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127화 (127/144)

##  127화. 최고의 편집자

제목과 소개글까지 적는 덴 어려움이 없었지만, 인물 설정과 플롯을 짜는 단계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근데 이거 19금 피폐물이잖아…….’

그런데 에이프릴이 여주인공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내 양딸을 여주인공으로 한 19금 피폐물을 써야 한다는 소리!

‘아니, 미친!’

하마터면 키보드를 던져 버릴 뻔했다. 그런 미친 짓을 어떻게 해! 나는 유교 국가에서 자란……!

……물론 글로리아 아인스턴이기도 하지만.

‘하…… 돌겠네…….’

에티엔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시간이 없었다.

어서 빨리 결정해야 했다. 내가 읽은 원작대로 인물 설정과 플롯을 짤지, 아니면…… 변경할지.

‘변경하면…… 미래가 바뀔지도 몰라.’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다른 곳에서 큰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 이론은 기상학자가 생각해 낸 것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어왔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게 바로 시간 여행에 관한 것이었다.

시간 여행자가 아주 사소한 과거를 바꿨을 뿐이더라도, 미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이때 당시의 김지현을 떠올려 보자. 분명 과제에 파묻혀서…….’

……스트레스 풀려고 자극적인 것만 찾아보고 다녔지. 힐링물 같은 건 거들떠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만일 내가 토공은을 밍밍한 맛으로 변경해서, 김지현이 안 보고 지나친다면…….’

신탁의 언어는 김지현인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테고, 글로리아 아인스턴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방법이 없어…….’

……19금 피폐물로 가는 수밖엔…….

‘그렇지만, 내가 직접 쓰는 건 아니니까…… 괜찮을지도…….’

쓰는 건 에티엔이 할 거다. 나는 그저 힌트를 주는 정도.

그게 맞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재미있는 소재가 뭔지는 알아도 ‘소설’을 쓰는 건 그거랑은 다른 영역인걸.

한 줄짜리 소재를 긴 글로 풀어쓰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에이프릴을 여주인공으로 19금 피폐물을 쓰는 것도…… 나로선 불가능하고.

‘그러니 에이프릴과 남이고, 작가인 에티엔에게 맡기는 수밖에…….’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토공은의 줄거리와 인물 설정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얼마 후, 에티엔이 잠에서 깨어났다.

오후 4시였다.

‘낮잠을 두 시간이나 잤으니 자정 넘어 새벽에 잠들 게 분명해.’

딱 봐도 에티엔은 불규칙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욕실 거울에 비치는 에티엔의 모습을 흘겨보았으나 그녀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대충 세수하고 이를 닦은 에티엔이 부엌으로 나와 물을 마셨다. 배가 고픈지 윗배를 문지르고는 찬장에서 즉석밥 하나를 꺼낸다.

에티엔은 즉석밥의 포장을 뜯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2분간 돌렸다.

반찬이 없어 보이는데…… 뭐랑 밥을 먹으려는 걸까 싶던 차, 에티엔이 싱크대 아래 서랍을 열어 조미김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잘 보니 유통기한이 2개월가량 지나 있었다. 먹어도 괜찮은 건가, 이거…….

에티엔은 즉석밥과 김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고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너무 막 사는 듯한 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울컥하고 속상했다. 밥이라도 좀 잘 챙겨 먹지……. 즉석밥에 유통기한 지난 김이 뭐야…….

“……어?”

한편, 노트북을 켜고 오피스 프로그램을 실행한 에티엔이 놀란 듯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성해 놓고 잤던 ‘리메이크.hwp’ 문서에 뜻밖의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이게……?”

에티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며 훑어보더니, 곧 화색 어린 얼굴을 했다.

“이거 진짜 재밌다……! 세계수 님이 도와주신 건가요? 고마워요!”

아닌데? 내가 도와준 건데?

그러나 에티엔은 세계수가 도와준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듯했다.

나는 왠지 억울했으나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마음을 내려놓았다.

뭐, 날 에티엔 곁으로 데려온 건 세계수가 한 일이니까……. 토공은 내용도, 김지현일 때 본 것을 고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고.

