용히 생각했다. 혼란스럽고도 절망 어린 기분으로, 그럼에도 한 조각 남은 희망을 찾으려 애쓰면서.
그러다 문득, 언젠가 에이프릴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여러 갈래의 미래’였어요. 한두 개가 아닌 수십 개의 미래가 보였죠…….’
에이프릴의 예지 능력에 대한 것.
‘확정된’ 하나의 미래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택에 따른 모든 결과, 즉 평행세계가 전부 보인다는 이야기…….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어두운 곳에 환한 불이 켜지듯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래, 분명…… 에이프릴이 그런 말을 했었지…….’
미래는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으며, 우리의 크고 작은 선택이 결과를 좌지우지한다고…….
그렇다면, 포식자가 보여준 환영도…… 여러 갈래의 미래 중 하나일 뿐.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 맞아. 미래는 아직 정해진 게 아니야.’
앞으로 내가, 다른 이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게 미래다.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믿어 보기로 했잖아.’
세상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었지.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엘로윈을 여행 중이라던 아카데미 연구생들, 올곧은 마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테나 위즈벨 박사, 수인 노예 해방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
그렇게나 아름다운 마음들이 아직 충분히 세상을 채우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포기할 수 있을까.
‘……난 여기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네가 보여준 미래가 아무리 절망적이라 해도…….’
나는 어둠 속에서 손을 뻗었다. 새하얀 빛이 손끝에 모여들고, 이내 넓게 퍼져나가며 이 공간을 부수기 시작했다.
포식자의 환영이 조각조각 흩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나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거야, 글로리아.}
{이제 넌 포식자에게 지지 않아.}
나를 감싸고 있던 거짓된 세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마침내 나는 진짜 현실로 빠져나왔다.
{자, 이 대단원의 막을 내려보자. 글로리아 아인스턴. 세계의 조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