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안녕, 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에
에티엔은 급격히 안 좋아진 몸으로도 소설을 계속 집필해 나아갔다.
마치 그것만이 마지막 희망이라는 듯 매달리는 모습에, 나는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심지어 화를 거듭할수록 에티엔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이젠 내가 수정할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에티엔이 힘들게 집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가끔은 에티엔의 의식이 잠들고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음식을 좀 해두거나 집을 청소해 놨다.
신기하게도 내 의식이 에티엔의 몸을 움직일 땐 아프지 않았고 각혈하는 일도 없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에티엔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더 늘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예정된 죽음마저 바꿀 순 없겠지.
그러고 싶어도, 그래선 안 되는 거겠지…….
‘나는 이곳에서의 역할을 잘 마치고, 미래로 돌아가야만 하니까…….’
처음에는 에티엔을 다시 만나게 해준 세계수가 정말 고마웠었는데…….
이제는 다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에티엔을 살릴 방도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커다란 무력감이 들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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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163화가 완성되었다.
에티엔은 업로드 예약을 마친 후, 잠시 망설이다가 빈 문서를 하나 열었다.
그리고 공지를 작성해 나아갔다.
내 기억 속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연중 공지였다.
[마지막까지 보여 드릴 수 없게 됐지만 부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에 축복이 가득하길.]
공지의 마지막을 장식한 문구는 바로 그것이었다.
나에게, 자신이 김지현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글로리아에게 보내는 메시지.
그 공지까지 업로드 예약을 완료한 후, 에티엔은 창가로 다가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추억을 그리워하듯이 깊어진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 순간이었다.
“아…….”
창밖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이 송이송이 떨어져 내렸다.
먹구름이 자욱한 하늘은 옅은 청회색이었고, 솜뭉치를 잘게 잘라 흩뿌리는 듯한 눈송이들이 하늘에서 가득 내려왔다.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와 차가운 아스팔트 위를 적시며 작은 눈송이들이 녹아내렸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벌써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하얀 옷을 입어 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던 에티엔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죽기 전에…… 예쁜 풍경 보고 가네.”
이것으로 자신의 삶에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에티엔은 체념 어린 표정으로 창가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옷장을 열어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까지 단정히 빗은 뒤, 에티엔은 싱글베드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에티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글로리아……. 내 소중한 아이…….”
그 순간,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지금 에티엔이 하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만 같은…….
“미안하구나…….”
‘……아…….’
생각났다.
나비들의 힘을 무리해서 쓰는 바람에 기절했었던 때 들었던 목소리…….
“……내가 보여준 이야기가 너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 글로리아.”
그 목소리가, 어머니의 것이었구나.
‘엄마…….’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어머니를 불렀다.
벅차오르는 애틋함으로, 사무치는 그리움과 슬픔으로. 그러나 내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질 따름이었다.
나는 그녀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강한 인력이 내 영혼을 어디론가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에서 분리된 내 영혼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나는 에티엔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제발…….’
그때였다. 에티엔이 스르륵 눈을 떴다.
그녀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에티엔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어리더니, 그녀가 희미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글로리아……?”
‘엄마……!’
에티엔이 파르르 떨리는 손을 나에게 뻗었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그 손은 내 영혼을 통과할 뿐이었다.
“아……. 글로리아……. 정말 너니?”
나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티엔이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대한 또렷한 입 모양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도…….”
에티엔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사랑한단다…….”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듯 그리 전하고는, 에티엔은 고개를 푹 떨어트리며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가 기어코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충격과 슬픔에 오열할 새도 없이, 내 영혼은 빠르게 어디론가 휩쓸려갔다.
‘엄마…….’
사무치는 감정에 맥을 추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세계수의 울림이 전해져 왔다.
우웅―.
세계수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울컥하고 원망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나는 애써 감정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사실 세계수 님이 좀 원망스러웠지만…… 이해해요. 그리고 어쨌든 어머니와 마지막 인사는 나누었으니까.’
그 잠깐의 마주침이 부디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었길. 떠나는 마지막 순간이 외롭지 않았기를.
나는 잠시 조용히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 남들이 뭐라 욕하든, 내게는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세계수를 향해 여전히 슬픈 기분으로 물었다.
‘이제…… 저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되나요?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에이프릴은…….’
웅―
아직 보여줄 게 남았다, 세계수는 그리 대답했다.
내 영혼은 흐르는 강물을 따라가듯이 어디론가 유영해 나아갔다.
까마득한 어둠과 별의 길을 지나쳐, 마침내 시야가 탁 트이고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여긴…….’
성지 히페리온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예를 들면…….
‘세계수가…… 평범한 나무처럼 생겼어.’
그야 크기는 무진장 컸지만. 다이아몬드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보통의 나무처럼 짙은 갈색 껍질을 지녔고, 푸르른 잎으로 뒤덮여 있었다.
