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토끼 공녀의 은밀한 밤
“진언서는…… 에티엔 님이 세계수의 신탁을 받아 집필하신 일종의 예언서이자, 진실을 깨닫는 힘이 담긴 신탁의 글이에요.”
흘러넘치던 감정이 어느 정도 갈무리된 후, 나는 벨루인에게 궁금하던 것을 물었고, 벨루인은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저 역시 죽고 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죠. 바로 이 세계수를 통해서요…….”
벨루인이 고개를 들어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빛나는 나무는 하늘 높이 가지를 뻗은 장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세계수와 교감해 보세요, 왕녀님. 왕녀님께서 궁금해하시는 모든 것을 세계수가 알려 줄 거예요.”
교감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머뭇거리며 세계수에 다가가자니, 나비들의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계수에 손을 가져다 대 봐, 글로리아.}
{아니면 꼭 끌어안아도 돼~.}
{꼬옥 안아 줘~.}
……이렇게 큰 나무를 어떻게 끌어안으라는 거야?
자못 황당해하던 나는 손을 가져다 대기로 하고 슬그머니 팔을 뻗었다.
손바닥이 단단한 나무 기둥의 표면에 닿았다. 이 감촉은…… 정말로 보석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세계수를 뽑아다 팔아서 돈을 번다느니 하는 생각을 했었지…….’
그땐…… 아무런 기억이 없어서…….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
잠시 망설이던 나는 마음속으로 세계수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저기, 음……. 세계수 님……? 미안해요……. 뽑아다 팔면 돈이 되겠다느니 하는 생각을 해서…….’
그러나 사과한 게 무색하게도 세계수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민망해진 나는 자유로운 손으로 뒷덜미를 긁적였다. 역시, 뽑아다 팔고 싶다느니 하는 생각은 좀 심했나……?
세계수를 힐끔거리며(그래 봤자 시야로 들어오는 건 넓은 기둥뿐이었지만) 눈치를 보는데, 머릿속에서 어떤 소리가 웅웅― 하고 울리며 파고들었다.
“……?”
방금…… 세계수가 말을 한 건가?
사실 말이라기엔 어폐가 있는…… 원초적인 소리에 불과했지만, 놀랍게도 뜻은 전해졌다.
방금 그 울림은 ‘괜찮다’는 뜻이었다.
‘어……. 가, 감사합니다?’
우웅―.
세계수가 또 낮은 울림 같은 소리를 냈다. 이게 나한테만 들리는 것인지, 모두에게 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세계수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저, 그럼…… 이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제 어머니의 행방과 그 진언서라는 것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청하자, 다채롭게 빛나는 덩굴 같은 것이 세계수로부터 뻗어 나왔다.
순간 흠칫 놀란 나는 뒤로 물러날 뻔했으나, 세계수가 나에게 해를 끼칠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빛나는 덩굴들이 내 뺨을 소심하게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깃털로 간질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쩐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세계수가 한 차례 더 낮은 울림을 냈다.
세계수는 나에게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세계수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곧이어 세계수의 덩굴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기이한 감각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온몸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마치 어딘가를 부유하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끈 떨어진 채 아무렇게나 날아다니는 풍선이 된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저기…… 세계수 님……?’
세계수를 불러보았으나 아무런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고, 견디다 못한 나는 눈을 떠 버리고야 말았다.
바로 그 순간, 내 몸이, 아니, 의식만이―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갔다.
‘으아악?!’
쿵―!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
나는 누군가의 몸 안에 들어와 있었다.
.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이 사람의 몸에 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마치 내가 이 사람이 된 것처럼 보고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내 마음대로 이 사람을 움직이거나, 생각에 영향을 끼칠 순 없었다.
한마디로, 주인공 시점으로 극을 관찰하는 관객이 된 듯한 기분.
시각은 아침인 듯했고, 누구인지 모를 이 사람은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그, 혹은 그녀(신체적 특징으로 보아 그녀인 것 같았지만)는 뜨거운 차를 한 잔 끓여 마시더니, 다음으로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욕실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었고, 그 위에 비친 얼굴은 놀랍게도 낯이 익었다.
