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세이렌의 노랫소리
“내 몸과 영혼의 파동이요?”
의아함에 묻자니 그레이안이 조금 흠칫했다. 그의 얼굴에 언뜻 죄책감이 어렸다.
“그게…… 사실은, 전에…….”
그레이안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내 몸과 영혼의 파동이 일치하는지, 전에 몰래 확인해 봤다고 말이다.
“음…….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살짝 당혹스럽긴 했으나 불쾌하진 않았다. 그레이안도 내 영혼이 바뀐 게 아닐까 의심했었구나.
실제로 바뀌긴 했으니 그의 추측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진상은 더 복잡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공작 부인께서는―.”
그때였다. 근처에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아르윈이 거리를 좁히며 물어 왔다.
“그 괴물, 포식자에게 열두 살 때 몸을 빼앗겼다가, 스물한 살 때 되찾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음, 네. 맞아요. 그레이안과 결혼하던 시점에요. 정확히는 결혼식 당일 신부 대기실에서…… 원래 몸으로 돌아왔죠. 내겐 아무런 기억도 없었고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니, 아르윈이 나를 유심히 살펴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공작 부인께서 기억 상실이라 하셨던 것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군요.”
“그런 셈이죠…….”
“……그런 괴물이…… 포식자가 실재하다니……. 여태 그 실체를 쫓아 왔지만, 괴담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직이 읊조린 아르윈의 시선이 허공을 스쳐 세계수에 가닿았다.
하늘 높이 뻗쳐 있는 세계수의 가지들을 올려다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세계수는 이미 그 존재를 인식하고 이 세계에서 배제하려 애쓰고 있었군요. 제가 추측한 게 맞는다면…… 포식자라는 괴물은 한 사람의 인생을, 나아가 세상의 역사를 집어삼키려 할 테니.”
“……맞아요, 포식자는 지금 세이렌이라고 하는 주술사의 몸에 빙의되어 있죠. 그 주술사는…….”
나는 포식자에게 몸을 빼앗겼던 순간을 힘겹게 떠올렸다.
각인된 공포에 손발이 차가워지고 식은땀이 흘렀으나,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포식자와 대적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주술사는…… 맞아요,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람이 아니었다고요?”
“그건…… 그 몸은 인형이에요. 사람과 매우 흡사하게 만들어진, 마법이 담긴 인형이요. 오래전 아인스턴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 유행했었죠.”
그 인형, 세이렌은 주인이 시동어를 말하면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려주는 인형이었다.
열두 살 생일 선물로 들어온 물건 중 가장 값비싼 것이기도 했다.
세이렌의 노랫소리는 아름다웠으나 어딘지 모르게 소름 끼치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구석에 처박아 뒀었는데…….
어느 날…… 그게 스스로 움직였다.
그땐 너무 겁에 질려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나중 가서 깨달았다. 그 인형에 깃든 존재가 바로 포식자였음을.
{포식자는 무작정 사람의 몸을 빼앗으려 들지 않아. 일단은 사물에 깃들지.}
{그리고 적절한 때를 기다리는 거야. 노리던 사람의 마음에 큰 공허감이 생기면, 그 틈을 파고드는 거지…….}
그래서 포식자가 내 몸을 그리 쉽게 빼앗을 수 있었던 거였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으니까.
“포식자는 내 몸을 빼앗은 뒤 계속 나로 행세하다가, 내가 몸을 되찾자 그 인형에 깃든 걸 거예요. 그리고 나로 행세하던 시절에도…… 그 인형을 움직여 ‘세이렌’이라는 주술사인 것처럼 위장한 걸 테고요.”
‘글로리아 왕녀의 주술사’의 진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세이렌이라는 이름의 주술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포식자가 꾸며낸 것일 뿐.
“그럼 우리가 없애야 할 상대는…… 바로 그 포식자로군요. 그 괴물이 사라져야, 에이프릴이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을 테니…….”
그레이안이 꽃밭 사이에 잠든 에이프릴을 돌아보며 나직이 말했다.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가 하염없이 에이프릴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레이안의 손을 잡으며 굳게 결심이 선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당신도요, 그레이안. 포식자를 없애면 당신과 솔즈베리 가문도 저주에서 풀려나게 될 거예요.”
그러자 잠시 멈칫한 그레이안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렇지요. 저와 제 가문의 선조들 역시…….”