‘설마 여긴 과거의 히페리온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세계수 근처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의 곁으로 세계수의 나비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바로 세계의 조율자라는 사실은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여긴 아주 먼 옛날의 히페리온인 것 같았다.
“자, 너희 둘의 소원은 뭐야? 세계수 님이 들어주실 거야.”
조율자가 다른 둘에게 묻자,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차례로 대답했다.
“나는…… 동물로 변하는 능력을 얻고 싶어.”
“동물로……? 왜?”
“동물들은 인간과는 달리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을 지녔지. 그리고 무리와 유대감이 깊고 좀처럼 배신하는 일 없이 충실해. 나는 동물들의 바로 그런 점을 닮고 싶어. 그게 인간의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줄 거야.”
“흠……. 그래, 알았어. 그럼, 너는? 무슨 소원을 빌 거야?”
고개를 끄덕인 조율자가 다른 한 명에게 물었다. 세 명 중 가장 키가 작은 마지막 한 사람은, 조금 소심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나는……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갖고 싶어. 그런 게 있으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쓸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좋은 생각이지만, 그 힘이 너를 괴롭게 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그래, 그럼…….”
조율자는 두 사람을 잠시 기다리게 하더니 세계수와 소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후, 세계수의 몸에서 다채로운 색의 동그란 빛이 흘러나와 두 사람의 몸에 차례로 들어갔다.
그 빛에 담긴 게, 바로 두 사람이 원하던 힘인 것 같았다.
거기까지 지켜본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곳이 세상이 막 시작된 시점의, 까마득한 옛날이라면…….
‘동물로 변하는 능력을 얻은 사람은 수인의 시초……. 그리고 예지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에이프릴의 아주 먼 조상인가?’
세 사람은 서로 손을 잡고 삼각형을 이루어 세계수 앞에 서더니,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맹세했다.
“세계수 님에게 귀한 능력을 선물로 받은 우리 셋이, 이제 앞으로 이 세상을 지키고 가꿔 나가는 거야.”
“응.”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는 일 없이, 모든 생명을 아끼며 해치지 않도록…….”
먼 옛날의 히페리온과 세 사람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내 영혼은 또다시 어디론가 이끌리고 있었다.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며, 세계수가 왜 나에게 방금 그 장면을 보여준 것인지를 생각했다.
‘수인의 시초는 동물로 변하는 능력을 얻은 사람……. 결국, 수인과 인간은 아무런 차이도 없는 거였어.’
그런데 인간이 수인을 멸시하며 혐오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세 사람은 세계수 아래에서 맹세했지. 세상을 지키며 좋게 가꿔 나가겠다고…….’
……그래, 그렇구나.
세계수가 나에게 방금 그 장면을 보여준 이유는…….
‘세계의 조율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제 확실히 알겠어.’
그 깨달음과 함께, 강한 인력이 내 영혼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는 내 몸에서 번쩍 눈을 떴다.
.
“글로리아!”
다급히 나를 부르는 이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그레이안이었다.
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얼마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던 거지?
의문을 소리 내어 묻기 전에, 그레이안이 한시름 놓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시간 동안이나 의식이 없으셔서 걱정했습니다, 부인……. 무사히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한 시간……?
나에겐 무척 긴 시간이었는데, 여기선 고작 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다니…….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에이프릴은요?”
내가 묻자 그레이안이 고개를 돌려 한 방향을 가리켰다.
세계수 아래, 꽃으로 가득한 자리에 반듯이 누워 있는 에이프릴의 모습이 보였다.
블레셋은 그 옆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성지 히페리온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세계수의 영향으로 치유의 힘을 지니고 있어, 저렇게 가까이에 있으면 에이프릴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블레셋이 그러더군요.”
“아아…….”
나는 이해했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슬픈 기분이었지만…… 너무 늦지 않게 이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벨루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벨루인과도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데…….’
그녀는 비록 내 유모였으나 친어머니처럼 나를 소중히 아끼고 길러준 사람이었다.
육아에 서툰 내 어머니는 언제나 벨루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나를 다시 만나 진실을 전한다는 한이 풀려서 사라진 것일까…….’
벨루인을 위해 잠시 묵념한 나는, 이내 그레이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선 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의식을 잃은 동안 내게는 많은 일이 있었어요.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요.”
그레이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로드리와 아르윈도 근처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과거의 내 어머니를 만난 것, 그녀가 나를 이 세계로 인도한 것까지 간략하게 설명했다.
더불어 열세 살이 되기 직전의 나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물론 다른 세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 같은 건 생략했다.
그런 것까지 말하려면 얘기가 너무 장황해지니까.
내 이야기를 전부 들은 그레이안은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그래서…… 당신의 몸과 영혼의 파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