‘맙소사……. 이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어머니, 에티엔 아슈타드였다!
.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지만, 나는 에티엔의 시점으로 엿본 단서를 조합해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이미 지난 과거야. 아니, 현재일 수도 있고…… 어찌 됐든 나는 이 시간선에도, 에티엔의 의식에도 간섭하지 못해.’
에티엔도 내가 자신의 몸에 빙의되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심지어 나는 그녀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는데, 어쩐지 죄책감이 들고 곤혹스러웠다.
본의 아니게 어머니의 인권을 마구 침해하고 있다니…….
‘일단 여긴 내가…… 김지현일 때 살았던 세계가 확실해.’
김지현일 때 보았던 뉴스가 티브이에서 송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느 세상이나 먹고살기 힘드네.”
에티엔이 리모컨 버튼을 꾹 눌러 티브이를 꺼 버리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원래 머리색이 보랏빛이라 이 세상에서는 너무 튀기 때문에 염색을 한 모양이었다.
에티엔의 외모는 동양인과 서양인의 혼혈쯤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곳 한국에서도 ‘아버지가 프랑스인이다’라고 뻥을 치며 그럭저럭 신분을 잘 위조해(?)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문제는 에티엔이 저 말로 자기소개를 하면 ‘아 그럼 프랑스어 잘하시겠네요?’라는 질문이 돌아와 버린다는 거였다.
그럴 때마다 에티엔은 ‘아뇨? 너무 어릴 때라 다 까먹었는데요.’ 하고 뻔뻔하게 대꾸하곤 했다. ……역시…… 어머니는 이쪽 세상에 와서도 변함없구나…….
“네, 네. 알았어요. 일한다고요. 커피 좀 시키고…….”
에티엔이 대화하는 상대는 세계수였다.
세계수는 그녀에게 어떤 임무를 맡긴 모양이었는데, 그녀가 노트북을 켜고 한글 창을 열자 나는 그 임무라는 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진언서를 쓰는 것……!’
그런데 그 진언서라는 게……!
《어느 세계의 잔혹사》
……웹소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웹소설이 분명했다.
에티엔이 5000자 한 편을 퇴고하고는 웹소설 연재 사이트에 복사+붙여넣기로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이거…….’
내용이…… 내용이 진짜 재미없었다!
‘제목이랑 소개글도 구려!’
《어느 세계의 잔혹사》는 웹소설 형식에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었다. 그리고 소개글은 너무 구구절절이었다……. 심지어 1화는 이렇게 시작했다.
[아인스턴 왕국력 1789년.]
웹소설에서 도입부로 절대 쓰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제국력’ 혹은 ‘왕국력’ 따위였다.
이 문장이 가장 처음으로 보인 순간 독자들은 높은 확률로 뒤로 가기를 누른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세계의 잔혹사》의 조회수는 처참했다.
1화 조회수 10
2화 조회수 3
3화 조회수 1
…….
총 추천 수 22
총 댓글 수 0
누군가 초보 작가를 불쌍히 여겼는지 모든 편에 추천을 하나씩 눌러주고 갔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좋은 사람이다.
“이대론 안 되겠는데…….”
에티엔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매우 심각하다! 이 웹소설이 정말로 진언서라면, 내가 읽어야 하는 거잖아? 하지만 난 노잼 소설은 안 읽는다고!
“리메이크를 해야겠어.”
아니, 자, 잠깐만.
‘이걸 어떻게 리메이크할 건데……! 근본적으로 노잼이라고!’
제목, 소개글, 도입부, 다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리메이크는 의미가 없다. 나는 답답함에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히 에티엔도 아무 생각이 없지는 않은지, 사람들이 자유롭게 영상을 올리는 사이트인 너튜브에 들어가 ‘웹소설’을 검색한 후 이것저것 찾아보기 시작했다.
[웹소설로 1억 벌기! 웹소설 작가 되려면?!]
[현실적인 웹소설 작가 절망편]
[요즘 웹소설 제목 수준]
[야! 너두 억대로 벌 수 있어! 본격 인기 웹소설 강의!]