에티엔은 아까보다 훨씬 의욕적인 기세로 시놉시스를 검토하고, 프롤로그 격인 1화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에티엔의 시각을 빌려 그 프롤로그를 읽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지현일 때 내가 읽은 내용과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왜 ‘거의’ 같냐면, 부분부분 다른 내용이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저 부분들은 내가 수정해 주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 대사는 하나도 설레지 않아……. 엄마……. 로맨스 독자들은 그런 거 안 좋아한다고…….’

……설마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에티엔을 서포트해 줘야 하는 건가?

.

며칠 후.

나는 그 설마가 맞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편집자로 강제 취직이라니.’

에티엔이 한 편 쓰고 나면, 그녀가 잠들었을 때 내가 그녀의 몸을 움직여 노잼 부분을 수정해 줬다.

며칠째 그런 식으로 나는 에티엔 전용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근데 이게 진짜로 진언서인가 뭔가 하는 그게 맞아? 그냥 19금 소설 아니냐고…….’

에티엔이 소설을 쓰면 쓸수록 의문이 깊어졌지만…… 그냥…… 묵묵히 돕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내 역할인 모양이니까.

‘이 역할을 다하고 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거겠지?’

어서 빨리 에이프릴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따금 마음이 초조해졌다.

한편으론, 어떻게 에티엔과 소통할 방법이 없을까 애가 타기도 했고.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내 시무룩한 기분 따위 알 길 없는 에티엔은 원고 한 편을 끝내고 너튜브에서 고양이 영상을 시청하며 꿀 같은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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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공녀의 은밀한 밤》은 베스트 순위에 올라 인기작이 되었다.

벌써 20화나 연재되었지만, 기억하기로는 163화쯤 연중했으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163화까지 도와야 한다니…….’

에티엔은 하루에 한 편씩 썼다. 웹소설 작가로서는 일반적인 속도였지만…….

‘한 편 쓰는 데 1시간밖에 안 걸리는 능력자면서 하루에 한 편만 쓰고 남은 시간에는 놀기만 해!’

3시간 투자하면 3편 뽑아낼 수 있을 텐데! 에티엔은 게을렀다.

역시 고생 안 하고 놀고먹고 싶어서 라니에로 왕과 결혼했다던 우리 엄마다웠다…….

“음……. 그렇구나. 그리되는 거로군요…….”

20편까지 집필을 도우며 새로 알게 된 점은, 집필하는 도중 에티엔은 세계수와 소통하며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떤 전개는 세계수의 의지에 따라 흘러가는 모양이었는데…… 그 전개라는 게, 내가 김지현일 때 보았던 것과 똑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이 진언서의 내용은 단순히 허구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IF의 세계인 걸까?’

‘만일 ~더라면.’ 하는 가정이 실현되어 재구성된 세계.

《토끼 공녀의 은밀한 밤》은…… 그런 세계일지도 몰랐다.

‘실제와 가장 다른 점은…… 나, 글로리아 아인스턴이 악역이라는 거.’

토공은 속 글로리아는 에이프릴을 지독하게 괴롭히고 학대했다.

그 영향으로 에이프릴은 점점 소극적인 성격이 되어갔고…… 밀턴 부인이 가르쳐주는 대로 얌전히 배우고 따라,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로 성장한다.

‘내가 아는 에이프릴은 제멋대로에 안하무인 토끼인데.’

그리고 그편이 더 에이프릴다웠다.

내 생각보다 훨씬 ‘글로리아’의 역할이 에이프릴의 성장에 크고 중요했던 모양이다.

에이프릴 생각을 하니, 또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저쪽 세상은 어떤 상황이려나…… 시간의 흐름이 이곳과는 다르려나? 내가 너무 오래 떠나 있는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세계수도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지금은 믿고 따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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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공은이 40화까지 연재된 어느 날.

댓글 창에 익숙한 닉네임이 등장했다.

[토끼탕(kimj****) : 크으 짜릿하다]

김지현이 확실했다.

그나저나 내 닉네임이…… 토끼탕이었지. 그래……. 그땐 별생각 없이 저렇게 지었었는데…….

‘다시 보니 여러모로 문제적이로군…….’

