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131화 (131/144)

##  131화. 운명을 포식하는 자

“지금 어디에 있다고요?”

확인차 묻자니, 나를 마중하러 온 반란군 측 인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라니에로 왕은 왕궁 북쪽 탑에 칩거해 있습니다. 그의 남은 군사들과 마법사들이 탑을 지키는 중이지요.”

“흐음…….”

그중엔 필시 라니에로 왕의 그림자인 가리크와 근위대장 데릭, 그리고 직속 마법사인 세낙이 있을 것이었다.

그 셋은 한 명이 수십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이니 여태 버텨 온 것이겠지.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 셋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반란군을 끝까지 막아내기란 역부족일 터.

라니에로 왕의 패배는 벌써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염려스러운 점이…….’

세이렌……. 그 이름을 쓰고 있는 포식자가 분명 라니에로 왕의 곁에 있을 텐데.

‘지금 이 상황도 세이렌의 의도대로 된 것일 가능성이 커.’

궁지에 몰린 라니에로 왕이 세이렌이 내민 선택지를 덥석 고른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큰 재앙이 세상에 닥칠지도 몰라.’

세이렌의 최종 목적은 이 세상을 멸망시켜 자신의 배 속으로 집어삼키는 것이니까.

‘……불길해. 어서 라니에로 왕을 대면하러 가 봐야겠어.’

초조한 기분에 심장이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었다. 나는 북쪽 탑으로 향하는 걸음을 서둘렀다.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다.

* * *

북쪽 탑 꼭대기에서는 저 멀리 웨일스의 남쪽 성문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던 라니에로는 초조한 기색으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반란군의 기세에 밀려 이곳에 칩거한 지도 벌써 18시간이 흘렀다.

이 탑에 저장된 물과 식량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고작해야 사흘…….

이대로는 방법이 없었다. 무슨 수라도 내야만 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때였다. 라니에로의 곁으로 뱀처럼 스르륵 다가온 세이렌이 머리를 조아리며 유령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찾고 계십니까…….”

“그야 당연하지 않겠느냐. 왜? 뾰족한 수라도 생긴 것이냐?”

그러자 세이렌은 창백한 입술을 끌어올려 설핏 웃었다.

“방법이야 있습니다만…….”

“그래? 어떤 방법이지?”

“그건…… 여기 이분께서…….”

세이렌이 뒤를 돌아보며 옆으로 슬며시 물러났다.

이내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고, 상대를 알아본 라니에로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에반젤린……? 네가 어떻게……!”

“…….”

전쟁을 시작하기 전, 라니에로는 골칫거리인 에반젤린을 완전히 치워 버릴 심산으로 세이렌에게 에반젤린을 독살할 것을 명령했었다.

그런데 에반젤린이 살아 있다니? 그 말인즉…….

“세이렌……. 내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냐?”

“당신을 이용하기엔 부족한 것이 있어서요, 폐하.”

“뭐라고……?”

“당신에겐 증오심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당신은 탐욕스러운 사람이지만, 그 이상의 광기는 없지요. 그래서 에반젤린 왕녀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을 불태워 버릴 만큼 강렬한 증오이니까요…….”

보란 듯이 후드를 내린 세이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라니에로는 강한 이질감에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마치……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 흉내를 내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저 몸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인형. 인형이 틀림없었다. 저 비정상적으로 창백한 피부며, 이상할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얇은 머리카락,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

“뭐냐, 넌…… 넌 대체…… 도대체 정체가 뭐야!”

소름이 쫙 끼친 라니에로가 주춤거리며 세이렌을 삿대질했다.

그가 내보이는 경악 어린 반응에도, 세이렌은 그저 유유히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보시다시피, 이 몸은 인형의 것이지요.”

“뭐라고? 그럼 너는……!”

“제가 무엇인지까지는 당신이 알 필요 없습니다. 곧 죽을 사람이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무슨……!”

그 순간이었다. 계속 라니에로를 노려보던 에반젤린의 눈동자가 살의로 번득였다.

에반젤린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고, 라니에로는 꼼짝할 수 없었다.

겁에 질려서가 아니었다. 세이렌이 무슨 짓인가 한 것이었다……! 그는 큰소리로 자신의 측근들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세낙! 가리크!”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바깥까지 닿지 못하고 방 안에서만 메아리칠 따름이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에반젤린이 단검을 든 팔을 높이 치켜들었고, 라니에로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새까만 동공에 칼날의 시퍼런 빛이 반사되었다.

푹―.

망설임 없이 내리꽂힌 단검이 라니에로의 심장을 꿰뚫었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라니에로는 비틀거리며 피를 뱉어내고는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절명한 라니에로를 에반젤린은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더니…… 에반젤린은 이내 미친 것처럼 크게 실소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녀는 확실히 미쳐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증오했다.

“자, 이제 나에게 힘을 줘.”

광기 어린 눈으로 세이렌을 돌아본 에반젤린이 요구했다.

이곳에 오기 전, 세이렌은 에반젤린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쥘 힘을 주겠노라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강대한 주술을 행해야 했고, 그 주술의 첫 번째 선행 조건이 바로…… ‘친족 살해.’

‘힘을 얻기 위해선 당신의 친아버지를 죽여야만 합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소릴? 난 당장이라도 부왕을 죽이고 싶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그렇기에 죽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자신을 버린 부왕이 아니었던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반젤린은 힘을 원했다.

제 삶이 꼬이기 시작한 건 글로리아, 그 주제도 모르는 계집애가 성령의 힘을 얻으면서부터였다.

