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세계수 아래에서
‘……정말 크다.’
맨 처음으로 든 감상은, 무척 커다랗다는 것이었다.
세계수는 정말로…… 하늘을 떠받칠 듯이 거대하고 장엄했다.
‘괜히 세계수라고 불리는 게 아니구나…….’
그리고 예전에 꿈에서 보았던 것처럼,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고 다채로운 빛을 냈다.
분명 나무는 나무인데…… 어쩌다 이런 형태가 된 것인지, 혹은 원래부터 이런 형태였던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비들은 알고 있을까?
{세계수야, 우리 왔어.}
{늘 고생이 많아.}
{조만간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다시 예전 모습으로……?’
그 말인즉…… 원래는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는 얘긴가?
{글로리아, 이쪽으로 와.}
{때가 됐어.}
{여기서 계속 너를 기다려 온 사람이 있어.}
여태 촐랑거리던 나비들이 별안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나비들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세계수와 아주 가까운 그 자리에…… 누군가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사람은 30세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실제 나이는 겉보기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게, 눈빛에서 묘한 연륜이 감돌았으니까.
“마침내 다시 만나는군요.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글로리아 왕녀님.”
“어…… 저를 아시나요?”
“알고말고요. 자, 어서 이리로 가까이…….”
그녀가 무척 감격하고 있다는 것을, 난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리고 나 역시…… 그녀를 본 순간부터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왜 나를…… 글로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무려 성지 히페리온에서.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상호 불가침의 성지일 텐데.’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건넨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런데…….
“……?”
내 손이 그녀의 손을…… 쑥 통과했다.
‘뭐야……?!’
놀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분명 혈색이 완연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인데…… 그런데…….
‘잡히지 않아……?’
내 반응에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몹시도 아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왕녀님,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이고, 지금 보시는 이 모습은…… 생전 남은 저의 미련 같은 것이랍니다.”
“당신이…… 도대체 누구인데요?”
“저는 어릴 적, 에티엔 님 곁에서 당신을 돌보았던 유모 벨루인입니다.”
“글로리아의 유모라고요……?”
“……딱하게도, 아직 기억이 온전하지 않으신 모양이로군요.”
그녀, 벨루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아니, 그런 흉내만 낸 것뿐이었다.
산 사람이 아닌 그녀의 손은…… 내 몸을 허무하게 통과할 따름이었으니까.
“왕녀님 곁을 계속 지키며 왕녀님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제 능력이 부족해…… 지켜드리지 못해 너무나 죄스럽고 송구합니다, 왕녀님…….”
“무슨…… 말씀이신지…….”
심장이 불안정하게 쿵쿵 뛰었다. 나는 어김없이 공포를 느꼈다. 세이렌을 만났던 그 순간의……. 도대체 난 무엇을 두려워하는 거지?
“왕녀님, 그 몸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입니다. 부디 잊고 계신 기억을 떠올리세요. 당신은 글로리아 아인스턴입니다.”
“아……. 난…….”
그 말이 기폭제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며 두통이 밀려들었다.
나는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계속 뭔가가…… 어떤 기억이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왕녀님, 당신은 열세 살 생일을 4주 앞둔 어느 날, 세이렌에게 몸을 강탈당했습니다.”
“……뭐…….”
“갈 곳을 잃은 당신의 영혼은 차원을 넘어 떠돌다 다른 이의 몸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지요.”
“…….”
“그러나 에티엔 님이 그 세계에서 당신을 위해 적어 내려간 진언서가 힘을 발휘했고, 당신의 영혼을 다시 원래 세계와 몸으로 끌어당긴 것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말은…….”
말도 안 돼.
내가 원래 글로리아였단 말이야?
빙의한 게 아니라― 원래 몸을 되찾은 거라고?
“……저기, 지금 제가 좀 혼란스러워서…….”
나는 벨루인의 시선을 피하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러다, 예전에 우리 엄마가…… 그러니까, 저쪽 세상의 엄마가 지나가듯 흘린 말을 불현듯 떠올렸다.
‘너 두 살 때 유행 독감을 심하게 앓아서 입원했었는데, 엄마가 밤새 간호하다가 갑자기 네 상태가 나빠져서 호흡도 끊기고 심장도 멈췄었거든. 그래서 허겁지겁 의사 호출해서 우리 애 살려달라고 울고 빌고…… 엄마 무신론자인데 그때 처음으로 기도해 봤다니까? 아무튼 다행히 응급조치하고 나서 호흡도 돌아오고 심장도 다시 뛰더라.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해. 지금은 네가 튼튼하니 망정이지…….’
그때 난 뭐라고 대답했더라?
그저 대수롭지 않게, ‘그래서 나 어릴 때부터 홍삼이랑 보약 질리도록 먹인 거야? 두 살 때 죽을 뻔해서?’라고 했던 거 같다.
그런데…… 그때…… 나는 죽을 뻔했던 게 아니라…….
‘난…… 나는…… 김지현이 아니었어.’
그 이름도, 몸도, 인생도, 사실은 전부 내 것이 아니었다.
진짜 김지현은 두 살 때 독감으로 죽었고, 나는…… 그 몸에 들어간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원래 몸을 잃고 차원을 떠돌다가…….
‘아…….’
‘우리 지현이 어떡해……. 우리 지현이 제발 살려주세요, 의사 선생님……! 우리 딸 아직 두 살인데……! 흑, 흐으윽……. 지현아…….’
그 모습이 너무나 슬퍼 보여서, 나도 모르게 김지현의 몸으로 이끌려 갔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영혼에 각인된 모든 기억을 잊었다.
나의 힘과 의무도, 내 진짜 이름도…….
전부 잊은 채 김지현으로 행복하게 살아갔다.
‘그 삶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었다니.’