여하튼 김지현은 21화부터 댓글을 달기 시작해, 최신화인 40화까지 계속 댓글을 달았다.

[토끼탕(kimj****) : 광기? 오히려 좋아]

[토끼탕(kimj****) : 피폐 집착맛집 ㅇㅈ합니다;;]

[토끼탕(kimj****) : ㅠㅠㅠㅠ안대 ㅠㅠㅠㅠ 톢기살려]

[토끼탕(kimj****) : 아아악ㅋㅋㅋ미친놈아!!근데좋음]

[토끼탕(kimj****) : 이 다양하게 맛난 미친넘들.. 한명만 고를수없다.. 다같살 가시죠]

[토끼탕(kimj****) : 작가님 이거 해피엔딩인가여?ㅋㅋㅋㅋㅋ 암만봐도 감금엔딩 갈거 같은데여 ㅠ]

참고로 ‘다같살’은 ‘다 같이 살기’의 줄임말이다. 역시 헤비 인터넷 유저답게 줄임말과 밈을 마구 써댔다.

‘과거의 나를 보니 수치심이 느껴져…….’

질끈 눈을 감고 싶었으나, 지금은 에티엔의 의식이 깨어 있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티엔은 김지현의 댓글을 무척 흥미롭게 보았는데, 내가 김지현이라는 사실을 알아서라기보다는…… 그냥 저런 격한 반응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흠, 내일은 연참할까?”

‘……!’

연참? 지금 연참이라고 한 건가?

이 게으른 작가가 웬일로 연참할 생각을?!

‘아, 혹시 김지현의 격한 댓글 덕분인가…….’

역시 작가는 피드백에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인가 보다. 긍정적인 반응은 게으름뱅이도 연참하게 한다…….

에티엔은 정말로 연참할 생각인지 오늘은 저녁 늦게까지 4편이나 더 썼다. 진짜 글 쓰는 속도 하난 대단하다.

‘……근데 생각해 보니 에티엔이 한국어를 하는 게 신기하네. 세계수가 도와준 거겠지?’

실종된 줄 알았던 에티엔이 알고 보니 이쪽 세상에 있었던 것도…… 전부 세계수의 인도였을 터.

‘세계수가 에티엔에게 부여한 역할은 진언서를 쓰는 것이고…….’

……토공은은 미완결로 끝났지. 164화는 연중 공지였다.

에티엔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이제 나도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되는 건가? 과거에 와 있으니까?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내가 에티엔의 문제를 알게 된 건, 토공은이 90화까지 연재되었을 무렵이었다.

“아……. 이런…….”

늦은 아침. 욕실에서 양치하던 에티엔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토했다.

나는 기겁했으나, 에티엔은 별로 대수롭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제 수명…….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다고 하셨죠?”

‘뭐?’

에티엔이 질문한 상대는 당연히, 세계수였다. 세계수의 답은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고.

“……그렇군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사실 그 독을 마시고 살아난 것부터가 기적이었죠.”

‘독……? 독이라면…….’

후궁 네레이스가 에티엔에게 먹였던…… 그 독을 말하는 건가?

“세계수 님이 제 목숨을 연장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한계가 있다고 하셨죠. 이해해요.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데, 어떻게 그 많은 생명을 다 살릴 수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전 행운아죠. 덕분에 이런 자유로운 삶도 살아보고, 무엇보다…….”

잠시 말을 멈춘 에티엔이 깊어진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기억 속 누군가를 떠올리듯이.

“글로리아를 구할 기회와 방도를 얻게 되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전,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러고는 에티엔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해탈한 부처의 미소 같으면서도, 미련과 슬픔,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 역시. 덩달아 차오르는 애틋함에 더더욱 간절해졌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내 존재를 당신이 눈치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못다 한 이야기를 밤새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티엔에게 내 존재를 드러내도 괜찮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과거에 너무 지나치게 간섭했다가는…… 미래가 크게 바뀔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부디, 마지막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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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계절이 바뀌었다.

에티엔이 토공은을 연재하기 시작한 건 9월 초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2월이 되었고 토공은은 벌써 150화까지 연재되었다.

163화까진 13화밖에 남지 않았고, 에티엔의 수명도…….

“콜록……!”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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