[웹소설 인기작 TOP 10 추천]
[웹소설 작가 되지 말아요]
거짓과 진실과 조롱이 뒤섞인 온갖 영상 중, 에티엔은 홀린 듯이 [웹소설 작가 되지 말아요]를 클릭했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왜 웹소설 작가가 되면 안 되는지 구구절절 자막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티엔은 무척 공감이 간다는 표정으로 그 영상을 시청했다. 본래의 목적은 까맣게 잊은 얼굴이었다.
‘아니…… 그만 보고 어떻게 리메이크할 건지나 생각하라고……! 엄마!’
할 수만 있다면 에티엔의 어깨를 잡고 재촉하고 싶었지만, 나는 꼼짝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저 에티엔의 시점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웹소설 작가 되지 말아요]를 다 본 후, 에티엔은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추천 영상에 떠 있는) 고양이 영상을 클릭했다.
짧은 광고가 한 편 지나간 후, 귀여운 시골 고양이가 나오며 이얏호응 하고 울었다.
에티엔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그 영상을 세 번이나 반복해 보더니, 다른 고양이 영상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웹소설 작법에 관한 것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돌겠네…….’
에티엔이 고양이 영상을 20개 봤을 때쯤 배달시킨 커피와 간식이 도착했다.
밥은 안 먹고 에그타르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거나 먹고 있으니 한숨이 푹푹 나왔다.
‘당뇨에 안 걸리려면 아침 공복에는 신선한 채소를 먹어야 한다고!’
걱정이 산 만큼 쌓인 내 마음을 알 길 없는 에티엔은 계속 딴짓만 하다가 오후 한 시쯤 낮잠이 들었다.
몸 주인이 잠들었어도 내 의식은 또렷하게 깨어 있었기에, 나는 이 상황과 진언서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이해해 보려 애썼다.
‘확실치는 않지만, 에티엔이 내가 읽은 《토끼 공녀의 은밀한 밤》을 쓴 저자가 맞는다면…… 이 시점에서 난 김지현으로 살아가고 있을 테지. 그리고 김지현일 때, 에티엔과 직접 만난 적은…… 내 기억으론 없고.’
에티엔이 웹소설이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아무리 세계수의 인도를 받고 있다지만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찾아내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테고…….
‘나를 만나서 진실을 전해준다 해도 문제가 있지. 김지현인 나는…… 에티엔을 미친 사람 취급할 테니까.’
그래서 진언서라는 수단이 필요했던 건가 보다. 내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진언서란 허구 속에 진실이 숨어 있는 것.
남들에게는 평범한 소설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힘을 발휘하는 신탁의 언어인 것이다.
‘진언서를 어떻게 쓰는 건지는 난 잘 몰라. 하지만 에티엔은 아는 모양이고…… 세계수가 에티엔에게 부여한 역할도 바로 진언서를 쓰는 거였겠지.’
……하지만 이대로는 답이 없다.
극도의 노잼 소설을 쓰는 에티엔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토끼 공녀의 은밀한 밤》 같은 대유잼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앞으로 3년은 더 수련해야 그 경지에 오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날짜를 보면…….
‘일주일 후가…… 토끼 공녀 연재 시작일인데.’
……불가능해. 갑자기 신내림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지금의 에티엔이 토공은 같은 인기 소설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난 도대체 어떻게 토공은을 읽을 수 있었던 거지?’
그때였다. 머릿속에 어떤 가정이 퍼뜩 떠올랐다.
‘……설마?’
에티엔은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시험 삼아 그녀의 몸을 손끝부터 움직여 보았다.
내 몸이 아닌 듯 이질적인 느낌이라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움직일 순 있었다!
눈을 뜬 나는 에티엔의 몸을 일으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책상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배경화면은 아까 에티엔이 열심히 보던 시골 고양이 사진이었다……. 나는 흐린 눈빛을 하며 가장 대중적인 오피스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하얀 공백. 빈 페이지가 시야로 가득 찼다.
키보드에 손을 얹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진짜…… 진짜 이거라고? 이게 맞는다고……?’
이래도 되는 건지, 문제가 생기진 않을지, 내 행동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하나뿐이었기에 착실히 손을 움직였다.
새까만 글자가 흰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토끼 공녀의 은밀한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