에반젤린은 박탈감을 느꼈다. 왜 내가 아니라 글로리아인 거지?

이런 열등감, 질투심을 글로리아 따위에게 느껴야 한다니!

‘내게도 힘이 있었더라면……!’

자신이 다른 누군가보다 뒤떨어지는 현실 같은 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전부 부수고 뒤엎고 싶었다. 글로리아를 제 앞에 무릎 꿇리고 싶었다…….

“어서 내게 힘을 줘! 약속했잖아!”

“물론 그래야지요, 저도 마침…… 원하던 것을 이루었거든요. 66666번째 친족 살해자, 당신 덕분에.”

“뭐…….”

에반젤린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불쑥 뻗어온 세이렌의 손이 그녀의 몸을 쑥 파고들었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맹수의 송곳니에 물린 초식 동물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그리고…….

‘어……? 어……? 어…….’

무언가 자신을…… 육체가 아닌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

다음 순간, 에반젤린의 몸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졌다.

세이렌은 손안에 가득 쥔 영혼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 영혼이 지닌 이야기가 제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영혼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포만감에, 이야기를 포식하는 괴물이 만족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방금 먹은 이야기에서는 불행의 맛이 났다. 비극의 맛은 언제나 특별했다. 행복한 이야기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아직 부족해……. 더 많이 먹고 싶어. 다 집어삼키고 싶어…….”

괴물은 텅 빈 에반젤린의 몸을 빼앗았다. 낡아 삐거덕거리는 인형의 몸을 버리고, 살아 있는 육체에 깃들어 밖으로 나섰다.

‘에반젤린’을 본 세낙과 가리크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반젤린 왕녀? 당신이 어떻게…….”

‘에반젤린’의 손이 세낙의 몸을 푹 꿰뚫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뽑아낸 영혼을 입으로 가져갔다. 먹어치웠다.

“이, 이게 무슨……!”

경악한 가리크가 재빨리 검을 고쳐 쥐었지만, 그것을 휘두를 기회는 오지 않았다.

풀썩―.

세 번째 희생자의 몸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배고픈 괴물은 두 손 가득 움켜쥔 영혼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 * *

{안 돼!}

별안간 나비들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북쪽 탑으로 향하던 나는 깜짝 놀라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영혼이…… 이 세계에서 태어난 영혼 하나가 사라졌어!}

{포식자에게 먹힌 게 분명해! 포식자가 각성한 거야!}

{또……! 안 돼!!}

나비들이 너무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기에 나 역시 심장이 세차게 뛸 만큼 놀라고 겁을 먹었다.

그러나 침착하려 애쓰며 나비들에게 물었다.

‘진정하고 설명해 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영혼들이…… 사라져 가고 있어. 포식자가 먹어치우는 거야.}

{포식자가 한 세계를 전부 집어삼키려면…… 일단 하나의 영혼부터 먹기 시작해야 해. 그렇게 수많은 영혼을 다 먹어치우면…… 그 세계는 끝장이야. 모든 운명을 잃고 무너져 내리게 돼……!}

‘포식자가 각성했다는 건 무슨 소린데?’

{포식자가 한 세계의 영혼을 잡아먹기 위해선…… 그 세계의 질서가 흐트러져야만 해. 그러기 위해선 질서를 깨고 균열을 일으킬 만한 광기가 필요하고.}

{그 광기는 보통 인간에게서 나와. 인간의 광기가 폭발하고 세계에 금이 가는 순간이…… 바로 ‘친족 살해’가 벌어지는 때야.}

{그렇게 여러 차례 세계에 금이 가게 하기 위해서 포식자는 계속해서 희생양을 물색해 왔어. 수만 번도 넘게, 수많은 사람을 미치게 해서 자신의 친족을 살해하도록 했지.}

{그런 식으로 계속 세계에 금이 가다 보면, 언젠가는 금이 간 부분이 깨지는 순간이 오게 돼. 바로 그 순간 세계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포식자는 세계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영혼들을 포식하는 거야.}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내가 이해할 수 없어 하자 나비들이 답답해했다.

잠시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냥 간단히 말해서, 세계를 지키고 유지하는 힘이 포식자가 영혼들을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약해졌어!}

{이 세계에서 태어난 모든 영혼과 생명은…… 보이지 않는 힘에 보호받고 있어. 그 힘이 약해진 틈을 타 포식자가 영혼들을 사냥하기 시작한 거야……!}

……그렇군.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그러니까 지금…… 굉장히 심각한 사태라는 얘기인데.

‘아무래도 지금 당장 블레셋을 불러야겠다.’

원래는 라니에로 왕을 만나고 담판을 지은 뒤, 반란군에 명분을 쥐여 주고서…… 그런 뒤 블레셋을 이쪽으로 부르려 했다.

반란군에게 포식자의 존재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한 후, 모두 힘을 합쳐 포식자를 사로잡을 계획이었는데…….

“으아악!”

“사람 살려!”

“뭐,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뜻밖에도 일이 터져 버렸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일이.

“글로리아 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지금 왕의 군대가 저희 쪽으로 무장 해제하고 항복해 오고 있는데……!”

“……네, 저도 알아요. 지금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왕의 군대는 공포에 질린 채로 북쪽 탑에서 도망쳐 오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저게 대체 뭐냐’고 소리쳐댔다.

그들이 도망쳐 오는 반대 방향, 여기서는 너무 먼…… 그곳에는…….

검붉은 빛의 불길한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