나는 그의 눈을 곧게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는 확실히 정해졌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았던,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세상의 역사마저 집어삼키려 하는 ‘운명을 포식하는 자’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
우웅―.
다시, 세계수로부터 울림이 전해져 왔다.
세계수는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가서 너의 사명을 완수하라고.
{가자, 글로리아.}
{때가 됐어.}
나비들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질였다.
{운명을 포식하는 자가 유도하는 증오의 연쇄를 막고, 세계의 평화를 조율하는 거야.}
{그게 바로 조율자의 일……. 너의 사명이야.}
* * *
인간의, 혹은 그에 준하는 지성체의 발명품 중 가장 아름답고 허무한 것이 바로 ‘이야기’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라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소중히 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삶을 고민하기보단 현실의 괴로움을 외면하려 망상 속으로 도피하곤 했다.
그 가공된 허구의 망상이 바로 이야기였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제만큼 커다란 존재감을 지닌 것.
사람은 이야기를 갈망했다. 어느 세계, 어느 시대에서나. 이야기는 목소리로, 노래로, 문자로 전해져 왔다.
이야기를 욕망하는 것은 틀림없이 지성체의 본능일 것이다.
그러니 꿈을 꾸는 모든 존재는 그 욕망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
그 욕망 속에서 자신은 태어났고, 그 욕망이야말로 제 힘의 원천이었으니.
인간이 이야기를 욕망하는 것처럼, 자신도 이야기를 욕망했다. 이야기를 탐식하는 것만이 제 본능이었고 그 외에 다른 것은 중요치 않았다.
포식자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모든 이야기를 집어삼켜도 이 공복감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영원히.
그러니 먹고, 또 먹는 수밖에……. 어차피 ‘세계’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나를 먹어치우면 또 하나가 생겨나고……. 포식자에게는 모든 세계가 잘 요리된 하나의 진미처럼 보였다.
그러니 세계를 탐식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욕망 그 자체인 존재에 양심이나 가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저 포식하는 것만이, 이 스스로 이름 붙이지 못한 괴물의 숙명이다.
“……그래, 네 말이 옳아.”
“…….”
“전쟁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겠지. 더는 미룰 수 없다. 어차피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라니에로 왕이 손끝으로 권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늘 그렇듯 냉랭해 보였지만, 드물게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권력을 지닌 자는 그것을 유지하려 애쓰게 된다.
그렇게 힘을 쏟는 과정에서 불안감이 싹트기 마련. 제아무리 냉혹한 폭군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돌아 버린 인간이 아닌 이상.
그리고 라니에로 아인스턴은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긴 했으나 제대로 미쳐 돌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에겐 불안감을 먹어치울 광기가 부족했고, 따라서 작금의 상황에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칼윈 공작……. 그 빌어먹을 반역자가…….”
칼윈과 그 동맹인 여타 가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필시 반역의 조짐이었다.
라니에로는 하루라도 더 빨리 칼윈 공작의 목을 치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기회가 있을 때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세이렌……. 네가 글로리아의 주술사로 있을 땐 너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했었지. 그저 글로리아가 유흥으로 끌고 다니는 삼류 주술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설마 그렇게나 대단한 힘을 지녔을 줄은…….”
“…….”
“네 말대로만 하면, 확실히 칼윈 공작을 치워 버릴 수 있는 거겠지? 그리고 전쟁도…… 반드시 아인스턴의 승리로 끝나야만 해……. 엘로윈을 무너뜨리고 이 대륙의 패권을 완전히 휘어잡아야만……. 그 위대한 역사는 내 손으로 쓰여야 한다. 기필코.”
불안감을 지닌 인간은 쉽게 흔들리기 마련. 포식자, 세이렌은 인간의 나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이성을 잃게 하는 데 천부적이었다.
그리고 라니에로 왕은…… 이미 제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전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전쟁을 선포하려면 지금뿐입니다, 국왕 폐하…….”
유령처럼 속삭이는 세이렌의 목소리에는 저항할 수 없는 매혹이 깃들어 있었다. 선원을 꾀어 배를 난파시킨다는 바다 괴물의 노랫소리처럼…….
“칼윈 가와 그 동맹 가문들이 반역에 시동을 걸기 전에…… 폐하께서 먼저 이 거대한 흐름의 주권을 휘어잡으셔야 합니다……. 어차피 다른 대가문들과 왕가의 군사들은 폐하의 편이지 않습니까……. 칼윈 가와 동맹 가문들의 세력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왕가에 비견할 바는 아닐 것입니다…….”