막대한 충격이 의식을 강타했다. 멍하니 굳은 채 서 있던 나는, 무의식중에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벨루인…….”
“……!”
“이제 기억이…… 나요……. 날 것 같아요.”
당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내 운명이 어쩌다 이렇게 꼬여 버렸는지도…….
“내가 글로리아였구나…….”
나를 김지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살았던 세월의 기억들과 13세 이전까지의 글로리아의 기억들이 하나로 이어졌다.
끊어졌던 필름이 다시 붙고, 모든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했다.
나는, 글로리아 아인스턴은 라니에로 왕의 사생아였다.
내 어머니, 에티엔 아슈타드는 떠돌이 점술가로, 비록 출생 신분이 묘연한 사람이었으나 날카로운 통찰력과 예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내 어머니의 소문을 들은 라니에로 왕이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고, 어머니의 미모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를 정부로 삼았다.
그리고 내가 태어났다.
라니에로 왕의 수많은 자식 중 한 명, 글로리아 아인스턴으로.
‘그래, 이제 기억이 나. 어렸을 때 나는…….’
세계수의 나비들을 이미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
나비들은 내가 세계의 조율자가 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자신들과 계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언젠가 왕궁에서 벗어나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꿈이었던 나는, 그 제안을 연달아 거절했다.
그런 거대한 운명은 짊어지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세계수의 성령들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라니에로 왕이 알게 되면, 나와 어머니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라니에로 왕은 틀림없이 나를 성녀로 내세워 이용하려 들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도 머리 회전이 빨랐던 나는 거기까지 재빨리 생각해 냈고…….
나비들의 삼고초려를 계속해서 거절하다가…….
‘나중에! 나중에 어머니랑 왕궁을 탈출하면, 그때 가서 계약할게!’
바로 그런 조건부를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내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비들이 나를 기다려 왔다느니 하는 말을 했던 거야.’
나비들과의 약속은……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지켜졌다.
열두 살의 나는…… 어머니와 함께 궁을 나가 소박하게 산다는 꿈을 이루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고…… 내 몸도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어머니는…….’
어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후궁 중 한 사람에게 독살당했다.
아니, 그럴 뻔하였으나, 나비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그 후궁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했다.
네레이스라는 이름의 그 후궁은 끝내 어머니에게 살해당했고…… 어머니는 그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독약을 마신 후유증으로, 어머니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었고…… 치료사의 말론 얼마 못 버틸 거라고 했었지.
그래서 난 매일 어머니를 찾아가 곁에 머물곤 했었는데, 밤이 되면 내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머니를 찾아갔는데…….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지.’
그 후로는 어머니 없이 벨루인과 단둘이 지내며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열세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실종된, 아마 죽었을 것이 분명한 어머니 생각에 나는 늘 우울했으나 그래도 꿋꿋이 버티려 애썼다.
살아남으렴, 글로리아. 그게 어머니가 사라지기 전,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열세 살 생일을 맞이하기도 전에……’
나는 정체불명의 두려운 존재에게, 몸을 강탈당하고 만다.
그 존재는 내 몸에서 영혼을 뽑아내고 자신이 그 안에 깃들었다.
영혼이 뽑힐 때의 그 감각은…… 다시 떠올려 봐도 너무나 끔찍했다.
그 두려운 존재는 내 몸을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나를, 내 영혼마저 완전히 소멸시키려 했으나…….
나비들의 도움으로 나는 무사히 그 존재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대신에, 차원을 이리저리 떠돌게 되었지만…….
‘내가 계속 두려워하며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기억은…… 그 존재에 대한 것이었어.’
아직도 뇌리에 각인된 공포가 선명하다.
그 존재는…… 나비들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이야기를, 혹은 운명을 포식하는 자.’
나비들은, 사람의 인생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가 곧 운명이라고 했다.
수많은 운명이 강줄기처럼 흘러 바다를 이루고, 그것으로 세계의 명운을 결정짓는다고…….
포식자는 바로 그 운명을 야금야금 먹어 치워…… 종국에는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한다.
세계의 파멸, 이야기의 종말이 포식자의 목적.
‘왜 그런 짓을 하는 건데?’
{그건 포식자가 근본적으로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야. 모든 이야기를 탐식하도록. 전부 집어삼켜 사라질 때까지 영원히…… 포식자는 이야기를 먹어. 그게 그것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야.}
그것은 단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인 괴물이라고, 나비들은 말했다.
그 포식자를 피해 도망쳐 차원을 떠돌던 내 영혼은 김지현의 몸으로 들어가 그 삶을 대신 살게 되었고…….
모든 기억을 잊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까닭은…….
‘어머니가 적어 내려간 진언서 때문이라고…… 했지?’
벨루인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난 후, 조금 진정이 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벨루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에 앞서…… 영혼만 남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안타까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내가 포식자에게 몸을 빼앗긴 뒤에…… 벨루인도 그 괴물에게 살해당한 거겠지.’
그런데도 이렇게 세상에 남아……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내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벨루인의 형체 없는 손을 그러잡으며, 아니, 그런 흉내를 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벨루인. 여태 나를 기다려 주었구나. 길고 긴 세월이었을 텐데.”
그러자 벨루인은 가슴 아플 만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왕녀님. 언젠가 왕녀님을 다시 만나는 것이 저의 유일한 바람이었는걸요. 이렇게 돌아와 주셔서…… 저는 무척이나 기뻐요.”
내 안의 그리움과 슬픔이, 기억을 되찾음과 동시에 마침내 터져 나온 감정이 벅차올랐다.
나는 벨루인을 힘껏 끌어안으려 했지만, 내 팔은 그녀의 몸을 허무하게 통과할 뿐이었다.
그 사실이 몹시도 슬프게 느껴졌다.