사실 칼윈 가와 동맹 가문들은 반역을 위해 왕가와 비등할 정도의 세력을 모았고, 본래 왕가를 따르던 몇몇 대가문도 이미 넘어간 뒤였지만, 그 정보들은 라니에로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세이렌이 가로챘기에 라니에로는 알지 못했다.
“그래, 그래……. 네 말이 옳다. 서둘러야겠군.”
게다가 라니에로는 세이렌의 현혹에 걸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잠시 후.
측근들과 신하들을 불러 모은 그가 전쟁을 시작하겠노라 공언했다. 큰 파란이 알현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몇몇 신하가 조심스레 간언을 올렸으나, 아집에 사로잡힌 라니에로는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미리 차출해둔 병력을 웨일스 성의 북문에 집결시켰다.
엘로윈을 완전히 함락할 목적으로 조직된, 역사에 유례없는 정예 대군이었다.
이 속보는 곧 아인스턴 전역에, 나아가 엘로윈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
“결국 라니에로 왕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모양이로군.”
첩보를 전해들은 엘로윈의 베노아 왕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리될 거라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해 왔기 때문이다.
베노아는 라니에로가 아직 왕태자였던 시절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라니에로 아인스턴은 야망이 큰 자였다.
그가 원하는 게 단순히 아인스턴의 권좌 하나만이 아님을 베노아는 일찍이 알아차렸다.
라니에로에게는 훗날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엘로윈과 아인스턴이 오랜 세월 유지해 온 균형을 깨고, 수인을 완전히 배제한 인간의 시대를 도래하게 하겠다는 야망.
라니에로는 바로 그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이었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폐하…….”
“어찌하긴.”
신하의 물음에 짤막이 한숨을 내쉰 베노아가 왕실 시종에게 손짓했다. 군단장을 불러오라 명하기 위해서였다.
“국경 수비대의 인원을 늘리고, 솔즈베리 공작가에도 연락을 취해야지. 그쪽에서도 이미 첩보를 전해 듣고 행동에 나섰겠지만…….”
이쪽에서 미리 선제공격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베노아는 엘로윈의 역사에 전범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엘로윈이 먼저 침략하는 쪽이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최근 라니에로 왕이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더니, 사실이었나 보군…….”
그가 전쟁을 일으키더라도 향후 10년 뒤일 것으로 예상했던 베노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라니에로 왕은 이번 전쟁 준비가 완벽하리라 자부하는 모양이지만, 자신이 알아본 바로는 구멍이 많았다.
그러니 장기전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 거야?”
“수도에는 피해가 없겠지?”
“그야 모르지……. 이번엔 엘로윈 쪽에서도 국경을 넘어 진격해 올지도.”
“아니, 우리 가족 올해 말에 엘로윈으로 여행 가려 했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어쩐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선민사상에 찌든 라니에로와 일부 지배층의 예상과는 달리, 아인스턴의 일반 국민들은 전쟁을 달갑게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전쟁이 나면 피해를 입는 것은 늘 귀족 이하의 일반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부르주아 계급의 상인들은 군비 조달이라는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세금을 나라에 바쳐야 했기에 불만이 컸다.
엘로윈에서 먼저 침략해 오는 바람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한다면…… 기꺼이 내고도 남는다.
그런데 정복 전쟁이라니. 이해득실을 따져보았을 때 손해가 클 게 분명한 짓을 왜 한단 말인가.
“불쌍한 우리나라 청년들만 가서 다 죽는 일이잖아.”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젠장……. 내 아들도 한 달 뒤면 열여덟인데, 징집당하는 건 아닌지…….”
주점에, 식당에, 카페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전쟁에 관해 떠들어댔고, 분위기는 몹시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전쟁 특보가 널리 퍼지고 이틀 뒤, 엘로윈을 향해 행군하려는 정예 대군 앞을 뜻밖에도 민간 시위대가 가로막았다.
그들은 간단한 무장조차 하지 않은 무력한 몸으로 나무 팻말을 든 채 외쳤다.
“국왕 폐하께서는 부디 침략 전쟁을 중단하십시오! 애꿎은 사람들만 죽어날 것입니다!”
“간청하옵니다!”
“간청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